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눈물로 벼른 칼날, 소녀들의 가슴을 헤집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불의 검>은 신화나 마찬가지인 이야기였다. 옛날, 아주 옛날에, 이름없는 여인 하나가 불의 검과 그것을 만드는 비법을 품고 눈밭을 건너 아무르 땅에 도착했단다. 그 여인은 아무르족한테 불의 검을 건네주어 잃어버린 땅을 되찾게 했고, 푸른용부의 전사와 혼인하여 아이들을 낳았지. 수백년의 세월이 흐르고 난 뒤에 아무르족 노파들은 아이들을 모아놓고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았을까. 청동기시대와 철기시대를 가르는, 프로메테우스와도 같은 여인의 신화를. 그러나 <불의 검>은 아무리 거대한 신화라 해도 삶과 사랑과 소망을 품은, 풀잎처럼 평범한 사람들이 일구어낸 이야기라는 점을 새삼 일깨운다. 아라와 가라한 아사. 아무르족의 운명을 쥐고 있던 그들도 사랑한다는 말을 삼키고 삼키며, 마음속엔 김이 오르는 밥상을 앞에 두고 둘러앉은 풍경을 그리며, 그저 살아가던 사람들이었다고.
순정만화로는 드물게 선사시대에 내려앉은 <불의 검>은 <북해의 별> <비천무>로 순정만화의 새로운 줄기를 텄던 김혜린이 1992년 <댕기>에 연재를 시작한 뒤 지난해에 완간하기까지 10년 넘도록 끌어온 만화다. 청동기와 철기가 혼재하던 시절, 고도의 문화를 간직한 아무르족은 서쪽에서 철검의 비밀을 훔쳐 강성해진 카르마키족한테 쫓겨나 비루한 시절을 보내고 있다. 아라는 대장장이인 아버지 큰마로와 함께 산속에 숨어사는 아무르의 평민 소녀. 그녀는 심한 부상을 입고 겨울 냇물에 떠내려온 청년을 발견하고, 산마로라 이름 붙인 그와 부부의 연을 맺는다. 그러나 바로 그날 밤, 아라를 겁탈하려던 카르마키 야장귀족 수하이바토르는 큰마로를 살해하고 아라를 납치한다. 그녀를 되찾으려던 산마로는 카르마키 신녀 카라의 염파를 맞고 기억을 회복하지만, 아무르의 전사부족 푸른용부의 수장 가라한 아사로서의 자아를 찾으면서, 아라와 보냈던 실카 강가에서의 시간을 모두 잃어버린다. 오직 살아남기 위해 철검을 만들기 시작한 아라, 적의 아이를 가진 그녀가 범접할 수 없는 지도자 가라한 아사. <불의 검>은 불행하나 용감했던 연인이 다시 한번 부부의 연을 맺도록 찬바람부는 대륙의 벌판을 아프게 걷고 걷는다.
김혜린이 자인하는 것처럼 <불의 검>은 그 외곽만으로는 세상에 넘쳐나는 신파 중 하나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기억을 잃은 귀인이나 신분의 벽에 가로막힌 사랑은 <전설의 고향>만 뒤져보아도 바구니 가득 건져올릴 만한 사연이다. 그러나 여기엔 사람들이 있다. 언젠가는 “칠푼이 팔푼이 거짓화장 지우고 알몸에 황금빛 햇살을 두르고” 아득한 옛 노래를 부르고 싶은 가수 붉은꽃 바리, 기개를 팔아 민족을 구하고자 하면서도 변함없는 친구들의 모습에 수치를 느끼는 왕자 마리한 천궁, 왕에게 빼앗긴 어머니를 보며 지옥의 불길에 가슴을 내맡기는 수하이바토르, 여인의 굴레를 짊어진 신녀 카라와 소서노, 그리고도 많은 사람들. 어느 하나 조연으로 내치지 않는 김혜린은 전체로서는 영웅서사시이되, 당대의 연애소설이고 잊혀진 기록이기도 할 무명의 전사와 여인들의 이야기를, 끝없는 두루마리처럼 펼쳐놓는다. 그녀는 이족 병사들에게 짓밟히고 정신이 나간 여인을 기억하고, 조상의 땅에 돌아가지 못한 채 죽어버린 대장장이를 기억한다.
이처럼 <불의 검>은 장대한 서사시지만 소녀들에겐 몇번을 되풀이해 읽어도 눈물이 나는 연가로 남아 있다. “…님과 헤어진 강가엔 붉은 노을만, 내 노랑저고리 곱다던 님은 어딜 가셨나! 손은 곱아터지고 가슴속엔 불길같은 철검 한 자루, 내 노랑저고리 곱다던 님은 어딜 가셨나….” 혼자서 아버지를 묻은 아라는 눈물을 뿌리며 독백하고, 그녀의 울음이 터지는 순간, 마치 카메라가 뒤로 물러나듯, 그림자처럼 어두운 아라의 윤곽만이 남는다. 김혜린은 그녀의 인물들이 울고 사랑하고 입술을 깨물 수 있도록 종이 한장을 온전히 내어주곤 한다. 고민하고 고민하여 감정의 밑바닥까지 가닿지 않고선 써내릴 수 없는 언어들, 사랑한다는 말을 대신하는, 사랑한다는 말의 수백 가지 변형, 시(詩)와 서(書)와 화(畵)가 한몸을 이루는 감정의 덩어리. <불의 검>은 한 남자를 사랑한 여인의 지순한 노래이고 목동이 되고 싶었던 영웅의 어린 시절을 들려주는 마음 착한 서사시고 마침내 새로운 땅에 이른 일족의 신화가 되는 것이다.
이제 작가가 고운 우리말을 하나씩 보태어 만든 그 노래들이 뮤지컬을 거쳐 진짜 노래가 된다고 한다. 그것만으로도 좋고, 영화잡지라는 제목 때문에 한번도 지면에 데려오지 못한 <불의 검>을 실을 수 있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