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99 한국영화 페미니즘 성적표 [2] - 여성평론가 대담 ①
2000-02-01
사진 : 이혜정
정리 : 이유란 (객원기자)
여성영화평론가 세명의 영화품평회 혹은 '아줌마들의 저녁식사'

자유부인은 아직도 집을 떠나지 못했다

장소 한겨레신문사 5층 회의실

시간 1월17일 오후6시

참석 김소영(영상원 교수), 변재란(영화평론가), 심영섭(임상심리학자·영화평론가)

여자 셋이 모이면 접시가 깨진다고? 천만에!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온다. 여성평론가이면서 아줌마이기도 한 세 여자가 빵을 함께 뜯어먹으며 동서고금의 영화들을 두고 왕수다를 떨었다, 여성관객의 이름으로. 과연 페미니즘영화의 신전에 모실 영화는 무엇인가. 그들의 살아가는 방식, 생각하는 방식은 다 달랐지만, 어떤 영화는 함께 칭찬했고 어떤 영화는 함께 물어뜯었다. 여성평론가들의 식탁에서, 나쁜 영화가 좋은 영화가 되고 좋은 영화가 나쁜 영화가 되는 조화가 일어난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영화를 바라보는 시선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절감하게 된다. 자 이제,이 ‘아줌마들의 저녁식사’에 올려진 메뉴들을 함께 시식해보자.

여성의식도 좋고 작품성도 뛰어난 영화는 없나?

변재란 |최근 영화에서 시작해보자. 심영섭씨가 <해피엔드>에 대해 쓰면서 비평가로서는 호의적이나 여성관객으로서는 언해피했다고 했다. 과연 비평가와 여성관객을 분리할 수 있을까.

심영섭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처럼 작품성은 안 바쳐주는데 주제의식은 두드러지는 영화가 있고 <해피엔드>처럼 영화는 굉장히 잘 만들었는데 여성적인 시각에서는 수긍이 안 되는 영화가 있다. 물론 영화도 잘 만들고 여성적인 주제의식도 뛰어나면 좋지만 그런 행복한 만남은 드물다. 작품성은 좀 떨어지더라도 여성평론가니까 여성 영화를 지지해야 하는가에 저널리즘비평가의 딜레마가 있다.

김소영 |우리는 페미니즘 영화와 여성 영화를 함께 썼다가, 분리했다가 한다. 80년대 말에 문화운동 진영에서 여성적인 주제가 떠오르면서 여성 영화라는 용어도 부상했다. ‘여성 영화’는 일종의 협상물이다. 원래 ‘우먼스 필름’을 전유해서 여성 영화라는 단어를 썼는데, 여성관객이 보는 영화를 여성 영화로 부른 거다. 그러다 보니 가정이나 여성적인 영역을 다룬 영화가 여성 영화로 분류된다. 과연 지금이 여성 영화라는 용어를 재정의할 만한 시점인지, 잘 모르겠다.

변재란 |각자 추천한 영화를 보니까 한국영화에 관해서는 여성관객에게 말을 걸거나 여성문제를 담은 영화를 꼽았다. 반면 외국영화의 경우 여성감독이 여성주체성을 구축하는 영화를 주로 추천했다. 그렇다면 우리 영화에 대해서는 여성 영화라는 견지에서 얘기하면 될 것 같다.

<처녀들…><해피엔드>, 남성감독의 한계

김소영

심영섭 |우리나라에서 여성 영화가 드문 이유로 여성감독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그러다 보니 남성감독이 하는 여성 얘기에는 한계가 있다. 그 하나가 <처녀들의 저녁식사>다. 이 영화에는 가장 중요한 게 빠져 있다. 처녀들은 밥상머리에서 그런 얘기를 안 한다는 거다. 남자들은 취할수록 성적인 얘기를 많이 하고 그러면서 심리적인 동질감을 느끼지만 여자들은 친해질수록 정서적인 것을 나눈다.

김소영 |같은 문제선상에 있는 게 정지우 감독의 행보다 <생강> 이후로 정신적으로 그를 지지해왔다. 그런데 <해피엔드>를 보고 나서 <생강>을 추천작 리스트에서 지워버렸다. 우리에게 페미니즘적 주제와 형식을 다루는 감독이 있다면 정지우 감독에게 별 미련이 없을 거다. 하지만 그렇지 못하니까 그가 보여준 가능성에 희망을 걸었다. 우리는 자꾸만 영화 자체가 아니라 감독의 이데올로기와 지향성을 고려해서 영화를 본다. 작가라는 컨텍스트를 끼워서 텍스트를 보는 거다. <해피엔드>에서 가장 불만스러운 건 마지막의 판타지 장면이었다. ‘내가 이런 걸 표현하고 싶었지만 압력 때문에 못했다’라는 징후적 독해를 유도한 게 가증스러웠다. 이런 걸 보면 우리의 기대라는 건 벼랑 위에 선 듯 아슬아슬하다.

심영섭 |동감한다. 정지우 감독이 <생강>을 안 만든 것과 만든 것은 전혀 다른 맥락을 만든다. 나도 배신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 이유가 정지우 감독에게만 있는 건 아니다. 여성감독이 많으면 정지우 감독을 그 중의 한명으로 생각했을 거다. 그렇지 못한 탓으로 정지우 감독에게 무게를 실은 것 자체가 우리의 척박한 풍토을 말해준다.

