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리얼판타영화제2005 가이드 [2] - 동구권 SF영화 특별전
2005-07-12
글 : 정한석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글 : 김도훈
들어는 봤나? 사회주의 판타스틱

<아엘리타>

톨스토이 소설에서 태어난 러시아 최초 SF

야코프 프로타자노프의 <아엘리타>는 러시아 작가 알렉세이 톨스토이의 SF소설 <아엘리타, 화성의 여왕>을 원작으로 한 SF영화이며, 러시아 최초의 대규모 예산영화다. 발표 당시 <아엘리타>는 미국 진영의 할리우드영화들과 상업적으로도 경쟁이 가능하며 이데올로기적으로도 올바른 작품으로 평가받았다. 영화는 지구와 화성의 이야기를 교차하며 보여준다. 우주선 기술자 로스가 탐사선을 완성해 화성에 도착하고 그곳에서 지구에 많은 관심이 있는 아엘리타를 만나면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한편으로 화성은 독재자 타스쿱이 지배하고 있는 곳인데, 곧이어 혁명이 봉기하게 된다. 독일 표현주의 시대 프리츠 랑의 거대 SF서사시 <메트로폴리스>가 만들어지기 3년 전인 1924년에 만들어진 이 영화는 무엇보다 화성을 표현한 세트의 규모와 디자인으로 눈길을 끈다. 매우 조형적인 방식으로 표현주의와의 연계를 되짚게 하고 있을 뿐 아니라, 러시아 구성주의와 입체파를 환기시킨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오존 호텔에서의 8월 말>

인류 문명에 대한 시적인 우화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는 폐허의 시대. 핵전쟁으로 인해 인류는 멸망했고, 문명은 황폐화됐다. 영화가 시작하면 몇명의 여자들이 끝없이 허허벌판을 가로질러 어디론가 가고 있다. 그 무리를 한 노년의 대모가 이끌고 있다. 그 길에서 마주친 노년의 남자. 무리는 그에게 초대받아 오존 호텔에서 잠깐 휴식을 취한다. 그곳에서 이제는 잊혀진 문명의 생존품들을 만난다. 핵전쟁 전의 시대를 살았던 대모는 그것들을 알고 있지만, 핵전쟁 이후 세대에 속하는 젊은 여자들은 접해보지 않은 전축의 음악소리에 넋을 빼앗긴다. 그들은 그곳에서 처음으로 문명을 만난다. 그러나 대모는 죽게 되고, 이제 젊은 여자들은 호텔을 떠나 다시 다른 생존자들을 찾아가려 한다. 외로움에 헐벗은 남자는 그들에게 가지 말 것을 권고하지만, 도리어 여자들은 그가 지니고 있던 문명의 이기들을 뺏어가고 싶은 마음을 숨기지 못한다. 아무런 죄의식 없이 벌어지는 범죄. <오존 호텔에서의 8월 말>은 문명에 대한 우화이다. 핵전쟁에 대한 두려움을 인류의 문명에 대한 우화로 바꿀 뿐 아니라, 매우 시적인 방식으로 성찰한다.

<가가: 영웅에게 영광을>

기괴한 디스토피아

강제로 우주선에 태워져 머나먼 행성으로 떠나온 주인공. 지구에서 그는 죄수에 불과했다. 위험 때문에 일반인들은 하지 않으려는 그 일을 맡아하게 된 것이다. 그가 도착한 행성은 오스트레일리아 458이다. 여기서 그는 영웅으로 불린다. 그러나 그가 영웅으로 불리는 이 행성은 지구와 크게 다를 바 없다. 그러나 마치 지구에 대한 묵시록적인 모습인 것처럼 기괴함으로 가득 차 있다. 핫도그에는 사람의 잘린 손가락이 섞여나올 뿐 아니라, 그 손가락은 문을 여는 열쇠이기도 하다. 도처에서 괴물 같은 존재와 맞부딪쳐야 하고, 기이한 상황들을 경험해야만 한다. 주인공은 낯선 남자의 안내를 받기도 하지만, 젊은 여자를 만나 사랑에 빠지기도 한다. 그는 그녀와 함께 이 행성을 빠져나가고 싶어한다. 그러나 쉽지 않다. 행성은 모든 것이 공포스럽고 어둡다. 영화는 이상한 환멸감으로 가득 차 있고, 디스토피아적인 시선이 영화 곳곳에 배어 있다. 묵시록적인 분위기에 휩싸여 있는 영웅의 모습은 버려진 인간의 최후처럼 보일 뿐이다. 당시 폴란드에 대한 묘사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섹스미션>

MTV식 세트와 의상에 웃기는 대사

<섹스미션>은 1983년에 제작된 영화다. 영화 속 시작의 배경은 어느 미래 1991년이다. 두 남자는 실험 대상으로 3년간의 동면에 들어간다. 그런데 일이 잘못됐다. 그들이 동면에서 깨어난 때는 2044년. 예상과 달리 53년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났다. 좁은 방에 갇혀 영문 모를 감방생활을 하던 그들은 기이한 사실을 알게 된다. 몇 십년이 훌쩍 지난 지금 세상에는 남자라는 종족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 단지 그들만이 최후의 남자일 뿐이다. 세상은 격변을 겪었고 그것을 계기로 남은 건 여자들뿐이다. 여자들은 남자들이 없는 세상을 존속하기 위해 남아 있는 그들조차 거세하려고 든다. 그뒤부터 그들의 생존과 탈출을 위한 몸부림이 시작된다. <섹스미션>은 이데올로기에 구애받지 않는 드문 동구권 SF 대중영화다. 시종일관 유쾌한 웃음도 있다. 예를 들어 남자들의 가장 큰 무기는 키스. 그걸 당하면 여자들은 힘을 못 쓰고 쓰러진다. 마치 촌스러운 MTV의 한 장면에 나올 듯싶은 세트와 의상들, 그리고 결말부의 난감한 혹은 어이없는 반전이 대중영화로서의 재미를 준다.

