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 인도에 이어 아시아영화를 찾아 떠나는 세 번째 여행지는 이란이다. 인디컴시네마가 기획하는 12부작 다큐멘터리 <아시아영화기행>의 이란편 촬영팀과의 동행기다. <씨네21>과 부산국제영화제가 후원하고 CJ미디어가 공동제공하는 <아시아영화기행>은 부산영화제 기간 동안 12편의 각 작품을 1편으로 모아 편집한 버전을 상영하고, 10월3일부터 12일까지는 SBS에서 연속 방영할 예정이다. 현실과 영화의 경계가 없는 곳, 프로와 아마추어의 구분이 무의미한 곳, 시와 카펫 그리고 영화의 예술혼이 살아 숨쉬는 곳, 이란. 아시아 영화예술의 메카 이란에서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마지드 마지디 등 거장들을 차례로 만나고, 또 그들의 집과 현장을 직접 방문한다. 이란영화의 천일야화가 지금부터 시작이다. 살람! 이란!
늦은 밤 테헤란공항에 내린다. 생각보다는 규모가 작고 아늑하다. 현지 안내인을 만나 한숨 돌리며 건물을 빠져나와 차에 막 오르려는 때, 일행 한명이 짐을 놓고 온 것 같다며 공항 안으로 허둥지둥 들어간다. 달리 도울 길이 없어 짐을 지키며 차 밖에서 담배를 문다. 그때 누군가 내 허리를 잡아당긴다. 키가 내 허리만한 소년. 정말 영화 속에서 수없이 많이 본 그 소년들 중 한명이다. 카펫의 미니 모형을 손에 들고는 사달라고 연신 표정으로 조른다. 난감하다. 아직 환전도 안 한 나는 돈이 없어 난감하기도 하려니와, 그보다는 발을 딛자마자 영화의 환영으로만 익숙한 인물이 벼락같이 실재가 되어 내 앞에 당도한 것이 더 난감하다. 그제야 나는 마침내 내가 여기 있음을 피부로 느낀다. 일행은 짐을 찾았다며 다시 나를 차 안으로 낚아채고, 실망스러워하는 소년을 뒤돌아보다가 문득 영화 속 어느 소년의 얼굴이 겹쳐 떠오른다. 마약중독자 아버지 대신 내가 일하면 안 되겠냐고, 신분증이 없으면 왜 일을 못하냐고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빌고 울며 일자리를 찾아 헤매던 아볼파즐 잘릴리의 영화 <단>에 나오던 그 소년을 나는 테헤란공항에서 만난 것이다. 여기는 현실과 영화가 구분없이 서로를 취하는 영화의 땅 이란이자, 그중에서도 테헤란이다.
거리로 나간 대낮의 모습은 모든 것이 그대로 영화다. 차도르(이슬람 여성들이 규정에 따라 몸 전체를 가리는 옷)와 히잡(이슬람 여성들이 규정에 따라 머리에 둘러쓰는 베일)을 쓴 여자들이 거리를 지나가고, 이제 막 소년에서 청년이 된 듯한 남자들은 후진 오토바이에 앉아 폼을 잡고 달린다. 녹색의 군복을 입은 군인들을 보는 것은 그만큼이나 쉬운 일이다. 세발자전거를 탄 아이들은 신발을 싣고 가던 그 수로 옆을 뛰어다니고, 노인들은 그 아이들을 보며 길가 아무 데나 의자에 앉아 있다. 그들은 모두 이란영화의 주인공들이다. 그 현실인지 영화 속인지 알 길 없는 풍경과 사람들을 스치며, 나 역시 영화 속 주인공 노릇을 한다. 공책을 전해주기 위해 친구를 찾아 이집 저집을 돌아다니던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의 소년처럼 애타게 이란 영화감독들의 집을 찾아 방문한다. 스물세 번째로 열린 파지르영화제와 알리 악바르 사데기, 마지드 마지디, 타흐미네 밀라니, 멜더드 오스구이, 바흐람 베이자이, 파흐란 메흐란파르, 그리고 압바스 키아로스타미까지 그들을 찾아 나선다. 이것은 이란(테헤란)에 대한 기행이자, 이란영화의 집을 찾아가는 방문기다.