김소영 |아직까지 페미니즘 영화보다는 여성 영화가 더 논의에 맞다라고 말하지만, 이제는 상황을 참작해 영화를 보는 일은 그만했으면 좋겠다. 변영주 감독이 독립영화계에서 <낮은 목소리> 3부작을 완성하는 선례를 남겼고 여성평론가의 지원이 문학이나 연극만 못하지도 않다. 여성관객이 가장 많은 것도 영화다. 그럼에도 감독이 스스로 투항해 징후적 독해를 구걸하는 것을 보면 굉장한 불혹을 느낀다.

기획영화 전성시대: 차라리 <자유부인>이 그립다

<해피엔드>

변재란 |<자유부인>에서부터 <정사>를 거쳐 <해피엔드>에 이르기까지, 여성의 성애가 어떻게 변했는지 생각할 필요가 있다. <해피엔드>가 <정사>보다 퇴보했다는 생각도 가능하다. <자유부인>은 여성과 성애와 모성. 아이의 관계를 다루면서 끝내 모성을 부각시키고 여성의 성애를 가족 안에 가둬버렸다. 반면 <정사>는 남녀주인공이 같은 비행기를 타는 결말로 해석의 여지를 남겼고 아이의 문제를 단호하게 제거해버렸다. 반면 <해피엔드>는, 맨마지막에서 부인을 잃고 혼자 남은 남자주인공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의 여지를 남기지만, 도발적인 정사에서 살해로 마무리되는 이야기구조 탓에 여성관객으로부터 '죽어도 싸다'라는 반응을 끌어낸다.

심영섭 |<자유부인>에서 <정사> <해피엔드>까지, 가장 큰 공통점은 여성의 외도 공간이 항상 외간 남자의 방이라는 것이다. 파트너의 방이라는 은밀한 공간에서 벌이는 여성의 플레이를 보여주는 게 상업적 수단이 된다. 이에 대한 면죄부로 주어지는 게 권위주의적인 남편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건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여자들은 여성 본연의 의무, 특히 어머니로서 의무를 저버렸기 때문에 대가를 치른다. 그 내러티브 구조가 하나도 안 바뀌었다.

변재란 |그런데 대다수의 여성관객은 이런 영화들을 재미있게 본다. 단지 영화의 결말만을 보는 게 아니라 영화 중간중간에서 자기 욕망을 만족시키는 요소를 발견해서 그랬을 거다.

김소영 |<자유부인>은 좀 다르다. 우리가 징후적 독해를 한다함은 텍스트의 틈새에 꿈틀거리는 전복의 순간을 찢어보는 거다. 그건 사회상황과 관계가 깊은데, 유신 이전에는 통제가 심하지 않아서 빈틈이 많았다. <자유부인>에는 역동성이 있다. 그런데 여성 영화가 기획되면서 오히려 그 틈새가 더 좁아졌다. 앙케이트와 인터뷰를 통해 영화를 기획하는데, 그렇게해서는 심층까지 못 내려간다. 틈새란 심층에서 나오는 건데. 그 바람에 우리는 전복의 순간을 놓치고 있다.

<여고괴담><세친구>, 임순례 감독은 미스터리다

<여고괴담>

심영섭 |90년대 한국영화의 층이 훨씬 다양해졌다. 신혼부부의 성을 다룬 로맨틱코미디도 있고, <처녀들…> 같은 논쟁적인 영화도 있고 최근에는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도 나왔다.

김소영 |<여고괴담…>는 좀 다른 맥락인 것 같다. <토마토 습격사건> 같은 컬트 영화라고 할까. 장악력이 떨어지고 창의성이 분출된 영화이면서 어른들이 읽기 힘든 여고생의 심상을 담았다는 점에서 그렇다.

변재란 |<여고괴담…>이 여고생의 일상성을 다뤘다면 <세친구>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도 할 일이 없는 남자들의 일상을 다뤘다. 여성 영화의 임무 중 하나는 여성성과 남성성의 고정성을 깨는 것이다. <세친구>는 남성성을 다루지만 주류가 아니라 주변인을 다루고,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현실로써 학교와 군대를 보여준다.

김소영 |<세친구>에 빛나는 장면이 있지만 몸 속으로 파고드는 임팩트가 없다. 여고 졸업하고 주변에서 전전하는 친구들의 이야기였으면 좀더 임팩트가 강했을 거다. 임순례 감독이 등장했을 때 기대가 컸다. 남성성을 다뤄서 임팩트가 있었다면 페미니즘이 제기한 젠더의 문제와 접목될 수 있었겠지만 오히려 이상한 이화효과를 낳았다. 그래서 굉장히 비극적인 이야기인데도 몸 속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나에겐 임순례 감독이 미스테리다.

심영섭 |아마도 임순례 감독은 성차를 떠나서 아웃사이더에 대한 애착에서 그 영화를 만들었을 거다. 우리는 남성적 주제에 파묻혀 산다. 심리학도 주로 권위나, 권력, 지배, 사회계급 같은 남성적인 주제를 다룬다. 주부 우울증이나 자살, 육아, 강간처럼 여성을 괴롭히는 위급한 주제들은 학문적으로 안 다뤄진다. <세친구>는 계급적 문제를 다루며 이는 대단히 남성적인 주제이다. 하지만 그것이 너무 자연화되어 있어서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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