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를 질주하며 양‘아치와 씨팍’새가 온다. 도발적인 장편애니메이션 <아치와 씨팍>(튜브엔터테인먼트)이 오랜 산고 끝에 개봉점을 향해 달려오고 있다. <씨네21>의 한국영화 제작진행표에서 개봉시기를 1년 또 1년 연장해가며 기거해왔던 장편애니메이션이 프로덕션 작업을 대부분 끝내며 마지막 광내기에 접어든 것이다. 기획이 시작된 지 7년. 인터넷 플래시애니메이션으로 선보여 열혈 마니아층을 낳은 지 딱 5년 만의 일이다. 장편애니메이션으로서는 그리 오랜 제작기간이 아니라지만, 그래도 7년이라는 세월은 탯줄을 부여잡은 아이 하나가 인터넷 앞에서 마우스를 쥐기까지의 시간이다.
드디어 제작진행표의 저주에서 벗어나게 된 <아치와 씨팍>은 국적불명 혹은 국적불문의 ‘퐝’당한 애니메이션이다. OO을 에너지원으로 삼는 미래의 어느 미성년자 거주곤란 도시. 인간이 자체적으로 생산 가능한 이 에너지원을 증가시키기 위해 정부는 ‘하드’(막대기 아이스케키)를 시민에게 나눠준다. 문제는 지구상의 어떤 마약보다도 강한 하드의 중독성이다. 한번 맛을 보면 먹지 않고는 살 수 없다. 게다가 하드의 부작용으로 노동 능력을 상실한 채 하드 약탈을 일삼는 보자기 갱단이 생겨나고, 이들을 잡기 위해 정부는 열혈 형사 게코를 투입한다. 여기에 세상만사 걱정없고 불만 많은 아치와 씨팍이 우연히 얽혀든다. 발칙한 상상력의 <아치와 씨팍>을 머릿속에 떠올린 괴짜는 (액면가에 관계없이 괴짜처럼 보이는) 조범진 감독과 일당들이다. 그래픽 관련 직종에서 일하던 그림장이들은 ‘조범진팀’이라는 이름하에 본격적으로 장편애니메이션의 꿈을 꾸기 시작했고, <업 앤 다운 스토리>라는 단편영화가 제3회 SICAF에서 대상을 수상하면서부터 꿈에는 가속도가 붙었다. 무한한 상상력을 지닌 가난한 괴짜들은 “시쳇말로 간덩이가 부어서 우리도 애니메이션할 수 있나보다”라고 생각하자마자 과감하게 사표를 던졌다. 그들은 “재미있는 거 한번 만들어보자”는 객기로 시작된 게릴라 전투가 자그마치 7년의 미래를 담보로 붙잡을 것이라는 사실은 예감하지 못한 채, 신사동의 주택을 합법개조해 ‘J팀’을 차렸다. 그때가 1998년이었다.
“재미있는 거 만들어보자” 1998년 J팀 가동
일단 시작되자 J팀의 프로젝트는 탄력을 받으며 가동되었다. 스토리보드를 만들고 시나리오를 고쳐나가는 상황에서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의 ‘무명’배우 류승범과 임원희가 각각 아치와 씨팍에게 살아 있는 목소리를 빌려주기로 했다. 프로젝트가 슬그머니 자리를 잡아가던 2001년 마침내 튜브엔터테인먼트가 투자와 배급 부문을 맡아 뛰어들었고, 태평한 예술가 타입의 조범진 감독을 보조하기 위한 살림꾼 김선구 PD가 투입되었다. 대략 2년 정도면 멀끔한 장편애니메이션 하나 뽑아낼 수 있으리라는 믿음으로 똘똘 뭉친 J팀의 객기는 충무로 제작사 튜브엔터테인먼트의 전격적인 지원 없이는 불가능한 꿈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꿈은 좇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쉬이 이루어지기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이성강 감독의 <마리 이야기>와 수십억 규모의 프로젝트들(<엘리시움> <원더풀 데이즈>)이 시장에서 무너지자 투자자들은 마르지도 않은 작화 위에 뿌린 황금을 서둘러 회수했다. 정부와 언론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며 애니메이션 산업을 온기로 감싸안은 지 겨우 2∼3년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투자자들이 <마리 이야기>가 망했는데 어떡하냐며 난리였다. 컨셉이나 타깃이 전혀 다른데도 어차피 같은 애니메이션이라는 점에서 우리 역시 흔들리게 된 것이다. 이럴 땐 정말 당황스럽다. <여고괴담> 망했는데 <말아톤>은 어떡하냐는 말과 비슷하다. 한편의 극장용 장편이 무너지면 모든 애니메이션 프로젝트들이 영향을 받는다.” 김선구 PD의 토로처럼, 투자자들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떠나갔다. 해서 2002년부터 2003년 하반기까지 <아치와 씨팍>은 (완전한 제작중단이 아니라) 버티기에 들어간다. J팀은 이 기간을 “꼭 계속 작업해야 하는 사람들만 후일을 도모하며 붙어서 개긴 기간”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재미있는 거 하나 만들어보겠다고 모인 사람들이니 가만히 부활의 날을 기다리며 반상회만 거듭한 것은 아니었다.
