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처음부터 박찬욱의 <친절한 금자씨>에 대해 큰 기대를 걸지 않았다. 내가 볼 때 <공동경비구역 JSA> 이후 박찬욱의 영화는 늘 이전 영화들이 더 나았다. 그리고 마침내 <쓰리, 몬스터>에서는 완전히 바닥을 쳤다고 본다. 그는 이 에피소드에 대한 제작일지에서 <쓰리, 몬스터>의 이야기를 우리 모두가 삶에서 반드시 해야만 하는 불가능한 선택에 대한 상징으로 봐야 한다고 했다. 내가 보기에 그 영화는 (피아노 건반에 피아니스트의 손가락을 매달아놓고 하나씩 자르는 등의) 극단적인 가학증에 대한 설득력 없는 이론에 불과하다. 그러한 설명이 영화와 관객 모두에 대한 증오와 자기 혐오가 이상하게 섞여버린 영화를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그런 이유로 나는 <친절한 금자씨>에 대해 최소한의 기대치만 갖고 있었다. 그러나 박찬욱의 다음 행보에 대해선 궁금하기는 했었다.
내가 기대했던 것이 무엇이었든 바로크 음악의 치료효과에 관한 두 시간짜리 광고는 아니었다. <친절한 금자씨>는 <올드보이>와 <복수는 나의 것>의 과도한 폭력에서 조금 물러나와 키치 스타일과 가공된 감정으로 꾸며진 여성적 세계로 들어서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운드트랙은 여전히 박찬욱이 선호하는 음악들로 채워져 있다. <올드보이>에선 싸움장면 위에 비발디가 부조화스럽게 얹혀져 있었고, 이번엔 DJ들이 ‘스팅’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샘플링된 바흐의 <G선상의 아리아>를 깔고 있다(같은 멜로디가 영국TV의 예술지 프로그램을 위한 주제가로 20년간 쓰였기 때문에 영국에서는 의도치 않게 조소를 불러일으킬지도 모른다). 이 얽히고 설킨 이야기는 감옥 안의 냉혹함, 근거없는 간악무도함, 아이에 대한 폭력 등등을 거치며 산만하게 진행된다. 그러나 잔잔한 음악이 흘러나오면서 클라이맥스에 치달을 때 주인공 금자는 이제까지 진행된 모든 것들을 철회해버린다. 그녀는 살해된 아이의 부모들에게 실제 집행을 넘기면서, 유아살인범에 대한 복수의 결정적 행위에서 비켜난다. 그럼으로써 (애거사 크리스티의 <오리엔트 특급살인>에서 기차에 탄 사람들이 함께 복수를 했던 것처럼) 복수는 집단적인 것이 된다. 그러면서 금자는 진심으로 복수의 무게에서 벗어나 궁극의 희열을 맛보게 된다. 그녀는 다시 찾은 딸과 순수하기만 한 젊은 남자친구와 함께 눈 속에서 평온을 느낄 정도로 자유로워진다(그럼에도 나는 눈 속에서 맨발로 있는 이 작은 소녀가 동상에 걸릴까봐 걱정된다). 음악이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순간 관객은 기대하지 않았던 카타르시스의 감정을 영화로부터 느끼게 된다.
사실 나 자신은 마침내 영화가 끝나자 안도감을 느낀 정도 빼고는 별다른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나를 지켜보던 시각적이고 청각적인 극적 요소가 지배하던 두 시간 내내 어떤 진실한 감정이나 느낌, 혹은 고통마저도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친절한 금자씨>에는 어떤 유기적인 핵심도 없으며 복수를 추구하는 충동에 대해서도 신뢰하기 어렵거나 진정으로 그녀의 것이라고 할 만한 것을 찾아볼 수 없다. 영화는 그럴듯한 혐오인물들로 가득하다(감옥에는 뚱뚱한 레즈비언 카니발 장면이 있었다면, 바깥 세계에는 최민식이라는 유아살해범이 있다). 그리고 그들 모두가 좋은 편에 의해 죽으면서 관객은 손쉬운 만족감을 얻는다. 영화는 그로테스크한 이미지(금자가 후회의 표시로 야쿠자처럼 자신의 손가락을 내미는 장면)에서 초현실적인 환상(구름 위에 쓰여진 글씨나 금자 딸 방의 작은 코끼리 크기만한 지구본)으로 자유롭고 ‘모순적인’ 키치들의 현란한 이미지들로 가득 채우며 자유롭게 넘나든다. 그러나 여기에서 어떤 극적인 무게나 심리적이고 진실된 순간은 찾아볼 수 없으며, 통찰의 기회도 얻을 수 없다.
박찬욱 감독의 경력은 흥미로운 연구 사례가 된다. 그는 1993년 문민정부가 출범하기 전에 감독 생활을 시작해서 여전히 감독 생활을 하고 있는 몇 안 되는 감독 중 한명이기 때문이다(물론 장선우나 박광수 같은 감독들이 군사정권 아래에서 감독 생활을 시작했고 여전히 작업하고 있지만 박찬욱 감독과는 달리 이들 영화는 정치적으로 저항적이다). 박찬욱 감독 스스로가 <공동경비구역 JSA>로 21세기 한국에서 자신을 재발명하기 이전인 1990년대에 그는 오랫동안 잊혀진 두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그런 다음 <공동경비구역 JSA>로 한국에서 성공을 거두고, <복수는 나의 것>과 <올드보이>로 제한된 국제적 성공을 거두며 인지도를 넓혀나갔다.
그의 문제(그는 지난해 칸영화제에서 비평가들이 <올드보이>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고, 그러면서 틀림없이 자신의 문제를 알고 있을 것이다)는 최근에 생긴 팬들에 기반해 있는 자신의 토대를 넘어설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그의 영화는 미성숙한 소년들에게 감동을 주기 위해 만들어졌다. 이 미성숙한 소년들은 적당히 동기화된 과도한 폭력과 기괴한 것을 즐긴다. 또한 이들은 박찬욱의 영화가 번지르르한 스타일과 앞뒤가 맞지 않는 플롯 구성을 넘어서는 성숙한 사고가 없다는 것에 대해서도 괘념치 않는다. <친절한 금자씨>는 무엇보다 여성관객과 가학증과 살육 때문에 그의 이전 영화에 흥미를 잃었던 사람들을 포함해 좀더 폭넓은 관객을 만나기 위한 박찬욱 감독의 시도가 분명하게 담겨 있는 영화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화가 성인관객에게 호소하기 위해서는 영웅과 악인이라는 캐리커처 이상을 영화에서 보여줘야 하며 전달되지 않는 이야기를 위한 광고 그 이상의 어떤 것이 필요하다. 박찬욱은 검안사가 보는 방식으로 최민식의 눈알을 클로즈업해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혼란과 악마적인 어떤 것을 드러낸다고 여기는 감독이다. 하지만 슬프게도 이것으로는 안 된다. 그리고 그의 새 영화의 흥행 결과가 (적어도 한국 이외의 시장에서) 성공적이어도 그리 놀랍지는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