[스페셜1]
리얼판타영화제2005 가이드 [4] - 짧지만 판타스틱
2005-07-12
글 : 남다은 (영화평론가)
짧으면 어때. 판타스틱한데
<핵분열가족>

예상치 못한 곳에서 발산되어 전체를 휘감는 찰나의 빛, 그 짜릿함과 감동과 공포의 순간들. 이것이 판타스틱영화의 묘미이다. 영화는 그 자체로 이미 현실적인 판타지, 판타지적인 현실이게 마련이지만, 여기 ‘판타스틱영화’들은 유달리 현실의 강박에서 벗어나 한계를 모르는 상상력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실험적인 상상력만으로 다른 모든 영화적 조건들, 예컨대, 영화 분량이나 예산 혹은 기술적 조건의 미흡함을 웃어넘길 수 있는 영화들. ‘짧지만 판타스틱’ 섹션에 출품된 단편영화들의 승부수는 바로 이 기발한 무한대의 상상력에 있다. 총 26편으로 이루어진 ‘짧지만 판타스틱’ 섹션은 한국뿐 아니라 각국에서 날아온 단편들로 채워져 있다. 이들이 다루는 주제는 다채롭지만, 그 주제에 도달하는 과정에는 언제나 극단화된 숨을 몰아쉬는 감각과 욕망, 사물이 있다.

박수영, 박재영 감독의 <핵분열가족>은 집안 곳곳에 분열의 흔적이 다분한 중산층 가족의 일상과 핵무기 발사라는 전혀 관계없는 주제의 간극을 능숙한 솜씨로 메운 영화다. 화목한 가족사진과 그뒤에 숨겨진 부패한 가정, 그리고 이 썩어가는 가족들을 향해 날아오는 핵은 한국사회의 비뚤어진 가족주의를 유쾌하게 짚어낸다. 물론, 그것은 새빨간 피를 뒤집어쓰고 머리에 도끼를 꽂은, 다분히 컬트적인 인물들에게서 비롯된 소름 돋는 유쾌함이다. 이지행 감독의 <호랑이 푸로젝트>는 대부분의 판타스틱영화들이 역겨움과 끔찍함을 통해 현실을 반추하는 것과 달리, 나른한 일상 속에서 전혀 자극적이지 않으면서도 기이한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호랑이 해, 사회적으로 잘 나가는, 그것도 보수적이지 않은 호랑이띠 여자들이 실종된다는 주제도 흥미롭지만, 여기에 더해지는 음모론과 기존의 영화들에서 보기 어려웠던 이색적인 여자 인물들(문소리도 깜짝 출연한다)은 그 존재감만으로도 신선하다.

‘짧지만 판타스틱’에 출품된 한국 단편들의 세밀한 내러티브도 주목할 만하지만, 해외 단편들이 보여주는 마지막 순간의 귀여운 뒤집기 역시 소박한 반전의 쾌락을 선사한다. 대표적으로 디디에 퐁탕의 <영원한 일상>은 인형 같은 인물들과 인형의 집 같은 세트로 눈길을 끄는데 그것이 바로 반전의 열쇠였음을 짐작하기란 쉽지 않다. 알렉산드라 페레즈-세오안의 <위층은 시끄러워> 역시 영화 끝, 단 한 장면에 이르러서야 영화 전체 내용을 다시 떠올리게 만드는 반전을 숨기고 있다. 이 밖에도 웰비 잉스 감독의 <소년>은 현란한 편집과 독특한 방법으로 전달되는 언어, 슬픔과 잔인함이 동시에 묻어나는 이야기를 통해 한편의 우울한 뮤직비디오 같은 장면들을 완성한다. 특히 영화 속 소년은 <호랑이 푸로젝트>의 여자 인물들만큼 인상적인데, 그는 마치 현실로 떨어져 날개를 잃고 세속에 고립된 무력한 천사처럼 보인다.

<소년>
<위층은 시끄러워>

이 밖에도 발린트 케니에레스 감독의 <새벽이 오기 전에>나 홍원찬 감독의 <골목의 끝>은 전혀 환상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매우 건조하고 현실적인 시선으로 현실을 바라보지만, 그 현실 자체에 이미 내재된 비현실성을 포착하는 데 성공한다. <새벽이 오기 전에>에서 푸른 새벽, 출렁이는 밀밭 속에서 생존을 위해 어딘가로 향하려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고개를 드러내는 순간, 그리고 그들을 잡기 위해 출몰한 군인들과 헬기소리가 고요한 밀밭에 울려퍼지는 순간은 지극히 사실적이지만, 한편의 그림처럼 사물화되어 있다. <골목의 끝> 역시 군대라는 완벽한 현실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나 의경들의 지루한 일상과 그들이 근무하는 고급 주택지의 모습이 대비되며 마치 소설 속에서나 나올 법한 풍경을 만들어낸다.

마지막으로 ‘판타스틱영화’라고 한다면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애니매이션의 상상력일 텐데, 그중에서도 조수진 감독의 <눈물이 생기는 경로>는 요란하지 않지만 깊은 감수성으로 뭉친 영화다. 여자의 입에서 흘러나온 “그만 만나”라는 단어가 남자의 뇌로 들어가 어떻게 눈물을 만드는 것일까. 그 과정에서 지난날의 추억은 날아가고, 그와 그녀가 맞잡은 두손은 부서지고, 하나였던 연인은 둘로 갈라진다. 남자의 눈에서 마침내 한 줄기 눈물이 흐를 때, 이 짧은 흑백의 판타지는 슬픔과 아름다움을 경험한 한편의 시가 된다. 그리하여, ‘짧지만 판타스틱’의 결론. 짧으면 어떤가. 판타스틱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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