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우주전쟁>과 스필버그 [1]
2005-07-19
글 : 김혜리
아름답다! 스필버그의 불안과 공포

비밀주의 마케팅을 고수한 스티븐 스필버그와 톰 크루즈의 여름영화 <우주전쟁>이 뇌성없는 벽력처럼 포문을 열었다. 영화의 실체는 과연 위력적이다. 박스오피스 반응 역시 스필버그의 명성에 오래간만에 호응할 조짐. 지난 6월29일 북미 개봉한 <우주전쟁>은 6일간 1억1328만달러를 벌어 2000년대 들어 스필버그 최고 흥행작이 될 전망을 높이고 있다(<캐치 미 이프 유 캔> 최종수입 1억6460만달러). <우주전쟁>의 오프닝 성적이 말 많은 톰 크루즈와 케이티 홈즈 커플에 대한 국민 찬반 투표가 되는 게 아닐까 하는 파라마운트의 염려는 기우로 끝나는 듯하다. 2005년은 스필버그와 그의 30년지기 조지 루카스가 다시금 엔터테인먼트의 명장 계관을 위풍당당하게 탈환한 여름으로 추억될 것이다.

또한 SF블록버스터 <우주전쟁>은, 이미 ‘할리우드’의 비슷한 말이 돼버린 스티븐 스필버그라는 이름의 실체, 즉 영화감독으로서 그의 고강한 기량과 개성을 새삼 돌아보게 한다. 판타지의 귀재, 흥행 마법사, 피터 팬 등등 시큼해져버린 상투적 브랜드 네임 뒤에서, <쉰들러 리스트> 이후의 스필버그는- <아미스타드> 같은 예외적 태작을 제외하면- 꾸준히 더 복잡하고 도전적인 영화를 만들어왔다. 그리고, 호러에 가까운 순수한 생존투쟁극 <우주전쟁>은 그 점을 어느 때보다 노골적으로 입증한다. <우주전쟁>을 통해 스필버그의 현재를 관찰하고 외계인 침공영화의 계보를 돌아본다.

어떤 자도 이런 것을 감히 ‘전쟁’이라 부르지 못할 것이다. 도도새들도 그들의 강요된 멸종을 전쟁이라 이해하며 죽어가지 않았으리라. <우주전쟁>의 외계인 지구 침공에는 최후통첩도 협상도 없다. 백악관이나 타지마할 같은 명승지부터 박살내서 본때를 보이는 협박 절차조차 이 침략자들에겐 귀찮다. 제우스의 작살 같은 번개가 지상에 내리꽂히면 콘크리트 시가지 아래에서 세발 달린 거대한 살상 기계(트라이포드)가 솟아오르고 인간과 그들이 이룩한 문명을 불문곡직 가루로 날려버린다. 어째서? H. G. 웰스의 1898년작 동명 원작소설의 설명을 빌리면, 화성인들은 우리보다 먼저 종말의 위협을 받았기 때문이다. 얼어붙은 공기와 말라붙어가는 바다는 그들의 지능을 날카롭게, 영혼은 잔혹하게 만들었다.

세계는 변했고, 스필버그도 변했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우주전쟁>이 아비규환의 한복판에 내던지는 남자는 뉴저지의 부두 노동자 레이 페리에(톰 크루즈)다. 아내(미란다 오토)에게 이혼당한 그는 형편없는 남편이었고 형편없는 아버지다. 18살의 불만에 찬 아들 로비과 10살 난 조숙한 딸 레이첼(다코타 패닝)은 아빠를 원망한다기보다 성가셔한다. 재혼한 아내와 아이들 앞에서 레이의 모습은 아버지라기보다 뿌루퉁한 큰아들 같다. <우주전쟁>은 초반 단 10여분 동안 이 가족의 상태를 명확히 브리핑한다. 면허없이 차를 몰고 나간 아들을 잡으러 거리로 나간 레이는 이웃들과 함께 불길한 먹구름을 발견한다. 그리고 얼마 뒤 모든 것이 부서져내린다. “아빠, 테러리스트들이 그런 거예요?” 어린 딸은 울먹인다.

<우주전쟁>을 외부 세계에 대한 미국사회의 이해력 결핍을 시사한 <터미널>과 더불어 9·11 사태에 대한 스필버그의 영화적 반응으로 간주하는 것은 온당한 관전평이다. <인디펜던스 데이>나 <화성침공>은 장난이어도 좋았고 복고적인 키치여도 좋았지만 9·11 이후 외계인의 침공은 농담거리가 되기 힘들어졌다. 무심한 눈에도 스필버그가 <우주전쟁>를 선택한 것은 사필귀정으로 보인다. 표면적 소재만 꼽아보아도 <우주전쟁>에는 <미지와의 조우>와 <E.T.> <마이너리티 리포트>가 매달려 보여준 현실 외부의 세계- 미래와 우주- 에 관한 집착적 상상력이 있고, 역기능을 일으킨 가족에 대한 서러움이 있으며 <쉰들러 리스트>의 홀로코스트 이미지가 있다. 또 스필버그가 최근 제작한 TV시리즈 <테이큰>의 적대적인 외계 생물이 등장한다. 무엇보다 스필버그는 외계인 또는 그 존재에 대한 인류의 강박관념을 실체로 믿는다. “(외계인에 의한 납치 경험담에는) 그저 거짓말과 정신이상의 징후일 뿐이라 하더라도 설명할 수 없는 디테일의 일치가 있다”고 그는 말한 바 있다. 그런데 70, 80년대 나온 <E.T.>나 <미지와의 조우>의 우호적 외계인과 <우주전쟁>의 맹수 같은 외계인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은 우리를 의아하게 한다. 스필버그의 설명은 간단하다. 세계가 변화했고 나이든 자신의 우주관과 세계관도 달라졌다는 것이다.

