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의 남쪽>으로 영화 데뷔하는, 드라마 PD 안판석
방송국 스타 PD 15년 만의 외출
‘노났다’는 말이 있다. 누군가 횡재했을 때 사람들은 “노났네” 한다. 2003년 1월, 안판석은 15년 동안 다녔던 직장에 사표를 냈다. <짝> <장미와 콩나물> <아줌마> <현정아 사랑해> 등을 연출하면서 MBC 드라마 간판 프로듀서로 활동했던 그가 일을 그만둔다고 하자, 동료들은 그가 거액의 계약금을 받고서 외주 프로덕션에 스카우트된 줄 알았고, 다들 “노났구먼∼”이라고 한마디씩 했다. 회사를 그만둔 직후, SBS에서 <흥부네 박터졌네>를 연출할 때까지만 해도 주위의 반응은 그랬었다. “영화하겠다고 말하기는 뭣해서 그냥 나왔는데 전에 프리 선언하고 그만둔 사람들이 여럿 있어서 그렇게들 생각하더라.”
그의 나이 마흔다섯. 두툼한 봉급 마다하고 영화판으로 뒤늦게 뛰쳐나온 그의 갈증은 무엇이었을까. “드라마를 불끄고 집중해서 보진 않잖나. 신문 보고, 밥하고, 숙제하면서 보는 게 드라마니까. 우리 엄마도, 마누라도, 심지어 나조차도 미묘한 움직임 따위는 안 본다. 좀 봐줬으면 싶어서 만든 것도 소용없다. 누구도 ‘저기 주인공 손끝 떨리는 것 좀 봐’ 하진 않잖나. 그때마다 사람들이 되게 밉더라.” 많은 사람들이 쉽게 접할 수 있다는 매체의 가능성은 언제부터인가 그에게 의도가 제대로, 또 풍부하게 전달되지 못하는 매체의 한계로 다가왔다. “영화는 그 반대다. 드라마보다 수용자는 적지만 다들 손톱 밑의 때까지 보려고들 하니까.”
대학 시절부터 함께 어울렸던 김성수와 유하가 “힘들다고 할 때마다 그만두고 영화하라”고 뜸들이지 않았다면, 그의 궤적 이동은 불가능했거나 늦어졌을지 모른다. 그렇다고 “영화 준비한답시고 놀 수 있다는 말이 솔깃해서” 무작정 친구따라 충무로 행을 택한 것은 아니다. 어렸을 때부터 거대서사 무협만화보다 임창, 김기백 등 간단한 선만으로 귀여운 캐릭터를 만들어내던 이들의 만화를 즐겨봤다는 그는 “드라마는 스토리 전달이 제일 중요하다. 그래서 선굵은 연출자들을 선호한다. 50회가 넘는 주말 드라마의 경우 시간제약 때문에 중간쯤 가면 느슨해지기도 하고, 열심히 잇는다 해도 나중에 힘이 빠진다. 선이 굵으면 눈 한번 질끈 감고 끝까지 밀고 가는데, 난 선이 가늘디 가늘어서 안 되더라. 매번 개연성이나 표현을 따지곤 했으니까”라고 덧붙인다.
그의 데뷔작이 될 <국경의 남쪽>은 오랫동안 함께 손발을 맞췄던 정유경 작가가 일러준 탈북자 다큐멘터리에서 시작됐다. “칡뿌리 잡아 끌듯이 뭐가 줄줄이 끌려나올 것 같아” 일단 주인공을 탈북 청년이라고만 막연히 정해둔 뒤, 각종 탈북자 수기를 찾아 읽고 광화문의 북한인권정보센터를 줄기차게 다니면서 캐릭터와 이야기를 덧붙여갔다. “방북단 일행을 TV로 볼 때마다 끼고 싶었다”는 그는 “자료로도 알 수 없는 부분들이야 미뤄 짐작할 수밖에 없지 않으냐”고 고충을 털어놓는다. “한 개인의 병은 세상의 병이기도 하다는 말이 있잖나. 드라마 할 때는 못해 본 건데, 한 남자의 삶을 필사적으로 관찰하다보면 설득력 있는 이야기가 저절로 자연스럽게 나올 것 같다.”
그에 따르면, 이번 영화는 “남한에 뚝 떨어진 에일리언 같은 존재가” 사랑을, 그리고 일상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다. “생사를 넘나드는 터프한 생존기는 아니다. 그저 다른 문화권에서 살았던 존재가 남한에 뚝 떨어졌을 때 벌어지는 상황을 보여주려고 한다. 극중 선호는 일종의 에일리언이다. 무서운 에일리언이라면 공포를 안겨주겠지만, 힘없는 에일리언 같은 존재라서 웃음거리가 된다.” 그는 “북녘 사람을 등장시킨 영화들이 대개 현실과 동떨어진 인물을 가져와 희화화”했다면서, 그런 웃음과는 거리를 둘 계획이라고 말한다. “영화 만든 드라마 프로듀서들이 다 실패했다는 전례는 아무래도 부담스럽다”면서도 그는 “영상을 만드는 기초 법칙이나 문법 정도는 경험으로 알고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수학으로 치자면 정석 정도는 뗀 상태지”라고 웃었다.
<국경의 남쪽>은 어떤 영화?
탈북 청년의 남한정착잔혹사
한 젊은이가 통일전망대 앞에서 한 여인의 이름을 부르며 울부짖는다. 술에 취한 청년은 급기야 강을 건너 북행을 시도하다 경찰에 붙잡혀 유치장 신세가 된다. 이름 김선호. 생년월일 1975년 10월10일. 평양 출생. 합주단에서 호른을 연주하다 얼마 전 탈북해 남한에 정착. 현재 가족들과 함께 국밥집 운영 중. <국경의 남쪽>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남한에 오게 된 김선호라는 인물이 남한이라는 이질적인 사회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그리는 영화다. 정착금마저 브로커에게 뜯긴 선호는 북에 있는 애인 연화를 데려오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낮에는 치킨 배달을 위해 땀을 흘리고, 밤에는 웨이터 김정일로 변신한다. 심지어 일요일에도 그는 교회 순례를 다니며 탈북 간증을 해 돈을 모을 정도로 악착이다. 그러나 얼마 뒤, 선호는 우연히 연화의 결혼 소식을 듣게 되고 절망감에 빠져든다. 한편, 그런 선호의 곁에 경주라는 여자가 성큼 다가선다. 제작진은 아직 밝힐 수 없지만, 캐스팅은 마무리된 상태라고 전한다. 현재 촬영 후보지를 물색 중인 안판석 감독은 “(헌팅을 위해) 봉고차 타고 다니면서 한나절만 돌아도 다리가 후들거린다”면서도 “함께할 배우들의 경우, 전에 드라마 할 때 서로 신뢰를 쌓았던 배우들이라 만족한다”면서 자신감을 표했다. 8월20일부터 시작될 촬영은 올 연말까지 진행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