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엔 좀 따뜻한 결말이기를 바랐다”
그는 이틀간 종일 인터뷰가 있다고 했다. 잠도 호텔에서 잔다고 했다. 유명세가 불러온 영광의 감금(?)이었다. 하지만 친절한 찬욱씨는 다시 한번 <친절한 금자씨>를 성심성의껏 구석구석 설명해준다. 아직 여과없이 말하기 힘든 부분까지도 말이다. 그래서 이 인터뷰는 중요한 특정 인물의 이름을 살짝 건너뛰거나, 장면 설명을 약간 다듬어서 묘사하는 정도의 수정을 거쳤다. 그 때문에 잠깐씩 미로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그래서 더 꼼꼼히 읽으시기를 권한다. 영화를 보고 나서 읽는다면 더 오롯이 들릴 거라고 생각한다.
-먼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야기하자면 현장 검증에 끌려다니는 금자 모습을 보면서 칼 비행기 폭파범 김현희가 떠올랐다. 영화 속에 설정된 시기도 비슷하고. 의도한 건가.
=그렇게 보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직접적인 연결을 갖는 건 아니다. 미모의 젊은 여성이 수갑차고 사람들한테 막 끌려다니는 모습은 누가 만들어놔도 그렇게 보일 수밖에 없는 게 아닐까? 하지만, 나중에 정말 알카에다 비디오를 연상시키는 장면이 있긴 하다. 아마 테러리스트들에 대한 이미지가 떠오르는 건 확실히 모종의 관계가 있는 것 같다. 테러라고 불러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영화의 끝에서 뭔가 집단적으로 응징을 한다는 점도 그렇고.
-초반에 금자에 관한 요약판 시퀀스를 보여주는데, 그 부분이 굉장히 빠르게 편집되어 있다.
=금자의 수형 생활이 그렇게 악몽 같지 않았고, 교도소가 지옥처럼 끔찍한 세월이 아니었다는 걸 보여주는 게 중점이었다. 요약 시퀀스 안에서 금자는 활짝 웃고 있고, 남을 돕고 있고, 공부도 한다. 교도소 세팅이 우중충하게 보이게 하고 싶지 않아서 살구빛으로 예쁘게 해달라고 주문까지 했다. 그곳에서의 생활이 활기있고 행복한 그녀의 전성기였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앞신에 뒤신의 이미지 또는 사운드가 먼저 들어오는 경우들이 굉장히 많다.
=이리저리 시제가 옮겨지는 일이 많아서 섞이는 것 같은 느낌을 주고 싶었다. 단지 왔다갔다한다는 느낌뿐만 아니라 정신없이 뒤죽박죽되면서 섞이는 느낌을 주고 싶었다.
-클로즈업이 굉장히 많다. <올드보이>가 최민식의 영화라면 확실히 <친절한 금자씨>는 이영애의 영화다. 그들의 얼굴 자체에서 느껴지는 양면성 같은 것이 영화의 큰 동기가 됐겠다는 생각이 든다
=맞다. 이 영화에는 금자뿐 아니라 많은 조연들의 클로즈업도 있다. 하지만 역시 제일 많은 건 금자다. 병원에서 김부선하고 누워 신장 떼어줄 때 금자는 장난으로 욕을 하면서도 해맑게 웃는다. 그렇지만 출소하고 난 뒤 철공소에서 김부선을 끌어안고 반가워할 때 그 안을 살피는 모습이 나오는데, 그때 얼굴은 침대에 누워 있던 그 맑고 화사한 얼굴하고는 대조적으로 나이들고 칙칙하고 음모를 꾸미고 있는 그런 표정이다. 그 대조가 참 그럴듯하고, 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후반부에 등장하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는 금자의 빅 클로즈업도 인상적이다.
=필름 400자 한캔을 다 쓸 만큼 고생해서 얻어낸 장면인데, 카메라 앞에 유족들이 서 있고 영애씨가 그걸 고정된 채로 서서 쳐다보면서 찍은 거다. 보기에 추하다 싶을 만한 제일 예쁘지 않은 얼굴이 되기를 바랐고, 그렇게 해달라고 했고, 본인도 그게 제일 안 예뻐 보이는 걸로 노력한 거다. (웃음)
-많은 카메오가 등장하는데 그 배치에 의도가 있었나.