곤혹스럽게 아름다운 재앙

숱한 SF 블록버스터와 스스로의 전작을 복제할 위험을 스필버그가 비켜간 1차적 요령은 ‘하지 말아야 할 것’의 목록을 만든 것이다. 시나리오 작가 데이비드 코엡이 만든 리스트는 <우주전쟁>에서 잘 관철됐다. “각국의 수도 및 명승지를 파괴하지 말 것. 뉴욕을 쓸데없이 때려부수지 말 것. 정치가, 과학자, 장군을 내세우지 말 것. 전술 지도 펴놓고 모형을 움직이는 회의나 방송 기자의 보도장면이 없을 것.” 어리석은 클리셰들을 지워낸 위에 <우주전쟁>이 그려낸 재앙의 지옥도는 특출하다. 당혹스럽게도 심지어 아름답다. 수천번도 더 본 장면 같은데 난생처음 보듯 숨차다. 이 분야의 장인인 롤랜드 에머리히나 마이클 베이 감독의 블록버스터들을 돌아보면, 그들이 관객의 주목을 호소하는 대목은 거의 언제나 재난의 사이즈다. 그들은 관객을 전망대에 올려다놓고 파리 시가지를 방사형으로 불사르거나 맨해튼을 해일로 말아먹으며 이 재앙의 대단한 크기를 좀 보라고 졸부처럼 채근한다. 그러나 스필버그의 <우주전쟁>은 무너지는 빌딩의 파편을 뒤집어쓴 우왕좌왕하는 군중의 신경으로 재앙의 촉감을 전한다. 모든 파편과 비명은 이유가 있다. 트라이포드가 시가지를 초토화할 때 사람들은 울부짖는 게 아니라 마비된 얼굴로 달린다. 여기서 스필버그가 재활용한 것은 <라이언 일병 구하기>가 구사한 영화적 시야다. “나는 공중을 나는 새의 시점이 아니라 지상에 있는 인간의 시점, 아니 어린아이의 시점을 원했다.”

<우주전쟁>은 우리가 잊고 있었던 스필버그 영화의 원초적 저력-이미지만으로 문장을 쓰는 ‘순수 영화’의 파워를 환기시킨다. 그것은 <우주전쟁>이 포식자와 먹이가 쫓고 쫓기는 단순한 구조에 집중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뉴저지에서 시작해서 보스턴에서 끝나는 짧은 로드무비이기도 한 <우주전쟁>은 스필버그의 초기작 <결투>와 <죠스>처럼 모든 살점을 발라낸 뼈대 같은 이야기다. 살아남고 내 새끼도 살려내겠다는 내장에서 솟구치는 본능이 여정을 이끄는 드라이브다. 딱 두 장면에 모습을 드러내는 <우주전쟁>의 외계인은 얼굴이 보이지 않는 운전자가 원인 모를 악의를 품고 주인공을 집요하게 깔아뭉개려 몰아대는 <결투>의 바퀴 18개짜리 트럭과 흡사하다. 그리고 <결투>가 그랬듯 <우주전쟁>의 가장 절묘한 재주는 그들이 누구이며 왜 우리를 죽이려드는지 알고 싶은 마음이 자꾸 희미해지도록 만든다는 점이다.

