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친절한 금자씨> [3] - 김소영 비평
2005-08-01
글 : 김소영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
아니, 속죄의 두부를 거부하다니

좀 ‘두부스럽게’ 시작해보자. <친절한 금자씨>의 앞부분, 매서운 추위가 몰아닥친 가운데 영화는 그로테스크한 동화처럼 열린다. 교도소 밖, 붉은 산타 모자를 둘러쓴 성가대들이 늘어서 있다. 형기를 마친 수감자들이 나오기 시작한다. 그리고는 아, 그 유명한 금자(이 영애)씨의 레트로 물방울 원피스가 보인다. 전도사는 하얀 접시에 하얀 두부를 얹어 깨끗하게 살라며 금자씨에게 먹이려고 한다. 물론 금자씨는 먹지 않고 아니 먹기는커녕 오히려 전도사에게 ‘너나 잘하세요’라고 말한다. 전도사도 놀라고 붉은 성가대도 놀란다. 아니, 속죄의 두부를 거부하다니.

이제 케이크로 끝내보자. 영화가 끝날 무렵, 아직 겨울이다. 금자씨는 딸에게 줄 하얀 케이크를 들고 가다가 길에서 딸을 만나자 아마도 속죄에 관계되었을 법한 여러 가지 말을 중얼거린 뒤 흰 케이크에 얼굴을 파묻는다. 하얀 눈이 골목길을 채우고 있다. <올드보이>의 마지막 장면처럼 흰 케이크와 하얀 눈은 회귀 불가능한 순수의 지점을 표식할 수 있다. 그러나 모호하다는 것 말고는 이 결론에 대해 난 아직 결론을 내지 못했다.

이 영화가 불러온 일련의 기대- <대장금>과 CF 스타 이영애의 변신- 는 충족된 것으로 보인다. 모범수 금자씨가 노란색 유니폼을 입고 생뚱맞게 웃을 때, 그녀는 분명 재벌 회사의 명품 모델 이미지만은 아니다. 오히려 명품 이미지의 망가짐을 즐기는 관객의 가학적 태도를 충족시키는 것처럼 보인다. 이 변신이 흥미로운 것만큼이나 난 흰색 두부가 흰색 케이크로 치환되는 사사로운 그러나 다소 의미심장한 부분에 관심이 간다. 문제의 케이크 만들기는 스무살에 유괴, 살인죄로 무고하게 13년간 복역하는 동안 금자가 탁월하게 성취해낸 것이다. 좀더 젊은 시절, 사람들이 뒤돌아보는 미모이긴 하나 까다롭지 않았던, 잔혹 복수극의 주인공치고는 별다른 무공이 돋보이지 않는 금자가 가진 비상한 손재주가 바로 제빵 기술, 특히 케이크 만들기다. <올드보이>의 군만두에서 보이듯이 어떤 음식물에 대한 강박은, 복수에 대한 강박만큼이나 박찬욱 감독의 영화에서 절대적이다. 그리고 잊었는가? 군만두가 수수께끼의 첫 번째 실마리를 푸는 단서였음을…. 나도 <친절한 금자씨>가 차용하는 쿠엔틴 타란티노류의 하위 장르적 정신을 따라 여기서 농담을 섞는 것이지만, 프로이트는 언제나 농담은 일말의 진실에 가깝다고 말한다.

나는 이 영화의 작품으로서의 성패가 하얀 두부를 하얀 케이크로 변모시키는 공력의 성패와 관계있다고 생각한다. <친절한 금자씨>는 생활의 때가 묻어 있다기보다는 세트 디자인이 두드러지는 영화다. 충무로 영화를 포스트 충무로 영화로 변화시키는 작품인 만큼 이 영화의 제작진 중 조명, 의상, 프로덕션디자인의 역할은 홍보에서도 중요한 부분이다. 세트의 인공성이 관객의 시각적 주목을 애타게 요구하는 영화, 예의 죽여주는 벽지들이 주름잡는 영화들처럼 금자씨의 은둔처가 되는 무허가 미용실을 개조한 작은 방은 홍보 문건을 빌리자면 ‘붉은색 화염 무늬’ 벽지로 덮여 있고 이 방에 들어서는 것이 “지옥에 떨어지는 느낌”을 주도록 설계되었다고 한다. 지리멸렬한 생활의 때가 묻은 삶의 지옥이라기보다는 세트로서의 지옥이다. 인공 지옥이다. 그런 면에서 교도소 밖 하얀 두부로 엇비슷하게 시작하지만 이 영화의 세트는 <오아시스>의 임대아파트 설정과는 하늘과 땅 차이다. 이렇게 리얼리즘이나 리얼리티의 도움을 받는 대신, 인공성 자체를 영화 구조의 핵으로 삼은 이상 영화가 갈 길은 하나다. 그 인공성 자체를 정말 실감나게, 사실보다 더 사실적으로 그려선 결과적으로 판타스틱하게 구현하는 방향 말이다. 성우 김세원의 건조하면서도 은근히 동의를 구하는 듯한 보이스 오버는- “그래도 그렇기 때문에 나는 금자씨를 좋아했다” 등- 이 영화에 마치 라디오 드라마 같은 향수어린, 아이러니한 거리감을 자아낸다. 귀에 익숙한 그러나 이질감을 자아내는 좋은 장치다. 이영애의 양가적인 이미지와도 잘 맞는다.

그러나 이 감탄의 마음은 유감스럽게도 끝까지 견지되지는 못한다. 판타스틱! 하다고 손을 치켜올리기에 영화의 후반부는 어설프게 인공적이다. 금자씨의 감방동기들의 연기와 플래시백이나 화면 전환은 혁신적이고 다음 장면을 기대하게 한다. 반면에 집단 복수를 위해 모인 희생자의 부모그룹은 유괴 뒤의 충격과 외상 그것이 잉태한 불타는 복수극을 감행하는 퍼포먼스를 하는 데 있어 강도가 많이 떨어진다. 사실 이 시퀀스는 굉장한 것이 될 수도 있었다. 자신의 어린아이가 유괴당한 뒤 교수형당하는 장면을 회고적으로 지켜보아야 하는 부모의 시선만큼 삶의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을 환기시키는 것이 있을까? 특히 아이에게 두건을 씌운 교수형 장면은 고 김선일씨 사건의 이미지마저도 불러오는 참혹한 것이다. 사실, 난 이 장면 이후 이들의 외상을 진단하고 위무하는 “정동의 정치학”을 기대했다. 그러나 영화는 유괴범의 돈을 계좌로 넣어주기를 바라는, 자식 잃은 이들이 건네는 계좌번호 쪽지를 보여준다. 김기영 감독도 곧잘 사용했던 이런 이중적 장면은 인간의 탐욕에 대한 신랄한 시사이긴 하지만, 어린아이 유괴사건에 적절한 교훈은 아니다.

하여간 <친절한 금자씨>가 충무로 영화의 어떤 코드, 억울하게 당하고 감옥에 갔다가 울면서 하얀 두부를 먹고 갱생의 삶을 결심하는 신파의 세계를 떠났음은 자명하다. 그렇다고 말끔한 하얀 케이크로 변환했느냐 하면 또 그건 아니다. 그러나 어찌 보면 이 주춤거림이 현재 충무로와 글로벌 이 양자에 발을 드리운 채 작업하는 박찬욱 감독에게 뜻밖의 추동력이 될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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