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초. 10부작 다큐멘터리 <아시아영화기행>을 기획하는 인디컴시네마의 인도편 취재에 동행했다. 인도 주류 대중영화 중 가장 유명한 뭄바이의 발리우드를 중심으로 다양한 인도의 영화관계자를 만났고, 주류영화와 예술영화의 현장을 취재했다. 그 기록을 기행문으로 엮었다. 한편 올해 10회 영화제를 준비하고 있는 부산국제영화제와 열돌을 맞은 <씨네21>이 후원하며, CJ미디어가 협찬하는 <아시아영화기행>은 10월3일부터 12일까지 SBS에서 방영되고, 부산영화제 기간 중에는 10편을 1편으로 편집한 버전이 상영될 예정이다. 올해 1월부터 시작된 인디컴시네마의 취재를 함께한 <씨네21>은, 이미 타이영화에 대한 기사를 한 차례 실은 바 있다. 앞으로 이란, 중국, 홍콩 영화의 취재기가 이어진다.
인도에 가기로 결정된 것은, 출국 일주일 전쯤이었다. 인도에는 가본 적도 없었고, 그때까지 접한 인도 영화는 <춤추는 무뚜>가 고작이었다. 부랴부랴 발리우드영화 몇편을 챙겨봤다. 흥미롭고, 화려하고, 눈을 뗄 수 없었지만, 첫째로 너무 길었고, 둘째로 어떤 장면들은 너무 유치했다. 확실한 것은 어디서도 본 적이 없는 독특한 분위기라는 것, 그리고 인도인들은 그 영화들을 정말로 사랑한다는 사실 정도였다.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편견보다는 무지가 낫다. 발리우드영화에 대한 모든 판단을 중지한 채, 뭄바이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곳의 사람들을 만나고, 그곳의 일상을 접하고, 그곳에서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을 만나면, 발리우드영화를 즐기게 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인도 문화를 찾아서
뭄바이의 교통상황은 최악이다. 사이드미러를 떼어버린 채 꽉 막힌 도로를 종횡무진하는 차들이며, 횡단보도가 필요없는 행인들 그 누구도 교통법규를 지키지 않는다. 오토바이를 개조한 듯한 외모의 세발 달린 택시, 오토릭샤를 탔다. 뭄바이 지리도 모르는 이 기사 아저씨, 외국인을 태워놓고 영어를 한마디도 못한다며 손사래를 친다. 그러나 이 정도는 뭄바이에서 별 문제가 아니다. 외국인, 그것도 자신들보다 피부색이 밝은 외국인에게는 유난히 친절한 행인들이 앞다투어 통역을 자청한다. 대도시에서 초등학교 이상 정규교육을 받은 인도인이라면 일상적인 영어대화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 영국 인구보다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메이저 언어만 17개에 달하는 인도에서, 영어 교육은 필수다. 힌디어로 “당신을 사랑합니다”가 무엇인지 물으면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고민하는 요즘의 젊은이들은, 사랑을 고백할 때 “아이 러브 유”라고 말한다.
인도영화의 DVD 타이틀이 지원하는 예닐곱개에 달하는 자막은 인도의 다양한 언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힌디어, 벵골어, 타밀어, 말라야람어, 테루구어, 구자라트어 등 대부분이 인도인들을 위한 것이다. 연간 900여편이 만들어진다고 알려진 인도영화는, 서로 다른 다섯개의 언어로 만들어진 영화를 합친 숫자다. 발리우드로 유명한 뭄바이에서 250편, 남인도영화를 대표하는 마드라스에서 250편, 예술영화로 유명한 캘커타에서 70, 80편, 이 밖에도 텔루구와 말라야람어로 각각 200편과 70, 80여편이 만들어진다. 모든 지방의 영화에는 대중영화와 예술영화가 동시에 존재하며 특색도 제각각이다. 북부에선 호리호리하고 서구적인 배우가 인기를 끌고 남부에선 풍만하고 느끼한 외모가 필수다. 폭력과 섹스의 표현수위도 다르고, 한 영화가 두 언어권에서 서로 다른 분위기로 만들어지는 일도 흔하다. 인도인에게 다양성이란,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이다.
