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피다이>로 영화연출 데뷔하는, 배우·설치미술가 이상현
<거짓말>의 제이는 잊어도 좋다
혹시, 그러니까, <거짓말>의 이상현이냐고? 맞다, 그 이상현이다. 그렇다고 와이를 묶고 때리고 쑤시던 <거짓말>의 제이를 떠올리면 안 된다. 지금 우리 앞에 있는 이상현은 SF영화 <해피다이>로 데뷔를 준비하고 있는 감독 지망생이다. 설치미술가로서 국제적인 명성을 날리다가 일약 배우로 변신한 바 있는 그이기에 영화 연출을 맡는다는 게 뜬금없이 느껴지진 않는다. 게다가 어린 시절부터 집 대문에 극장 포스터를 붙이게 해주고 받은 초대권으로 극장을 공부방처럼 들락거렸고, 한국의 대학에서 사진을 배운 덕에 조각 전공으로 독일에서 유학할 때도 친구들의 단편영화 작업에서 카메라를 잡았던 그가 아닌가. 물론 시네키드로 살았다는 사실이 쉰 넘은 나이에 입봉을 준비하는 그의 사정을 모두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사람들에게 내 뜻을 전하는 데 가장 강력한 매체가 영화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영화나 미술이나 그에겐 세상과 소통하는 하나의 방식인 것이다.
그가 <해피다이>를 준비한 것은 5∼6년 전부터다. 특별한 계기가 있어서라기보다는 그저 영화를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그는 말한다. 5∼6년 전이라면 <거짓말>이 만들어지고 개봉하던 시기와 겹치니 아무래도 <거짓말>에 참여했던 경험이 영향을 끼쳤겠군요, 라는 질문에 그는 아니라고만 할 뿐 별다른 답변을 하지 않는다. 기성사회에 의해 음란물로 매도됐던 <거짓말>의 후폭풍에서 그 또한 자유롭지 못했을는지도 모른다. 그 5∼6년 동안 이상현은 묵묵히 시나리오를 썼고 영화와 관련되는 이미지를 꼼꼼히 스크랩했으며, 촬영지를 헌팅했고 일부 이미지를 CG로 만들었다. 개략적인 스토리보드까지 완성했을 정도다. 지난해 영화진흥위원회에서 개최한 연출가 재교육 과정까지 듣는 등 나름의 준비를 해왔지만, 제작자들은 50대 미술가의 영화감독 데뷔를 신뢰하지 않았다. 그의 시나리오는 이곳저곳을 돌아 마침내 <거짓말>의 제작자였던 신씨네 신철 사장의 손에 들어가 본격적 영화화 단계에 돌입했다. “미술가 출신 감독이라고 시각적 요소가 두드러질 거란 예상이 있는데, 뭐니뭐니해도 영화는 시나리오가 가장 중요한 것 아닌가. 물론 생각해놓은 시각적 컨셉도 있지만 프로덕션디자이너와 상의해 결정할 문제다.”
<해피다이>는 100년 뒤의 미래를 배경으로 한다. 아무리 SF영화를 표방한다지만 미술가가 만드는 영화라면 뭔가 예술영화 계열이 아닐까. “절대로 아니다. 철저하게 영화답게 만들고 싶다. 또 최소한 적자를 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건 자본과 예술의 결합물이라는 영화의 특성을 고려한 것일 뿐 아니라 그의 유학 시절 경험이 묻어난 것이다. “독일에선 후원자로부터 돈을 받아 펑펑 쓰는 미술가는 없다. 배가 고프더라도 자신의 힘으로 작품을 만들고, 또 배려해준 화랑 주인에게 최소한 비용을 벌어주려고 노력한다.” 물론 그가 흥행만을 고려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영화를 포함해서 나는 내 작품이 두 가지 기능을 품게 하려고 노력한다. 하나는 그 작품을 보는 이로 하여금 스스로를 발견케 하는 거울의 기능이고, 또 하나는 그 작품을 통해서 다른 세계를 보게 하는 창문의 기능이다.” 프랭크 허버트의 <듄>에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는 이상현의 SF영화는, 결국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울한 세계를 비추는 거울이자, 이 세계가 이대로 나아간다면 어떻게 더욱 나빠질지를 보여주는 창문이 될 것이다.
<해피다이>는 어떤 영화?
우리에게도 내일은 있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뒤, 세계는 물에 잠기고 아시아의 이름 모를 한 도시만이 인간이 살 수 있는 공간이 된다. 지구의 침수가 진행되면서 문명은 퇴보하고 사회의 혼란과 무질서는 극에 달해간다. 이 도시의 외로운 늑대이자 정의의 수호자인 이 경사는 연쇄살인사건을 수사하던 중 어떤 음모에 의해 누명을 쓰고 경찰의 표적이 된다. 살아남기 위해 진실을 밝혀야 하는 그는 사건 수사단계에서 만난 용의자 지현을 찾지만 그녀에게로 다가갈수록 알 수 없는 위험은 다가온다. 마침내 이 경사는 살인사건의 진상과 자신에게 누명을 씌운 세력을 파헤치면서 지현의 어두운 정체를 알게 된다. 또 그 뒤에 거대한 음모의 실체인 백락수가 존재한다는 사실 또한 밝혀낸다. 결국 남은 것은 이 경사와 백락수의 최후의 대결뿐이다. 이상현 감독은 “태우고 가던 배의 선장에게 지나친 요구를 했기 때문에 나는 어느 무인도에 내려졌다. 내게 15년간의 무기와 탄약이 주어졌고…”로 시작되는 노벨문학상 수상자 주제 사라마구의 장편(掌篇)소설 <무인도>를 보고 이 영화를 떠올렸다. “SF란 장르는 오히려 현재 여기서 벌어지는 일을 더욱 리얼하게 보여줄 수 있는 것 같다”는 그는 “이 영화를 통해 지금 이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드러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촬영은 내년 상반기쯤 시작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