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2000년 한국영화 신작 프로젝트 [4] - <공동경비구역 JSA> 外
2000-01-11
글 : 남동철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공동경비구역J.S.A>

이런 영화

판문점에서 일어난 총격사건의 진실을 밝혀내는 과정을 통해 분단에 대한 새로운 ‘화법’을 제시하는 ‘미스터리 휴먼드라마’. 분단을 이야기하는 방식으로 흔히 맹목적인 반공이나 이산가족의 통곡을 소재로 삼던 관습과는 전혀 다른 시도가 주목된다. 또 전쟁은 ‘구경도 못한’ 젊은 세대들에게 이어진 분단의 상처에 천착하고 있으며 전쟁을 체험한 세대와 젊은이들 사이의 이해과정에도 소홀하지 않다는 점은 돋보이는 대목이다. 이런 의도대로 영화는 부산스럽게 극적 긴장감을 조장하기보다는 밀도있고 모던하며 지적인 분위기다. 이야기의 시작은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 있는 일명 ‘돌아오지 않는 다리’ 북단에서 북한쪽 초병이 일곱발의 총격을 받고 참혹하게 살해되는 사건. 북쪽에서는 남쪽의 기습테러 공격으로, 남쪽에서는 북쪽에 납치당한 남쪽 병사가 탈출하는 과정에서 생긴 일이라는 주장으로 맞선다. 남북의 합의로 중립국감독위에서 수사에 나서는데 책임수사관이 한국계 스웨덴인 여군 소피 소령이다. 소피 소령의 수사과정에서 뜻밖의 사건과 음모가 드러나는 이야기다. 영화의 주무대가 될 판문점과 ‘돌아오지 않는 다리’ 세트를 지어 촬영한다. ‘돌아오지 않는 다리’는 충남 아산에 오픈 세트를 완공했으며, 판문점은 양수리 서울종합촬영소 안에 8천평 부지에 만들고 있다. 판문점 세트 제작비만 8억원, 현재 공정 70% 정도.

감독 한마디

“분단의 ‘비극’이라구? 아니다. 오히려 나는 분단의 ‘코미디’라 부르고 싶다. 판문점에 가보면 안다. 거긴 회담장 탁자에 놓는 깃대 높이 가지고도 경쟁하는 곳이다. 결국엔 천장까지 닿는 놈을 만들어 와서는 탁자에 안 세워진다고 투덜대는 그런 곳이라니까. 바닥에 그어진 금만 살짝 넘으면 국가반역자가 되어버린다는 상황은 어떤가. 그냥 생각만 할 땐 우습다. 그런데 누군가 진짜 저질러버린다면? 바로 총이 불을 뿜고 피가 터지는 거다. 글자 그대로 ‘선을 넘는’ 순간 농담은 비극으로 바뀐다는 얘기다. 그럼 결국 비극이 아니냐구? 천만의 말씀. 그 한발짝만으로, 농담에서 비극으로 넘어갈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코미디란 말씀. 차라리 진짜 슬픈 건 도널드 트럼프의 최근 한마디다.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면 북한을 폭격하겠음.’ 결국, 밀리터리 수사극으로 시작해서 휴머니스틱 코미디를 거쳐 장엄한 비극으로 끝나는 영화 <공동경비구역J.S.A>는 이런 말을 하려 한다. ‘우리는 전쟁을 반대한다!’”

<킬리만자로>

이런 영화

화산(火山)이자 만년설에 덮혀있는 백산(白山) 킬리만자로. 영화 <킬리만자로>는 오승욱 감독의 첫 번째 등정길이지만, 사실 영화는 아프리카 근처에도 가지 않는다. 영화의 배경은 아프리카의 산이 아닌 주문진 바닷가다. 전체분량 115씬 중 25씬 정도 촬영을 마친 상태인 <킬리만자로>는 쌍둥이 형제인 해식과 해철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끌어간다. 형사인 해식의 총을 빼앗아 동생 해철이 자살하는 첫 장면을 기점으로 시간은 쌍둥이의 서로 다른 과거와 반쪽만이 남은 현실로 나뉘고, 공간은 도망치듯 빠져나온 주문진과 돌아가야 할 주문진을 오간다. 똑같은 반쪽을 통해서 도드라지는 것은 자신의 결핍이고 증폭되는 것은 상대의 위협에 대한 불안이다. <킬리만자로>는 온전한 ‘몸통 하나’를 차지하기 위해 치받는 ‘머리 둘’이라는 비극적 상황을 설정하지만 해식이 동생의 흔적들을 끼워 입고 해철로 살아가는 후반부에 이르면 삶의 비릿함이 새하얀 눈으로 덮힌다. 박신양이 1인 2역을 맡고 안성기가 번개 역에 가세해서 캐스팅 단계부터 화제가 됐던 <킬리만자로>의 순제작비는 13억원 정도. <그 섬에 가고 싶다> 연출부를 시작으로 오승욱 감독은 <초록물고기> 조감독, <8월의 크리스마스>와 <이재수의 난>의 시나리오 작업 등을 거쳐 이번에 데뷔하게 됐다.