당신의 신을 존중하는 다양성의 나라
인도의 민족구성이 태생적인 다양성을 키웠다면, 다신교인 힌두교는 인도인의 내면에 체념적 다양성이 뿌리내리도록 도왔는지도 모르겠다. 허름한 주택가 골목 구석에 위치한 힌두교 사원에 갔다. 도깨비 시장이 따로 없다. 평일 저녁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가족 단위의 참배객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애인 라다와의 사랑, 유희적인 성격 때문에 가장 대중적인 신으로 꼽히는 파란 피부의 크리슈나를 비롯해서 코끼리 머리에 깃든 장난스런 표정이 인상적인 가네샤 등 화려한 생김과 자태를 지닌 신들이 혼란을 더한다. 흥겨운 경배 음악이 흘러나오는 가운데, 사람들은 서로 다른 신을 저마다의 방식으로 경배한다. 둥글게 둘러앉아 수다에 열중한 가족도 눈에 띈다. 인도에서 떠올릴 수 있는 고요한 명상은, 그곳에 없었다.
인도인들은 오천명(?)에 이르는 온갖 종류의 신을 ‘세속적으로’ 섬긴다. 힌디어의 일상적인 인사말인 ‘나마스테’는 ‘당신 안의 신을 존중합니다’라는 뜻이다. 거리에서 흔히 보이는 의류광고판 모델은 파란 피부에 피리를 부는 크리슈나를 똑 닮았다. 종교가 생활이고 생활이 종교인 이들은, 심오한 해답이 아니라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 사원을 찾는다. 전문가들은 인도인에게 극장과 사원은 같은 의미라고 분석한다. 다양한 사연과 성격을 지닌 신들의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오래된 전통을 곱씹던 이들은, 가정의 평화와 연인의 사랑을 동시에 얻는 영화 속 흥겨운 희망에 온몸을 맡긴다. 호화로운 생활을 누리는 상류층과 신분의 굴레를 운명으로 받아들인 불가촉천민이 공존하는 사회이지만, 사원과 극장에서 모든 이는 동등하다. 참된 사랑을 얻기 위해 절망의 끝을 오가는 주인공의 모험은 다양하고 과잉된 감정으로 점철될수록, 현실과 거리가 멀수록 환영받는다. 한없이 우울하다가도, 믿을 수 없을 만큼 발랄해지는 발리우드영화의 정조가 외국인에겐 어리둥절할지 몰라도, 인도에선 지극히 자연스럽다.
발리우드의 또 다른 이름, 마살라
인도의 전통 식당에 갔다. 채식 일색인 메뉴보다 당황스러운 것은, 코를 찌르는 특유의 향신료 냄새. 달고, 짜고, 시고, 매운 맛이 범벅이 된 특유의 향신료, 마살라는 모든 음식에 기본으로 사용된다. 실제로 시장에는 일일이 구분하기 힘들어 보이는 다양한 마살라가 즐비하다. 마살라는 발리우드영화를 부르는 또 다른 이름이다. 모든 맛을 하나로 만들어버리듯, 모든 감정과 장르를 한곳에 버무린다는 의미다. 비단 마살라뿐 아니라, 크고 둥근 접시에 온갖 맛의 채소와 밥, 양념이 한꺼번에 담겨 있는 인도의 정식, 탈리처럼 음식문화 자체가 다양하고 푸짐하다. 인도인은 영화 한편으로 춤과 노래, 코미디와 비극, 멜로드라마와 정치극을 모두 감상한다. 비장한 전투 끝에 아버지를 잃은 아들은 이내 발랄한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고, 잊혀진 가족을 발견한 주인공들은 갑작스럽게 황당한 코미디를 구사한다.