=<복수는 나의 것>에서 대적했던 두 사나이 송강호와 신하균이 동료로 등장한다. <올드보이>에서 피해자였던 최민식은 악한으로 나온다. 유지태가 피해 아동인 원모의 유령으로 나오는 것은 <올드보이>에서 누나를 떠나 보낼 때 아역배우하고 유지태하고 교차되는 장면을 생각하면서 썼다. 그런데 여자배우들 스케줄이 안 맞아서 좀 뒤죽박죽이 됐다. 제니의 양부모가 한국에 왔을 때 금자 집에 가서 텔레비전 보는 장면이 있었다. 그때 두나가 연속극에 출연하는 장면을 생각했었는데 안 됐다. 또 혜정이가 원래 하려고 했던 역할은 “뭐 락스를 먹였다고?”라고 말하는 초반 감옥장면의 금자 동료였다. 윤진서도 그 장면에 출연해서 “아! 친절한 금자씨”라고 말한다. <올드보이>의 두 아가씨가 모두 출연하는 거였다. 그런데 혜정이가 그때 시간이 안 돼서 그냥 뉴스 앵커가 됐고, 이 역을 맡기려고 했던 두나는 결국 시간이 안 맞아서 못 나왔다.
-여전히 동일한 인물에 내재된 양면성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 금자의 경우 잔인한 면이 있지만, 한 편으로는 사랑스럽고 달콤한 케이크를 만들 줄 아는 제빵사다.
=금자가 그렇게 달콤한 케이크를 만들 줄 아는 제빵사가 된 건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은 직업과 돈벌이 수단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출소한 전과자들을 찾아가서 삥을 뜯을 수도 있지만 그건 너무 쉬운 것 같고, 직업훈련도 받았으니까 멀쩡한 숙련공이자 장인으로서 직장 생활을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마지막에 모든 일이 끝나고 나서 유족에게 최선을 다해 대접하는 게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럴 땐 먹을 게 제일 좋다. 먹을 것 중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지만 찌개 이런 것보다는 케이크가 제일 깔끔하고, 더군다나 케이크가 주는 아주 달콤하고 화려한 장식도 매력적이었다. 지나고 생각해보니 이 영화의 음악을 포함해서 화사하고 장식적인 면이 강해진 것도 거기에서 시작한 게 아닌지 모르겠다.
-복수를 다룬 앞의 작품의 인물들은 영웅의 느낌이 없는데 금자는 영웅의 느낌이 있다. 마치 여전사 같다.
=하지만 영웅적인 행동은 못한다. 말했듯이 처형자의 입장에서 구경꾼의 입장으로 전락하니까. 금자는 입을 가리고 있는데 속을 알 수 없고, 얼굴을 드러내놓고 있어도 가면을 쓰고 있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을 바랐기 때문이다. 어떤 장면들에서는 좀 유령 같은 모습이었으면 좋겠다고도 생각했다. 마지막에 빵집 나루세에 와서 파티를 할 때, 다들 금자가 거기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행동한다. 그때 그녀는 유령 같은 느낌이다. 나는 영화에서 호흡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해서 인물들의 숨소리를 사운드로 많이 넣는 편이지만, 그 장면을 후시녹음할 때 일부러 금자 숨소리는 가급적 뺐다. 동시녹음에서도 잘 안 들리도록 뺐다. 유령처럼 느껴지길 원해서 그랬다.
-그런데 왜 하필 유령 같은 느낌을 원했나.
=금자가 관찰자라는 점을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복수라는 퍼포먼스를 보는 관객 같은 느낌. 그래서 눈만 강조한 것이다. 유족들이 천사가 지나간다는 둥 터무니없는 말과 행동을 할 때 금자는 거기 끼어들 자격이 없는 거다. 자기 아이는 살아 있으니까. 그러니까 숨소리도 내지 않고 죽은 듯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인물들의 관계, 특히 금자와 백 선생의 관계를 꼼꼼하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 같다.