플래시애니메이션으로 먼저 선보여 큰 호응
본격적인 프로덕션에 돌입하기도 전에 암초를 만난 J팀은 버티는 동안 7부작 ‘플래시애니메이션 <아치와 씨팍>’ 시리즈를 만들었다. J팀이 플래시애니메이션을 만든 연유에는 두 가지 가능성을 가늠해보기 위한 전략이 있다. 첫째, 투자사에 작품의 컨셉을 좀더 명확하게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시나리오와 종이 위에 다소곳이 머무른 그림만으로 의심 많은 투자자들을 유혹하기는 그리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금 간편하고 저렴한 방식을 이용해 작품의 색깔을 드러낼 도구가 필요했다. 둘째, 도대체 이 난데없는 애니메이션을 관객이 어떻게 받아들일지를 가늠해볼 필요가 있었다. J팀은 언더 만화가 김재희를 끌어들여 테스트 마켓을 시험할 플래시팀을 꾸렸고, 7부작 플래시애니메이션을 만들어 인터넷에 툭 던져놓았다. 반응은 원자폭발적이었다. 조회 수만 300만. 12분짜리로 편집된 플래시애니메이션 <아치와 씨팍>은 2001년 2월에 유바리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디지털로 상영되어 화제를 모았고, 같은 해 7월에는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10월에는 도쿄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 출품되어 입소문을 탔다.
플래시애니메이션은 본 제작팀한테도 괄목할 만한 성과를 되돌려주었다. “플래시애니메이션 속에서 잡은 액션의 원칙이나 컨셉이 본영화에도 그대로 가는 경우가 많다. 카메라 호흡 역시 플래시애니메이션을 만들면서 거의 다 테스트를 해냈다. <아치와 씨팍>에서 극단적으로 보일 액션과 빠른 카메라 움직임은 플래시애니메이션으로 이리도 해보고 저리도 해보고 하면서 느낌을 딱 잡았던 거다”라는 김선구 PD의 말처럼, 플래시애니메이션은 극장용 애니메이션을 위한 미학적 테스트로서도 더없이 적절한 매체였던 것이다.
