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타이틀]
김정대의 명품 DVD <카게무샤 -크라이테리언 컬렉션>
2005-08-22
글 : 김정대
명작의 험난했던 제작 과정을 확인한다

<데루스 우잘라>(1975)를 연출한 이후 구로사와 아키라는 심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무척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60년이 넘는 그의 영화 인생에서 가장 힘든 기간이 바로 이 시기였다고 해도 결코 과언은 아니다. 수 십 년간 일본 영화계에, 아니 세계 영화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일본의 국보 감독’이었던 그는 이 시기, 감독으로서 자신의 커리어의 ‘대단원’을 장식할 역작들을 구상 중이었다. 이 영화들은 그의 작품세계를 집대성한다는 의미에서 뿐만 아니라 <도라!도라!도라>의 연출 계획이 무산된 이후 약간의 침체기를 걷던 아키라 자신에게 일종의 ‘탈출구’의 역할을 할 것이라는 점에서도 매우 중요했다. <카게무샤>(1980)는 말하자면, 그 일련의 작품들 중 첫 번째 것에 해당한다 할 수 있다.

세계 영화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거장들의 대표작이 늘 그랬듯, <카게무샤> 역시 제작과정이 영화 자체만큼이나 드라마틱했다. 한 마디로 이 영화는 노장 감독의 투철한 장인정신과 추종자들의 헌신적인 성원, 그리고 자본의 힘이 삼위일체가 되어 낳은 ‘빛과 컬러의 기적’이라 할 만하다. 크라이테리언에서 지난 3월에 발매한 <카게무샤> DVD(CC 일련번호 267번)에도 이와 똑같은 수식어를 붙일 수 있다. 감상자는 본 DVD 타이틀을 통해 <카게무샤>라는 위대한 걸작이 갖는 미학적, 역사적 의미뿐만 아니라 작품이 완성되기까지의 험난한 과정 자체를 ‘라이브 버전(!)’으로 음미할 수 있다.

1970년대 말, <카게무샤>의 각본을 완성한 아키라는 제작을 맡을 영화사를 찾아 동분서주하게 된다. 하지만 그의 각본을 본 이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영화의 스케일이 거의 ‘할리우드 스펙터클 영화급’이었던 데다가 세트 역시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였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 엄청난 엑스트라와 의상에 소요될 비용이란! 제작자 입장에서 자칫 잘못하다가는 스튜디오 하나를 통째로 말아먹기 십상인 프로젝트였다. 한 순간, 아키라는 <카게무샤>의 영화화는 ‘영원히 불가능한 프로젝트’라고까지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영화로 만들 수 없다면 최소한 내가 머리 속에 구상한 이미지라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처절한 심정으로 200장이 넘는 ‘스토리보드’를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Image: Kurosawa
A Vision Realized

이 일화는 사실 구로사와 아키라의 팬들에게는 익히 잘 알려진 것이나, 막상 그 전설적인 ‘스토리보드의 실체’를 직접 눈으로 본 이들은 그다지 많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번 크라이테리언 DVD에서는 그 실체를 직접, 그것도 무려 세 가지 버전으로 확인할 수 있다. 첫 번째는 ‘부클릿’을 통해서다. 타이틀에는 (크라이테리언의 고급 타이틀이 늘 그랬듯) 45페이지에 이르는 근사한 부클릿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 부클릿의 절반은 바로 아키라가 그린 스토리보드로 장식되어 있다. (참고로, 이 부클릿의 나머지 절반은 피터 그릴리가 쓴 영화 소개글, 지난 1981년 여름에 ‘사이트 앤 사운드 Sight and Sound' 지에 게재된 평론가 토니 레인즈와 아키라와의 인터뷰 글, 그리고 영화사가 도날드 리치가 쓴 아키라 감독에 관한 글로 채워졌다).

두 번째는 부록 디스크에 담긴 세 번째 영상물 'Image: Kurosawa's Continuity'을 통해서다. 약 43분 길이의 이 영상물은 아키라가 그린 스토리보드에 대사를 넣어 영화 형식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영화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 역을 맡았던 유이 마사유키가 제작한 것이다. 세 번째 역시 부록 디스크에 담긴 영상물로, 'A Vision Realized'다. 여기에서는 아키라의 스토리보드와 함께 그것이 실제로 영상화 된 장면을 직접 비교 감상할 수 있다. 아키라가 머리 속에 있는 바를 얼마나 정확하게 그림으로 옮겼는지, 또 이것을 얼마나 정교하게 영화화 했는지를 한 눈에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부가영상이다. 아마도 눈썰미 있으신 분은 ‘수채화로 그린 이 경이로운 스토리보드’를 통해 아키라의 그림 솜씨가 ‘보통이 아니라는’ 것쯤은 한 눈에 눈치 채셨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사실 영화감독의 길을 들어서기 전 아키라는 ‘화가 지망생’이었다. (그는 영화감독이 된 후에도 ‘그림과 영화는 사실상 같은 뿌리의 예술 형태다’라고 이야기하곤 했다)