=백 선생과 금자가 어떻게 시작했는지 그런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곧 소설 <친절한 금자씨>가 출판될 예정인데, 그건 다른 작가가 쓴다. 그 사람이 쓴 원고를 나에게 보내왔는데, 아직 바빠서 전부는 못 읽어봤지만, 백 선생의 성장과정 같은 걸 넣었더라. 그가 왜 이런 악마가 되어야 했는지등등의 그런 과정. 그런 게 책에서는 흥미로울 수도 있겠으나 영화 속에서는 별로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 사람이 왜 이렇게 됐는지, 어떤 동기가 있고 어떤 성장과정이 있었는지를 설명할 겨를은 없었다. 이것은 금자의 영화이기 때문에 백 선생에 대해서는 그 정도면 충분했다. 요즘 관객은 어디로 봐도 나쁜 놈인 그런 것만 보여줘도 그가 타고난 악마라고 생각하기보다는 어떤 사연이 있어서 그렇게 되었거니 생각을 한다. 최민식 같은 배우가 동정의 여지가 있는 역할보다는, 진짜 나쁘기만 하고 비열하기만 한 그런 걸 하는 게 훨씬 보기 좋았다.
-백 선생이 영어 선생이라는 점을 이용해서 아주 중요한 장면에 코미디를 발휘한다.
=왜 안 써먹겠나. 이걸 써먹겠지 싶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 준비해서 이제 막 죽일 때가 된 건데 그럴때일수록 한번 다른 길로 가는 게 필요하기도 했고. 의사소통이 안 돼서 애를 먹는 모녀지간인데 그게 되는 사람이 가운데 있으면 당연히 써먹겠지 싶었다. 그게 웃기기도 하고 슬프기도 한 상황이 되는 거다. 원래 촬영할 때는 뒤에서 총을 대고 있으니까 담담하게 어쩔 수 없이 통역한다는 걸로 촬영했는데 나중에 녹음을 새로 했다. 연기하듯이. 모녀의 말투를 흉내내서. 매를 버는 짓이지만, 백 선생은 그러고도 남을 종자니까.
-전작들과 같이 놓고 볼 때 <복수는 나의 것>은 차갑고 <올드보이>는 뜨거운 영화였다. 그런데 말한 것처럼 <친절한 금자씨>에는 중요한 곳곳에 유머가 있다. 공표한 것처럼 <친절한 금자씨>가 복수 삼부작의 최종회라면 왜 여기서 그 정리의 키워드가 유머가 되어야 하는지 궁금증이 생긴다.
=앞의 두편은 전부 사람을 긴장시키고, 보는 데 힘이 들어간다. 육체적으로 피곤하게 만드는 영화이기 때문에 이번에는 좀더 여유로운 영화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거고, 그런 면에서 유머가 좀 많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나도 좀 지친 기분이 들고…. 하지만 우습다라는 기조로 가다가도 웃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식으로 주저하게 되고, 또 나중에는 웃은 게 조금 미안하게도 되는 그런 상태로 가는 거다. 제일 따뜻하달까? 전작들이 차갑고, 뜨거웠다면 이건 좀 따뜻한 결말이기를 바랐다. 금자의 마지막은 용서받았다고 말은 못해도 수고했다라고 격려할 만한 점이 있다. 결국은 앞의 두편의 주인공들도 별별 고생을 다하고 나쁜 짓까지 하지만, 어떻게든 악마가 되려 하지 않았던 사람들이다. 그래서 내 심정은 그 사람들까지 포함해서 “모두 다 수고하셨습니다”라고 인정해주고 싶었던 거다.