감독 한마디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한 건 흰눈이 쌓인 정상에서 숨이 멎은 채 등을 내보이고 쓰러져 있는 한 사내와 그를 지켜보는 또 다른 사내의 모습을 잡은 이미지가 떠오르면서부터다. 그들을 해식과 해철로 보아도 무방하다. 자기 반쪽에 대한 거부는 자신을 지탱해주던 끈을 끊어내는 일이고 그들은 나락으로 떨어진다. 죽은 자의 무거운 침묵과 아직은 살아있는 자의 허망한 시선은 추락의 결과다. 그러나 해식과 해철 같이 비루하고 너덜너덜한 삶에도 그 얼룩이 새하얗게 표백되는 정화의 순간은 있다. 해철의 흔적들을 고통스럽게 모으면서 해식은 해철이 되어간다. 반쪽 해식은 자신을 비우고 반쪽 해철을 그 안에 채운다. <킬리만자로>는 바리새인 사울이 사도 바울이 되는 기적의 순간과도 같은 그 합치의 찰나를 놓치지 않고 잡아낼 생각이다.”

<미인>

이런 영화

‘지식인 감독’ 여균동은 영화를 통해 시대와 사회를 사유하고, 자아와 영화를 반성한다. <미인> 또한 문명비판서의 성격이 짙다. 그는 ‘몸’이라는 화두를 부여잡고서 현대의 속도와 이성 중심의 세계관에 물음표를 던지려고 한다. <미인>은 그가 지난해 펴낸 소설 <몸>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다. ‘한 남자’의 차에 느닷없이 실연당한 ‘한 여자’가 올라타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누드모델인 여자의 상처를 감싸주게 된 남자는 점점 여자와 그녀의 육체에 집착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상대의 육체에서 위로를 구한다. <미인>은 처음부터 끝까지 남자 주인공 시점으로 전개된다. 여자를 만나면서 ‘누구도 사랑하지 말자’고 다짐하던 남자의 마음에 일어난 변화를 오롯이 따라간다. 따라서 남자가 보지 못하는, 여자가 밖에서 하는 일이나 생각은 화면에서 지워진다. 자연히 설명이 적고 생략이 많을 수밖에 없다. 감독은 철저한 1인칭 시점의 영화를 시도하려고 한다. 그의 실험이 성공한다면 한국영화는 말하기의 또다른 방법을 추가하게 될 터이다. 현재 시나리오는 탈고했지만 출연 배우들의 경험과 사랑에 대한 단상을 들어 디테일한 부분을 보충할 생각이다. 사랑이란 게 워낙 사소하고 개인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남자는 우리가 잘 아는 배우에게 맡기지만 여자는 새얼굴을 캐스팅할 예정이다.

감독 한마디

“몸은 여러 가지로 우리 시대의 화두가 될 법하다. 20세기에는 게으르다, 느리다, 못생겼다라는 게 비난거리였다. 하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몸의 유한함이 갖는 미덕에 초점을 맞추려고 한다. 몸은 유한하다. 젊을 때는 정신이 육체를 노예처럼 부리지만 나이들면 몸이 이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몸에 대한 관심은 지금껏 좋아하던 것에 대한 회의에서 출발했다. 난 몸의 유한함이 귀엽고 사랑스럽다. 작품 전체를 남자의 관점에서, 그의 마음의 변화를 조용히 따라가보려고 한다. 생략이 많겠지만 그 남자가 되어 따라가면 이해하기 쉬울 거다. 난 이 영화가 단문으로 쓰여진 소설처럼 받아들여지면 좋겠다. 이 최첨단의 시대에, 이 영화는 아날로그처럼 받아들여지길 바란다. 뭐랄까, 소설을 읽을 때는 문장 사이에 개인적 상상을 할 여지가 많다. 그러나 영화는 이미지에 압도돼 화간을 읽지 못한다. 소설처럼 넉넉한 영화를 만들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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