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없는 외계의 매혹
장르 세계에서 외계인들이 본격적으로 지구를 침공하기 시작한 건 허버트 조지 웰스의 <우주전쟁> 때부터다. 20세기 초가 되자 영미권에서 본격적으로 SF 장르가 성립했고 외계인 침공은 그중 가장 인기있는 소재가 되었다.
할리우드에서 외계인 침공이 본격화된 건 UFO 열풍과 냉전시대의 히스테리가 공존하던 50년대. 외계에서 온 채소 외계인이 남극 기지를 공격하는 <또 다른 세계에서 온 물체>(The Thing From Another World)가 이 장르의 본격적인 시작이다(30년대 인기 스페이스 오페라 시리즈인 <플래시 고든>이나 <버크 로저스> 같은 작품들의 영향력을 무시한다면). 아마 가장 대표적인 영화는 하늘에서 떨어진 우주 콩깍지가 사람들로 변신하는 <신체 강탈자의 침입>(Invasion Of The Body Snatchers)일 것이다. <화성에서 온 침입자>나 조지 팔 버전인 <우주전쟁> 역시 빼먹을 수 없다. 50년대 말부터 시작된 SF/호러 시리즈인 <트왈라이트 존>이나 <아우터 리미츠>도 흥미로운 외계인 침략 에피소드들을 남겼다. 그중 가장 유명한 건 제목의 잔인한 말장난으로 유명한 <투 서브 맨>(To Serve Man)일 것이다.
50년대의 외계인 침공 영화들을 모두 냉전시대의 산물로 몰아붙이는 건 지나치게 단순하다. 레드 콤플렉스가 당시 장르물의 부흥을 가져온 건 사실이지만 그런 분위기는 차별화에 대한 욕구를 자극하기도 했다. <그것은 외계에서 왔다>(It Came from Outer Space)나 <나는 외계에서 온 괴물과 결혼했다>(I Married a Monster from Outer Space)와 같은 영화들은 복제 외계인의 침공이라는 고전적인 소재를 다루면서도 외계인과 지구인의 대결을 분명한 선악구별 없이 입체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로버트 와이즈의 <지구가 정지된 날>처럼 비행접시를 타고 온 외계인이 평화의 사절인 경우도 있다.
60, 70년대 접어들면 전형적인 외계인 침공 영화들은 줄어든다. 장 뤽 고다르나, 스탠릭 큐브릭,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와 같은 주류 거장들이 장르를 실험했고 뉴웨이브 운동의 영향으로 장르 자체도 큰 변화를 겪던 때였다. 고전적인 외계인 침공 아이디어를 담고 있는 <쿼터매스 앤 더 피트>(Quatermass and the Pit)과 같은 영화도 외부의 외계인보다는 발굴된 화성 우주선의 영향 아래 변해가는 지구인의 내면에 더 큰 관심을 쏟고 있다.
리들리 스콧의 <에이리언>과 같은 사악한 외계 생물을 다룬 영화들도 나오긴 했지만, 70, 80년대 SF영화들은 외계인과 지구인의 조우에 대해 비교적 낙관적이었다. 여긴 <미지와의 조우>와 <E.T.>라는 두편의 낙관적인 영화를 만든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향이 크다. 당시엔 존 카펜터의 <스타맨>처럼 스필버그의 감성에 영향을 받은 아류영화들 역시 만들어졌다. 90년대 이후 사악한 외계인의 지구 침략이라는 주제는 히트 텔레비전 시리즈 <X파일>을 통해 부활했다. 꾸준히 물밑에서 이어지던 회색 외계인의 인간 납치 전설은 이 시리즈를 통해 다시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인디펜던스 데이>처럼 복고적이고 호전적인 외계인 침공물이 성공한 것도 이 분위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당시 분위기가 일방적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는데, 50년대의 단순한 공식이 이전의 모습 그대로 부활할 수 있을 만큼 당시 관객들이 순진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50년대 SF의 관습을 놀려대던 팀 버튼의 <화성침공>이 더 그 시대의 분위기에 맞는 작품이었다.
<X파일> 역시 분명한 외계인 침공 의사가 드러나기 전이 전성기였다. 50년대 이후 ‘외계인 침공’이라는 아이디어는 장르 세계에서 가볍게 선택할 수 있는 하나의 옵션으로 자리잡고 있다. 영화는 <스피시즈>처럼 공식에 충실한 복고풍 SF가 될 수도 있고 <에볼루션>처럼 장르 공식을 가볍게 가지고 노는 액션코미디가 될 수도 있다. <E.T.>와 <미지와의 조우>를 감독한 스필버그가 무자비한 외계인들이 지구를 침공하는 <우주전쟁>을 만들었다고 해서 그게 특별한 심경 변화나 배반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단지 고정된 장르 소재를 선택해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만들었을 뿐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건 거의 언급도 되지 않는 외계인의 정체가 아니라 그들의 공격을 받는 9·11 사태 이후의 미국인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