조지 루카스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아키라가 그린 스토리보드는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와 조지 루카스에게도 깊은 감명을 주었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코폴라와 루카스는 한 때 사장될 뻔한 <카게무샤> 프로젝트를 다시 수면 위로 부상시키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인물들이다. 많은 팬들이 예상했듯, 본 타이틀에는 <카게무샤>의 제작에 재정적 도움을 준 코폴라와 루카스의 인터뷰 장면 역시 부록으로 실려있다. 'Lucas, Coppola, and Kurosawa'라는 제목의 이 부가영상물(약 19분 분량)에는 아키라의 열렬한 팬인 두 감독이 최초로 아키라의 영화를 접한 순간의 감흥, 아키라의 영화가 자신들의 영화 인생에 끼친 영향, <카게무샤>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된 배경 등이 조목조목 소개된다.

흥미로운 점은 코폴라와 루카스가 아키라에게 도움을 준 이유가 ‘존경하는 이를 위한 선심’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일종의 ‘보은(報恩)’에 가깝다는 것이다. 아키라의 작품이 이들의 대표작인 <대부>나 <스타워즈>의 구상에 많은 도움을 주었듯, 그들 역시 아키라에게 ‘마땅히 갚아야 할 빚을 갚는다’는 심정으로 <카게무샤>의 제작에 참여한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20세기폭스사가 <카게무샤>에 재정지원을 결정한 이유 역시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폭스는 일본 내의 흥행수익이 어떻든, <카게무샤>가 미국에서는 흥행에서 별 재미를 못 보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루카스에 대한 일종의 ‘보은’ 차원이었다. (당시 폭스는 <스타워즈>의 흥행 초대박으로 인해 돈방석 위에 올라 앉아 있었다. 루카스의 요구에 따라 <카게무샤>에 제작비를 지원하기로 결정한 사람은 <스타워즈>의 제작을 가능하게 했던 폭스 사의 제작 책임자인 알란 라드 주니어였다.)

코폴라와 루카스는 자신들이 존경해마지 않던 아키라의 영화 연출 현장을 직접 목격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오기도 했는데, 부가영상에서 그들은 아키라의 현장 지휘 과정을 지켜보며 많은 것을 배웠다고 증언하기도 한다.

구로사와 감독
촬영 감독 인터뷰

부록 디스크에 수록된 부가 영상 중 절대 놓치지 말아야 할 또 하나의 것은 바로 'Akira Kurosawa: It is Wonderful to Create'다. TV용으로 제작된 'Toho Master Works Series'중 한 에피소드인 이 다큐멘터리에서는 아키라가 <카게무샤>를 제작하게 된 배경, 제작과 관련하여 그가 겪은 여러 고초들, 구체적인 제작 과정 및 뒷이야기들이 배우와 스탭들의 생생한 인터뷰와 함께 낱낱이 소개된다. 참고로 이 다큐는 아키라 감독의 사후에 제작된 것으로, 영화에 참여했던 많은 배우와 스탭들이 백발을 자랑(?)하는 노인이 된 후다.

여기에서는 그간 팬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기막힌 에피소드가 수도 없이 소개된다. 아키라 감독이 전문가도 쉽게 알아채기 힘들 정도의 미묘한 카메라 필터의 차이를 직감적으로 눈치 채고 ‘시정’을 명한 에피소드(‘영화사의 불가사의’로 불리는 이 영화의 놀라운 색채는 결코 우연히 탄생한 것이 아니다), 누구도 생각지 못한 스코어의 기막힌 활용 방법을 아키라가 ‘본능’에 의해 제시하여 음악 감독을 놀라게 한 에피소드, 유명한 나가시로 전투 장면에서 시체들 사이에서 말이 뒹구는 장면을 어떻게 촬영했는지에 관한 에피소드 등은 특히 흥미롭다.

또 본래 주인공 역으로 낙점되었던 가츠 신타로(<자토이치>의 스타 배우)가 어찌하여 중도 탈락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관련인들의 회상 인터뷰를 통해 자세히 소개된다. (간단히 요악하자면, 가츠 신타로가 <카게무샤> 프로젝트에 ‘너무 열성적’으로 임했다는 것이 원인이었다. 그는 자신이 나오는 신을 직접 찍겠다고 말하여 아키라 감독과 스탭들을 당황케 했다. 물론 아키라 감독이 이것을 용인했을 리 만무하다. 결국 말다툼 끝에 가츠 신타로는 중도탈락하고 말았다) 이 외에 영화 본편 디스크에는 비평가 스티븐 프린스가 참여한 음성해설도 실려 있으니, 관심 있는 분은 꼭 경청하시라.