-여러 명의 화자가 금자를 이야기하는 것이 흥미로웠다. 그중에서도 특히 영화 바깥에서 금자의 심리를 설명하는 중년의 여자 목소리는 중요하다. 그게 누구의 목소리인지 밝혀지면서 이 영화는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금자씨에 대해 들려주는 오랜 옛날 이야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마지막에 이르러서 “그래도 나는 금자씨를 좋아했다”라는 말이 나올 때 비로소 우리는 성우 김세원이 낸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알게 된다. 그제야 비로소 관객은 이 영화가 2050년쯤의 미래영화라는 사실도 알게 된다. 금자씨는 이제 막 늙어서 병으로 죽었고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지금 누군가에게 금자씨에 대해 설명해주는 그런 회고담, 옛날 이야기 같은 거다. 관객이 보는 영화는 당대의 이야기지만, 이건 사실 미래에서 온 회고담이다. “금자는 끝내 영혼을 구원받지 못했다”라고 말할 때 그건 도대체 누가 어떻게 판단을 내리는 건지 근거가 없는데, 내 상상에 의하면 만약 죽기 전에 금자가 그 목소리의 주인공에게 그런 말을 남기고 죽었다면 그 목소리의 주인공도 남에게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 영화는 처음부터 동화 같은 발상에서 시작한 거다. 처음에는 지금보다 몇배 동화 같은 이야기였다. 많이 줄었지만 그런 점에서 지금도 많이 남아 있긴 한 것 같다.
-복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게 정말 맞을까 할 정도로 결론이 모범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결론은 모범적이라도, 과정이 충격적이다.
=모범적인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끔찍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래야 효과가 있다. 그걸 통해서 원론적인 교훈을 절실하고 뼈저리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 같다. 관객을 한 방향으로 몰고 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백 선생을 어떻게 처리할 것이냐의 문제에서 점점 더 우스꽝스럽게 갔고, 그리고 이제부터는 유족이 더 잔인하게 느껴지도록 했다. 무방비상태의 인물을 놓고 벌이는 그들의 행동을 보는 금자는 구경꾼이 된다. 복수를 막 수행하려는 사람, 오랜 세월 준비해서 이제 막 잡아놓고 죽일 수 있는 그 단계에서 금자는 이 모든 복수극의 구경꾼, 관객이 되는 거다. 그제야 금자는 어떤 깨달음을 얻는 거다. 금자가 직접 복수를 수행했다면 좀 달랐을 거다. 내가 했을 법한 걸 남이 하는 걸 지켜볼 때 이 모든 것이 다 그릇되었다는 걸 깨달을 수 있다. 고지식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금자씨가 그 과정을 거쳐서 뭔가 자책하고 괴로워하는 제스처가 바로 두부 모양의 케이크를 먹으려고 할 때다. 금자는 독자적인 방식으로 자기 구원을 갈망하는 인물이다. 전도사가 제시한 두부가 아니라, 자기 손으로 만든 두부 케이크를 먹는다는 거다.
-그런 점에서 보는 사람에 따라 금자가 구원을 받았다고 여길 수도 있을 것 같다.
=화장실에서 원모의 유령을 만났을 때 원모의 표정이 바로 금자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 될 텐데, 금자가 뭔가 변명하려고 할 때 원모는 왜 그러셨어요 하는 식으로 입을 탁 막아버린다. 이게 금자의 생각이라면 결코 스스로가 용서받았다고 여기는 건 아닐 거다.
-올드보이를 본 관객은 사실 이 영화에서도 반전을 기대할 것이다. 하지만 스토리상 반전이라고 할 만한 내용이 있지는 않다. 그게 오히려 이 영화의 어떤 메시지처럼 보인다
=이 영화는 금자가 숨겨진 비밀을 알게 되는 그 순간 완전히 다른 영화, 독립된 영화처럼 되어버린다. 스토리상의 비밀이라기보다는 플롯상의 방향전환 내지는 비약 같은 게 순식간에 일어나는 거다. 사실 그게 이 영화를 구상할 때 핵심적인 두 가지 동기 중 하나였다. 하나는 백 선생을 향한 금자의 원한이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사실 별거 아닌 약한 동기로 보일 수 있겠다는 점이었고, 두 번째는 갑자기 다른 종류의 영화로 비약해버린다는 점이었다. 그 내용은 <올드보이>에서의 반전 같은 것은 아니지만, 또 그렇다고 쉽게 공개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반전은 없는데 공개를 하긴 어렵다… 뭐 그렇게 말할 수밖에….