재패니메이션과 디즈니의 경계선
원래 J팀은 <아치와 씨팍>을 2D애니메이션으로 만들 생각이었다. 그러나 다양한 카메라워크를 구사하는 화면을 일일이 그림으로 그려내는 일은 지옥처럼 괴롭고 천국처럼 지루하다. 애니메이션이 아무리 노가다라 한들, 그만한 노가다를 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결국 J팀은 배경화면을 3D로 만들기로 했다. 다만 3D 화면의 번들번들하고 인공적인 느낌을 없애기 위해서 매 프레임에 나오는 배경을 모두 하나하나 2D로 색칠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3D로 만들 수 있는 자유롭고 역동적인 카메라 움직임과 2D의 자연스러운 질감을 동시에 잡기 위한 전략이었다. 김선구 PD는 “그런 걸 두고 전략이라고 할 만한 게 있냐”는 입장이다. “기본적인 제작기법에 대해서는 별로 특이할 게 없다고 생각한다. 그저 우리 입맛에 맞도록 표현하려다 보니까 3D를 넣어야겠다, 근데 미끈거리게 보이면 어쩌지? 그럼 한장한장 칠하자, 이런 식으로 그때그때 맞는 방식을 찾은 것뿐이다.” 프로덕션의 모든 과정을 단단하게 못박고 작업하기보다는 상상력으로 뽑혀나온 이미지를 구현하기 위해 적절하게 새로운 기법을 지속적으로 적용해온 셈이다. 여기에는 컴퓨터상으로 그림을 그려, 그대로 원화로 만들어 움직여볼 수 있는 펜슬맨 같은 도구들도 도움이 됐다. 그렇게 만들어진 <아치와 씨팍>의 이미지는 3D의 입체감과 운동감에 2D 캐릭터가 구사할 수 있는 자유로움이 더해져 있다.
캐릭터디자인이 고정화된 작화 유행을 따르지 않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비비스와 버트헤드> 같은 MTV 스타일과 닮아 있으면서도, ‘앨런 길비’ 같은 유럽 애니메이션 작가들의 간결하고 예술적인 터치도 떠오른다. 올해 칸영화제 마켓의 외국 바이어들도 이처럼 독특한 <아치와 씨팍>의 스타일에 주목했다. 서구와 일본 바이어들은 “우리 것과도 느낌이 비슷하긴 하지만 정서적으로 좀 다르다”는 이야기를 주로 했는데, 김선구 PD는 이를 ‘데본 아오키’의 이름을 들어서 설명한다. 동양인도 아니고 서양인도 아닌 그 미묘한 경계의 매력. 김선구 PD의 말처럼 “재패니메이션과 디즈니의 경계선” 어디쯤에 <아치와 씨팍>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발랄한 새 피 수혈” 기대
<아치와 씨팍>은 이제 11월 개봉을 앞두고 있다. 현재 튜브엔터테인먼트는 미국, 일본과 구체적인 거래를 성사시키고 있는 단계이며, 유럽의 몇몇 국가와는 이미 사전판매를 성공적으로 이루어냈다. 15분짜리 주요 장면 모듬클립을 본 부산국제영화제팀은 본편이 나오는 대로 <아치와 씨팍>의 출품을 결정내릴 참이다. 이제 J팀은 8월 안으로 원화 리테이크 작업을 끝내고, 9월까지 자잘한 손질을 마무리하는 대로 7년 동안 품어왔던 아이를 세상에 내놓는다. 리뉴얼을 위해 닫혀 있는 홈페이지(www.aanss.com)의 문구처럼, J팀의 현안은 ‘좀더 깔끔하고 좀더 멋있게 찾아뵙’는 것. 15억원으로 시작했던 프로젝트는 7년을 거치며 35억원으로 불었지만, 애니메이션보다 돈이 덜 드는 극영화 평균제작비와 비교해보더라도 참으로 안정적인 액수다.
김선구 PD는 요즘 맨손으로 시작한 <아치와 씨팍>에 살을 붙이고 더운 피를 흘려넣으며 쌓아온 지난날을 되돌아보곤 한다. “김문생 감독의 <원더풀 데이즈> 제작팀을 드나들며 훔쳐보기도 여러 번 했다. 이 사람들은 대체 어떻게 하나. 편집실에서는 어떤 식으로 작업하나. 어떤 부분에서 고생을 하나. 그런 식으로 말이다. 그렇게 맨손으로 <아치와 씨팍>을 만들어가면서 지혜가 많이 생겼다.” 그렇게 얻은 지혜로 <아치와 씨팍>이 거두어야 할 당면 과제는 물론 시장에서 성공을 거두는 일이다. 김병헌 경기디지털센터장의 이야기에 따르자면 “<아치와 씨팍>이 극장용 애니메이션의 부활을 알리는 신호탄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예감”이 업계에 퍼져 있는 상태. 이는 순수한 엔터테인먼트 <아치와 씨팍>이 자신감을 잃어버린 한국 장편애니메이션계에 발랄한 새 피를 수혈할지 모른다는 기대 때문이다. J팀은 이같은 기대가 적지 않게 부담스럽다. 그래도 어떤가. “일탈이 좀 필요한 것 같다. 욕도 못하고 돌아서서 조용히 ‘씨발’이라고 내뱉는 게 아니라, 낯짝 두껍게 ‘씨이발!’ 하고 외치는 듯한 쾌감을 주고 싶다. 관객이 보통의 한국 애니메이션에서 기대했던 것과 전혀 다른 것을 보면서 스스로의 고정관념과 충돌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싶다. 정말 재미있을 것 같다”는 김선구 PD의 말처럼, 새로운 관객은 한국 애니메이션이 한결같이 그려온 순박한 이상향으로부터 이미 탈출할 준비가 되어 있다.