<우주전쟁>이 이루는 첫 정점은, 폭음과 정적, 폭풍과 달그랑거리는 풍경소리가 불규칙하게 교대하며 자아내는 불안의 시간이다. 양부모에게서 아이를 찾아가려는 부부의 탈주기 <슈가랜드 특급>(1974)에도 이런 순간이 있다. 숨가쁜 추격전 도중에 침묵의 간주가 끼어들어 긴박감 속의 권태와 동요를 포착하는 것이다. 한편 테크놀로지로 완성된 묵시록 <우주전쟁>에는 이미지로 쓴 진혼곡이 흐른다. 아버지는 어린 딸의 눈을 가리며 주검들을 보지 못하게 하려고 기를 쓰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미션이다. 강기슭에 선 소녀의 눈앞에는 시신 한구가 둥둥 떠가고 그것은 둘, 셋으로 불어나 마침내 배를 뒤집고 죽은 생선떼처럼 강물을 메운다. 외계의 광선에 맞아 산화한 인간들의 옷은 화살을 맞은 흰 새의 무리처럼 밤하늘로부터 떨어져내린다. 이처럼 스필버그는 전쟁 뉴스를 볼 때마다 사람들을 아프게 해온 이미지들을 하나의 시화(詩畵)로 만들어버린다. 외계인이 거의 모습을 보이지 않는 <우주전쟁>이 가장 강력하게 연상시키는 할리우드의 근작은 M. 나이트 샤말란의 <싸인>이다. 그러나 M. 나이트 샤말란과 달리 스필버그에게 있어서 치명적인 위협이나 구원의 희망은 반드시 우리 내부가 아닌 외부에서 온다. 그래서 스필버그가 그리는 위기의 인간은 밀실이 아닌 군중 속에 있으며 그의 내면 풍경은 스펙터클이나 지옥도를 압도하는 법이 없다. 사실 <우주전쟁>의 진짜 주인공은 톰 크루즈가 아니라 공포 자체다. 거꾸로 그래서 <우주전쟁>의 톰 크루즈는 적역이다. 열정을 증명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미소를 유지하려다 경직되어버리는 크루즈 특유의 매너리즘은 이 영화와 썩 잘 어울린다.

<우주전쟁> 이렇게 찍었다

스필버그 영화 사상 제일 빨리 찍은 영화

소년 스필버그는 아버지의 직업 탓에 전학을 밥 먹듯 했다. 그 때문인지 스필버그는 안정적인 인간관계에 애착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67년부터 지겹게 사귄 친구 조지 루카스와 여태 한번도 다툰 적이 없다고 공언할 정도다. 자연스런 결과로 그는 영화도 친숙한 팀과 되풀이해서 만들기를 즐긴다. <우주전쟁>은 스필버그가 고정 멤버로 안착된 제작팀과 아홉 번째로 같이 찍은 작품이다.

<우주전쟁>의 사전 제작기간은 이례적으로 짧았다. 촬영 역시 2004년 11월 뉴저지주 뉴왁에서 시작돼 2005년 올 3월 중순에 끝나 지난 12년간 스필버그의 영화 중 최단 공정을 기록했다. 미지의 피조물이 나오는 SF판타지를 만들 때 스필버그의 보안은 투철하다. <우주전쟁>에서도 외계인 이미지가 포함된 화면은 텐트 안에서 스필버그와 한정된 스탭만 확인했다. 스필버그는 9번째로 그의 카메라를 잡은 촬영감독 야누츠 카민스키에게 공포를 극대화할 것, 불완전한 인간의 시점으로 찍어줄 것을 당부했다. 2차대전 퇴역 군인이 묘사한 전투의 광경에 기초해 모든 것을 전장을 구르는 군인의 시점으로 찍었던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경험을 이식한 것이다.

스필버그 영화는 대부분 자연광의 상태를 무시하고 촬영된다. 하나의 신을 날씨나 조명 때문에 회차를 변경해 찍기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주전쟁>에서 스필버그는 시각적 연속성을 크게 존중했다. 카민스키에게 <우주전쟁>은 자연광을 거의 최초로 이용한 스필버그 영화였다. <우주전쟁>은 일부러 조명으로 크게 솜씨를 부리지 않았다. 다만 모든 색깔의 빛을 테스트해본 카민스키와 조명팀은 마젠타(붉은 계열 색)는 해묵은 로저 코먼의 B급 공상과학물 같은 인상을 줘서, 짙은 녹색은 지나치게 감상적이라서 빼버렸다. 결론은 모든 색을 총합한 백색광. 푸른 조명은 레이 페리에(톰 크루즈)의 집에서 쓰이는데 침공과 더불어 톤이 바뀐다. 푸른 조명이 가장 적극적으로 활용된 장면은 외계인들의 폭격신으로 오렌지와 블루의 콘트라스트가 최고조다. 피난민 대열이 이어지는 벌판은 일부러 대단히 연극적인 조명이 쓰였다. 밤도 낮도 아닌 야외에 정전된 듯한 느낌이 독특하다. 이 장면에서는 거대한 라이트박스가 공중에 띄워져 전체적인 거리감을 보존할 수 있었다.

<우주전쟁>은 파스텔 톤이 잘 살아나는 후지의 생필름을 낮장면에, 코닥 5279를 밤장면에 주로 썼다. 현상 과정에서는 검게 탄 할로겐화 은입자를 표면에 남겨 깊은 검은색을 얻는 ENR 실버 리텐션(비토리오 스트라로에 의해 개발된 현상법으로 조력자 에르네스토 엔 리코의 이름을 따 명명됐다) 기법을 썼다. 손실되는 색감은 포지티브에서 보완했다. 스탠더드 1.85:1로 촬영됐다. 파나비전. 프리모 렌즈로 찍었다. <우주전쟁>은 존 윌리엄스가 영화를 미처 다 보지 못하고 음악을 쓴 스필버그의 첫 영화이자, 처음으로 모든 스토리보드를 애니메이션 작업한 스필버그 최초의 영화이기도 하다.

자료출처: <아메리칸 시네마토그래퍼>

최신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