크라이테리언 그 명성 그대로

이번 크라이테리언 발매판 <카게무샤>가 특히 주목을 받은 이유는, 바로 북미에서 최초로 공개되는 <카게무샤>의 세 시간짜리 ‘완전판’이라는 점 때문이었다. 기존에 폭스가 배급한 것은 이번 발매판보다 약 20분 정도가 짧은 버전이었다(참고로 폭스에서 출시된 국내 발매판 <카게무샤> 역시 이 ‘삭제 버전’이다).

DVD의 퀄리티는 ‘과연 크라이테리언!’이라는 감탄사를 연발하게 할 정도로 빼어나다. MTI 디지털 복원 시스템과 HD 트랜스퍼를 거쳐 화려하게 복원된 크라이테리언판 <카게무샤>의 영상은 사실 단순한(그리고 기계적인) DVD의 평가기준으로는 도저히 형언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 바로 ‘불가사의 할 정도’의 미적 감각이다. 이 영화의 영상은 한 마디로 ‘아름다움의 궁극적 결정체’라고 표현할 수 있다. 특히 거의 ‘전설적인 것’이 되어버린 이 영화의 불가사의한 색체는 본 타이틀을 통해 거의 100% 완벽하게 구현된다. 그야말로 ‘경이로운 색감’이라 할 만하다. 영화에서 강렬한 이미지를 전달하는 모든 색감들(붉은 색, 녹색, 푸른 색 등)이 마치 눈앞에서 ‘달려드는’ 것처럼 생생하게 구현되는데, 단지 그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감에 젖을 수 있을 정도다.

입자의 표현상태 역시 폭스의 국내 출시판에 비해 한층 안정적이다. 6분 정도의 롱테이크로 지속되는 유명한 첫 장면(신겐과 동생 노부가도, 그리고 후에 ‘카게무샤’역을 하게 될 도둑이 삼각구도로 둘러앉아 대화를 나눈다. 프레임 상의 인물들의 배치나 촬영 앵글이 형언하기 힘들 정도로 절묘하다)에서 이 부분은 특히 두드러진다. 아키라가 이후에 연출한 <란>(1985)에 비해 <카게무샤>는 정적이고 연극적인 요소가 훨씬 강하다. <카게무샤>는 대단히 큰 스케일을 자랑하는 시대극이지만, 정작 영화를 구성하는 개개 쇼트들은 놀라울 정도로 정적인 것이 특징이다.

또한 아키라가 이전에 연출했던 시대극인 <쓰바키 산주로>(1962)나 이후의 또 다른 초대형 컬러 프로젝트였던 <란>과는 달리, ‘직접적인 전투장면’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도 특기할 만 하다. ‘전쟁영화’의 형태를 띠고 있는 이 영화의 본질은 사실은 심리극, 그것도 사상 최대 규모의 ‘심리극’에 가까운 것이다. 일례로, 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나가시로 전투 장면을 보자. <반지의 제왕 3: 왕의 귀환>을 압도할 정도의 에너지를 뿜어내는 기마병의 돌격장면이 있은 뒤, 조총병들의 사격장면이 이어진다. 그러나 이후 정작 (관객들이 기다리던) 기마병들이 쓰러지는 장면은 ‘훌쩍’ 건너뛰어 버린 채 말과 병사들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는 유명한 장면으로 전환된다. <카게무샤>에서 전투장면은 오로지 음향효과와 인물들의 표정 등으로 ‘간접적으로’ 제시될 뿐이다. 따라서 ‘숨 가쁜 상황’에서도 정적인 느낌이 드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크라이테리언판 <카게무샤>의 안정된 영상 구현력은 이런 기묘한 느낌을 120% 살려준다. 아마도 구로사와 아키라 팬들 중 이전에 <카게무샤>를 이 정도의 경이적인 퀄리티로 감상하신 분은 없을 것으로 믿는다.

돌비 디지털 2.0 음향(보다 정확히는 ‘3.1채널(좌-센터-우-우퍼)’이다)’ 역시 모든 면에서 만점 수준이다. 인물들의 대사가 더없이 청명하게 전달되며 세세한 주변 음향의 재생(이 영화는 이미지만큼이나 음향 효과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 영화다) 역시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 정도로 훌륭하다. 단, 전술했듯 영화의 성격 자체가 전쟁을 주제로 하고 있음에도 정적인 느낌이 강한 관계로 ‘공격적인 성향의 사운드’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니 참조하시기 바란다.

크라이테리언의 <카게무샤>는 모든 면에서 ‘명품’이라는 칭송을 듣기에 부족함이 없다. 2005년 상반기에 발매된 타이틀 중 가장 높은 평가를 받은 이 타이틀은 크라이테리언이 곧 발매할 <란>에 대한 기대치 역시 ‘측정 불능’ 수준으로 상승시키고 있다. ‘명품 컬렉터’를 자처하는 분들 중 아직까지 이 타이틀을 구매하지 않은 분은 주저하지 말고 ‘지르시길’. 결코 후회 없는 선택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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