조범진 감독 인터뷰
“일주일에 다 만든 걸 7년째 붙잡고 있는 셈”
-<아치와 씨팍>의 세계는 어떻게 구상한 것인가.
=그냥 재미있는 거 만들고 싶어서 시작했다. 기존의 관습적인 애니메이션과는 반대로 가보고 싶었다. 애니메이션쪽도 잘 모르고 그냥 시작한 것이다.
-시작부터 <아치와 씨팍>이 이처럼 황당한 세계관을 지니고 있었던 것인가.
=캐릭터나 설정 같은 것은 시작하자마자 일주일 안에 다 만들어졌다. 대신 큰 스토리와 캐릭터들을 손봐가는 작업을 오래했다. 그러니까 일주일에 다 만든 걸 7년째 붙잡고 있는 셈이다. (웃음)
-예술적으로 영감을 받는 애니메이션 작가들은 누군가.
=솔직히 애니메이션을 잘 안 본다. 음, 최근에 <인크레더블>을 재미있게 봤다. <원더풀 데이즈>는 김문생 감독과 친하기도 하고, 우리가 시스템을 훔쳐서 따라한 것도 많고. (웃음) 기술적으로 막히면 자주 물어보러 가기도 했다. 그래서 각별한 애정이 있다.
-오뎃사의 계단 패러디나 <매드 맥스>를 연상시키는 고속도로 액션장면 등 극영화에 대한 오마주 같은 것이 많은 듯하다.
=잘 몰라서 그랬다. (웃음) 오뎃사 계단 장면을 패러디한 영화가 많지 않나. 지금 다시 하라면 그런 것 다 안 할 거다.
-최근 충무로 제작사들이 장편애니메이션에 뛰어들고 있는데, 창조자의 입장에서 제작자들이 이해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점이 있다면.
=애니메이션 한편을 만드는 기간이 투자사의 수명보다 긴 경우가 많다. 좀 멀리 내다보고 프로젝트를 끌고 나가야 답이 나온다고 생각해주셨으면 좋겠다. 처음에야 의욕으로는 빨리 할 것 같지만 해보면 어떻게든 길어지게 된다. 결국 빨리 만들 수 없는 첫 번째 이유는 인프라가 풍부하지 않기 때문이다. 선수가 많지 않으니까 오래 걸리고, 선수가 몇명 없는데 여러 군데서 시작하면 선수 경쟁도 있게 마련이고. 애니메이션은 사람 장사라 사람이 중요하다. 다른 것은 해가면서 하면 되는데 사람은 훈련이 되어야 하니까.
-현재 거의 작품을 마무리하는 단계인데, 오랫동안 만들어왔던 놈들을 세상에 내놓는 기분이 어떤지.
=계속 지금과 같은 템포로 작업해온 것 같다. 빨리 끝내고 놀러가고 싶다. 이게 잘되면 뒤에 뭐가 되도 되겠지만 잘 안 되면 별볼일 없겠지. 인생은 알 수 없는 거다. (웃음)
-MTV와 TV시리즈 제작을 협의 중이라고 들었는데, 그외 다른 계획은 없나.
=게임으로 변환을 해보고 싶다. 헐렁하게 하는 것 말고 제대로 공들여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