<우주 끝으로의 여행>

SF의 고전적 상상력을 재현한다

때는 서기 2163년. 알파 센터우리를 향해 항해하고 있는 우주선. 벌써 4개월째 우주선 생활을 하고 있는 비행사들은 그 안에서의 제한을 최대한 즐기려고 노력한다. 기기를 이용하여 일광욕을 할 뿐 아니라, 어느 날은 우주선 안에서 무도회를 열어 즐기기도 한다. 그러나 그때 울리는 비상 신호. 1987년에 쏘아올렸던 비행선이 발견된 것. 그러나 탐사 결과 거기에는 생존자가 남아 있지 않다. 그뒤로 비행사들이 하나둘씩 쓰러져가고, 기이한 일들이 반복적으로 그들을 덮친다. 이 영화의 주공간은 우주선의 실내 세트뿐이지만 카메라의 역동적인 움직임은 공간의 한계를 상쇄한다. 그런 점에서 영화를 여는 첫 장면은 매우 인상적이다. 게다가 마치 과학 전시관을 방불케 하는 혹은 스타트랙의 스튜디오인 듯한 이 영화의 많은 부분이 SF 분야의 고전적인 상상력을 재현해내고 있다. 그중에서도 추상적으로 디자인된 실내의 구조물들이 가장 눈에 띄고, 스크린을 이용한 효과와 로봇 등의 사용이 재미있다. 음악과 효과음도 한몫한다. 무엇보다 <우주 끝으로의 여행>은 우주라는 미지의 공간을 몽환적 분위기로 표현하는 데 많은 신경을 썼다.

<은하에서 온 방문자들>

잔혹함과 슬랩스틱 코믹이 동시에

아마추어 SF소설가 로버트는 생각을 물질화할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 좋은 책을 쓰는 데는 하등 도움될 것 없는 이 능력은 3명의 외계인을 지구로 불러들이고 만다. 크로아티아의 작은 마을은 이제 2명의 장난꾸러기 꼬마 외계인들과 그들을 돌보는 8등신의 외계인 안드라로 인해 난장판이 되기 시작하는데, 문제는 로버트와 8등신 외계인 안드라가 서로에게 성적으로 이끌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꼬마들이 가져온 괴물은 집안을 쑥밭으로 만들기 시작한다. <은하에서 온 방문자들>을 한마디로 표현하기는 난감하다. 고전 SF의 절묘한 패러디이기도 하고, 집단적인 광기나 관습적 멜로드라마를 슬그머니 비꼬는 블랙코미디이기도 하다. 특히 클라이맥스를 장식하는 괴물의 결혼피로연 습격장면은 잔혹함과 슬랩스틱이 제멋대로 뒤섞여 낄낄거리며 보지 않을 수 없다. 1984년 판타스포르투영화제에서 각본상을 수상한 이 괴작은 미지의 영토에서 찾아온 신나는 오락거리다.

<고요한 행성>

<솔라리스> 원작자 스타니슬라프 렘의 스페이스오페라

먼 미래. 지구는 하나 인종도 하나, 모든 국가들이 평화를 누리는 시대가 왔다. 보이저의 항해도 오래전에 끝났을 이 시대에 금성인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 저장장치가 고비사막에서 발견된다. 이제 “사회주의 세계연방”의 기치 아래 전세계적인 우주비행사들이 선정된다. 외계의 문명을 찾는다는 희망을 안고서 “코스모크레이터호”를 타고 금성에 도달한 그들은, 원자력 무기를 개발하다가 스스로를 멸망시킨 문명의 페허만을 발견하게 된다. 소비에트 연방이 추진했던 우주프로그램 ‘스푸닉’의 성공에 힘입어 만들어진 <고요한 행성>은 한동안 서구 SF팬들에게는 “가장 영향력 있는 동유럽산 전후(戰後) 스페이스오페라”로 불려왔다. 테크니컬러의 색채로 가득한 화면과 세트, 특수효과는 당시 전성기를 구가하던 미국 SF영화의 수준에 뒤처지지 않는다. <솔라리스>의 원작자이며 동구권 최고의 SF작가인 스타니슬라프 램의 원작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성운 속에서>

노동자 해방을 외치며

일단의 우주비행사들이 구조를 요청하는 무선 신호를 따라 어느 외계행성에 도달한다. 행성의 주민들은 그들에게 성대한 만찬을 대접하고, 비행사들은 아라비아식 향연을 즐기며 질펀하게 논다. 하지만 몇몇 우주비행사들은 주민들의 행동에 이상한 점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행성의 지하에 구조를 기다리는 지구인들이 중노동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노동자 해방에 대한 함의를 품고 있는 <성운 속에서>는 상당한 제작비가 투여된 미술과 세트가 눈에 띄는 작품이다. 하지만 무거운 주제와 영화의 규모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는 않다. 영화가 만들어진 해는 76년. <스타워즈> 이전의 70년대는 SF영화 사상 가장 촌스러운 시대였고, 이 작품을 있는 그대로 유쾌하게 즐길 수 있는 사람들은 은색의 번쩍이는 세트로 치장된 싸구려 SF의 매력을 아는 사람들일 것이다. 사이키델릭한 댄스와 누드장면들이 존 부어맨의 괴상한 SF영화 <자도즈>(1974)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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