-그 두 가지가 복수라는 테마를 효과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중요한 장치인가.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다. 기껏해야 동시통역 장면에서 제니에게 해명하는 것처럼 금자가 생각하는 백 선생의 죄는 “엄마(금자)를 죄인으로 만든 죄”라고 할 수 있는데, 그건 상당히 추상화된 거다. 애가 죽은 것도 아니고, 금자는 애를 되찾지 않나. 백 선생쯤 잊어버리고 살면 될 것도 같고. 또 감옥 생활을 했다고는 하지만, 어차피 금자도 유괴 사건에는 직접 관여했으니까 그렇게 억울하다고 보기는 힘들고. 그런데 어떤 사람들이라면 원모의 죽음에 책임이 없다고 빠져나갈 수 있는 사안이 금자에게는 커다란 죄의식과 책임감으로 다가오는 거다. 그래서 비밀이 폭로된 순간 금자는 그 예민한 죄의식으로 감당하기 힘든 몇배의 책임감에 빠져들게 되는 거다. 그래서 이 두 가지 특징적인 요소가 불가분의 관계가 되는 거다. 그런 것을 관객이 아주 쉽게 동일시할 수 있도록, 함께 분노할 수 있도록 만드는 건 쉽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이 스토리가 가진 윤리적인 장치라고 보면 된다. 감정적으로 끌려가는 것보다는, 저런 상황이라면 나는 가만있을 것 같은데, 혹은 저런 원한이라면 복수에 나설 만할 텐데, 이런 식의 여러 생각이 들 수 있도록 강력하지 않은 어떤 것이어야 이 윤리적인 측면이 잘 드러날 수 있다고 봤다.
-우리가 죄의식에 대해서 너무 가볍게 지나친다고 지적하고 싶은 것인가.
=그렇게 설교할 생각은 없고… 그런 민감한 죄의식을 갖고 사는 사람들, 그래서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어리석은 방법으로 가거나, 벗어나려고 싸우는 사람들이 보기 좋다는 생각은 갖고 있다
-부조리함 자체에 대해서 매혹을 느끼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도 한다.
=매혹이 있다. 하지만 그건 나의 내면에서 논리적으로 진행되어 만들어지는 부조리다. 내가 목표로 하는 게 그거다. 나로서는 나름대로 정교한 논리로 만들어낸 장면들이 보는 이에게는 부조리하고, 낯설고 기이해 보이는 것, 그런 게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 비극 속에 나오는 유머나 희극이 효과를 강조하는 이번 영화와는 좀 다른, 희극적인 상황이 주조인데 이따금 비극이 드러나는 그런 작품을 해볼 생각은 없나.
=해보고 싶다. 다음 HD 작품이 그럴지도 모르겠다. 정신질환 환자들 이야기라서….
-그 HD영화 프로젝트는 어떤 내용인가.
=<사이보그지만 괜찮아>라는 제목이다. 자기가 전투용 사이보그라고 착각하는 망상증 소녀가 입원을 한다. 그중 젊은 남자와 사랑에 빠진다. 이 남자는 자기가 개발한 조잡한 기계로 원하는 사람의 영혼을 훔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자기가 원하는 기간 동안 그 사람 행세를 하고 다시 돌려줄 수 있다고도 생각한다. 문제는 이거다. 그렇다면, 이 소녀의 망상 속의 캐릭터도 이 사람이 훔쳐갈 수 있을까? 그렇다면 이 소녀는 치유될 수 있을 텐데… 하는 그런 얘기다. 내가 할 수 있는 청춘영화 같은 걸 만들어보고 싶었다. (웃음). 결국 치료에 성공하지는 못해도, 자기 망상의 정체는 이해하게 되는, 결국엔 사이보그지만 괜찮아, 이렇게 끝날 거다. 가급적이면 몇대의 캠코더를 동원해서 섞어 써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
-<친절한 금자씨>는 베니스에 가나.
=보여달라고 해서 일단 보내줬다. 월말에 라인업을 공식 발표한다니까 그때 연락 올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