공항에서부터 마주친 인도 여자들은 대부분 치렁치렁한 사리나 긴 윗도리와 긴바지로 이루어진 펀자비를 입고 있다. 그들은 교육수준이나 계급과 무관하게 전통의상을 일상복으로 삼는다. 다양한 전문직과 고위직으로의 여성 진출이 활발하고, 여성에겐 대학교육을 무상으로 실시할 만큼 여성을 위한 사회적·제도적 배려가 활발하지만, 전통과 관련해선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보수적이다. 그러나 소매가 없는 옷을 입어도 땀이 흐르는 날씨에 5m에 달하는 천을 온몸에 둘둘 감고 씩씩하게 거리를 활보하는 여성들 역시 사리를 걸친 자신의 모습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 같다.
젊은이들이 많이 보이는 번화가에 가면 청바지 차림의 여자들을 손쉽게 볼 수 있다. 과거 발리우드영화 속 여인의 역할은 복장으로 구분할 수 있었다. 주인공은 사리를 입고, 악한 여자는 서구적인 차림이었다. 그러나 10년의 세월이 흐른 뒤 맺어지는 연인의 이야기를 다룬 <쿠치 쿠치 호타하이>(1998)의 여주인공, 안젤리와 티나는 청바지와 미니스커트를 입었다. 배를 드러낼 수밖에 없는 사리의 특성 때문인지 배꼽티에 대해선 관대하지만, 종아리를 보이는 것에 대해선 민감한 인도인의 성향을 생각했을 때, 이는 엄청난 일이다. 물론 불문율은 있다. 안젤리가 평생의 사랑을 이루는 순간 사리를 입듯, 대부분의 발리우드영화 속 선머슴 같은 여주인공들은 자신의 여성적 매력을 드러내는 순간 사리를 걸친다.
대형 사리숍에 갔다. 결혼을 앞둔 듯한 여성들이 가족과 함께 형형색색의 천을 펼쳐놓고 고르느라 여념이 없다. 인도에서 결혼은 일생일대의 큰 행사다. 발리우드영화 속 여주인공의 상당수는 사랑 혹은 결혼과 가족을 양립시킬 수 없는 상황에서 고민한다. 정혼자가 아닌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의 갈등은 거짓말처럼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된다.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엄격한 아버지를 설득하거나, 정혼자는 정중하게 물러난다.
물론 현실은 이와 다르다. <딜왈레 둘하니아 레 자엥게>는 유럽 배낭여행 중 만난 남자와 사랑에 빠진 영국 거주 인도 여성이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사랑을 쟁취하는 과정을 다룬 영화다. 1995년부터 10년 동안 극장에서 상영되는 기록을 세웠던 <딜왈레…>의 상영관에서 만난 관객은 모두 열번, 스무번 이 영화를 본 사람들. 극장 안에서 주인공의 대사와 춤동작까지 따라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러나 주인공인 샤루칸이 좋아서, 음악이 좋아서, 혹은 사랑을 쟁취하는 내용이 좋아서, <딜왈레…>를 좋아한다고 말한 이들도 영화와 현실의 엄연한 차이를 알고 있다. 그들은 현실에선 가족을 위해 사랑을 포기할 것이라고 스스럼없이 말한다. 아버지는 엄격하고, 딸은 이에 순종한다. <슈팅 라이크 베컴>과 <신부와 편견>을 비롯해서 <딜왈레…> 등 숱한 발리우드영화에서 아버지로 등장했던 아누팜 케르는, 발리우드영화 속 보수적인 아버지상에 대해 질문하자 “세상의 어느 아버지가 보수적이지 않겠나”라고 반문한다.
전통 결혼식은 그 자체가 스펙터클
<몬순 웨딩> <신부와 편견> 등 익히 알려진 인도 출신 여성감독들의 영화에서 볼 수 있듯, 발리우드영화에선 결혼식 장면이 필수적이다. 사랑의 결말이자 가족의 시작으로서 인도인들이 결혼식을 중요시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유난히 왁자한 전통 결혼식은 그 자체가 스펙터클이다. 뭄바이 시내에서, 한밤중에 도로를 통제하고 가무에 열중한 결혼식 행렬과 마주쳤다. 결혼식을 마치고 신랑의 집으로 가던 그들은, 시끌벅적한 밴드를 거느리고 땀을 뻘뻘 흘리며 몸을 흔들어댄다. 힌두교의 결혼식은 보통 1주일은 족히 걸리지만, 최근엔 그나마 간소화해서 아침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하루에 끝내는 경우가 대부분. 낮시간을 할애한 식이 끝나면 거대한 뒤풀이가 시작된다. 낙천적이고 놀기 좋아하는 인도인은 춤과 노래로 부부의 행복을 빌어준다. 발리우드영화 속 춤과 노래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인도인의 삶이다. 주인공의 노래조차 극의 진행을 돕는 일반적인 뮤지컬과 달리, 발리우드의 노래·춤 장면은 이야기를 멈추고 감정 그 자체를 묘사하는 데 열중한다. 영화는 무한정 길어지지만, 관객은 이를 즐긴다. 아니, 대부분의 인도인에게 긴 러닝타임과 노래·춤은, 영화가 갖춰야 할 필수요소다.
발리우드의 간략한 역사
춤과 노래는 언제부터 들어갔을까?
인도의 첫 번째 장편영화 <라자 하리샨드라>(Raja Harishchandra, 1913)는 뭄바이에서 만들어졌다. 무성영화인 탓에 춤과 노래는 기대할 수 없었다. 당시에는 기술 스탭이나 여배우를 서양에서 ‘수입’하는 경우가 많았다. 산스크리트 연극을 영화화한 <샤쿤탈라>(Shakuntala, 1920)처럼 인도의 전통적 여인을 미국 배우가 맡는 상황도 비일비재했다. 사운드의 도래와 함께 노래는 자연스럽게 인도영화에 깃든다. 첫 번째 유성영화 <알람 아라>(Alam Ara, 1931)는 이미 노래와 춤, 판타지가 어우러진 전형적인 발리우드영화의 꼴을 갖추고 있었다. 플레이백 싱어(배우 대신 노래하는 가수)도 빠질 수 없다.
이후 대부분의 발리우드영화에는 장르를 불문하고 노래가 빠지지 않는다. 영국으로부터의 독립 이후 발리우드에선 네오리얼리즘을 연상시키는 사회드라마(<Do Bigha Zameen>), 스릴러와 로맨스를 결합한 뮤지컬(<Pyaasa>) 등 코미디 속에 개인적인 고통을 표현하는 신파영화가 인기를 끈다. 서구의 모던댄스를 끌어들이고 인도의 전통 춤을 각색한 새로운 춤, <벤허>를 능가하는 장대한 스케일 등을 통해 특유의 산업을 구축한 발리우드의 60년대가 저문 뒤. 70, 80년대는 이른바 성난 젊은이의 시대다. 발리우드의 역사를 함께한 배우 가문인 카푸르가의 대부, 라지 카푸르가 선보였던 찰리 채플린식 코미디는 자취를 감추고, 거칠고 반항적인 젊은 영웅 아미타브 바흐찬이 떠오른다. 무능한 법을 대신해 정의를 구현하는 분노에 찬 경찰(<Zanjeer>) 역할로 한순간에 스타덤에 오른 바흐찬은 이후 몇 십년간 국민배우의 입지를 지킨다.
서부영화와 사무라이영화의 흔적이 역력하지만 액션, 로맨스, 코미디, 비극, 음악과 춤 등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장르와 요소를 한데 버무리는 발리우드의 탁월한 능력이 최고조에 이른 <Sholay>(1975)는 오늘날까지 가장 완벽한 발리우드영화로 칭해진다. 90년대에 이르면 세계 속에서 발리우드의 입지가 굳건해진다. 영화를 통해 민족성 혹은 전통을 전세계에 전파시키게 된 것. 인도의 결혼풍습과 가족윤리를 3시간이 넘는 러닝타임 속에 15곡에 이르는 노래·춤과 함께 버무린 <딜왈레 둘하니아 레 자엥게> <꾸치꾸치 호타 해> 등이 대표작들. 외국자본으로 만들어졌고, 검열에 의해 상당 부분이 잘려나간 채 개봉되긴 했지만, <밴디트 퀸>처럼 인도의 비참한 현실을 바라보는 영화 역시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졌다.
참고 아쇼크 반케르 <발리우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