이란영화의 뿌리, 페르시아 문화
서울을 떠나오기 전 이란쪽 코디네이터가 신신당부한 것은 두 가지였다. 첫 번째, 도색잡지를 갖고 오지 말 것. 이건 안 가지고 다닌 지 너무 오래되었으므로 걱정할 일이 아니다. 그러나 두 번째, 술은 절대 금지. 이란은 이슬람 국가다. 이 점을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이란에서 술이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의외로 적다. 여하간 이미 들어온 이상 이곳의 법을 지키지 않고서는 반가운 방문길이 되기는 힘들다. 혹은 술이 없어도 다른 생소한 즐거움들이 있으니 괜찮다. 가정집을 방문할 때마다, 또는 음식점을 찾을 때마다 어김없이 미리 내오는 홍차와 각설탕에 목을 축이는 법을 배운다. 아침저녁으로 돼지고기를 건너뛰고 케밥과 요거트가 곁들여진 소고기와 양고기로 식사하는 것에 익숙해진다. 정 무엇엔가 취하고 싶을 때는 식사 뒤 식당에 앉아 술 대신 물 담배를 피운다. 길쭉하게 나와 있는 호수를 입에 대고 힘차게 빨아들이면, 긴 호리병 같은 곳 안에 있는 물이 보글거리면서 목 안으로 연기가 들어온다. 수소를 마시는 기분이 이런 것이리라.
그렇게 식당을 나와 돈을 낼 때쯤 되어서야 이방인은 잠시 진땀을 흘린다. 이란의 정식 화폐 단위는 리얄이다. 1달러에 8800리얄 정도 된다고 한다. 가령 일인당 먹을 만한 식사 한끼가 10달러라고 하니, 8만8천리얄이다. 극장마다 차이가 있지만 1만5천리얄에서 2만5천리얄 사이가 일반의 극장료다. 말하자면 대여섯명의 식사비를 내거나, 극장비를 내기 위해서는 십만 단위를 족히 세야만 한다. 그게 만만한 숫자가 아니다. 그래서 생긴 것이 리얄 대신 토만으로 단위 하나를 낮춰 부르는 것이라고 하는데, 숫자에 약한 이방인은 그래도 머리가 복잡하기만 하다. 카드로 계산을 하겠다고 우길 수도 없다. 여기는 지정된 몇개의 카드 외에는 사용을 할 수 없다. 카드로 인한 수수료 또는 이익금이 미국쪽으로 흘러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라고 현지인이 일러준다.
이제 생활문화를 떠나 예술문화 속에서 한 가지 유의할 점. 이란의 문화를 여타 이슬람 아랍국가들의 문화와 동일시하는 것은 큰 오해다. 이란은 이슬람 중에서도 페르시아 이슬람권 국가에 속하며, 아랍어가 아닌 페르시아어를 쓴다. 누레딘 자린 켈크와 함께 이란 애니메이션의 선구자로 알려져 있는 알리 악바르 사데기를 만났을 때 그가 누차 강조한 것은 그런 점들이었다. 그는 화가이자 애니메이터였다. ‘였다’고 말하는 이유는 이미 27년 전 영화를 그만두고 지금은 회화작업에 몰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페르시아의 수도 유적지 페르세폴리스를 대표적인 예로 들며, 이란의 예술이 페르시아 문화의 적자임을 강조한다. 다른 아랍권 문화와 차이가 있음을 강조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그래서 그의 애니메이션과 미술 작품들은 대개 페르시아 전설과 민담을 소재로 한 것들이다. 그의 집이자 전시장에 걸려 있는 페르시아 건국 신화에 등장하는 영웅 로스탐에 대한 그림이 그렇고, 부산에서 상영한 바 있는 애니메이션 <꽃 폭풍> <루크> 등이 그렇다. “내 애니메이션과 그림은 철저히 이란적”이라고 그는 강조하는데, 그 이란적이라는 말은 곧 페르시아적이라는 말이기도 한 것이다.
떠나는 우리에게 그는 갑자기 추억에 젖은 사진 한장을 보여준다. 38년 전 카눈(Kanun: 어린이와 청소년 지능개발연구소) 시절에 친구들과 함께 페르세폴리스에 놀러가서 찍은 거라는 그 사진 안에는 놀랍게도 알리 악바르 사데기 말고도, 젊은 시절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모습이 담겨 있다. 이건 마치 이란영화의 유적지를 보는 듯한 신기한 느낌이다.
영화와 혁명, 파지르국제영화제
도심 곳곳에서 이란의 정치지도자들, 즉 이슬람 혁명을 이끈 호메이니, 현재 최고 종교 지도자 하메이니, 대통령 하타미의 그림과 사진을 본다. 1979년 그 유명한 호메이니는 샤 왕조를 무너뜨리고 이슬람 혁명을 일으켜 이란을 이슬람 공화국으로 재건했다. 호메이니의 이슬람 혁명 추종자 중 한명이었던 개혁파 하타미는 1997년 대선에서 선출되어 올해 5월 새 대통령 마무드 아흐마디네자드가 선출되기 직전까지 대통령직에 있었다. 그리고 하메이니는 대통령과 권력을 양분해 갖고 있는 현재 최고 종교 지도자다. 웬 한물간 정치 이야기가 아니다. 올해 23회째를 맞는 파지르국제영화제는 바로 그 이란 현대사가 잉태한 행사다. ‘승리’라는 뜻의 파지르(Fajr)는 호메이니의 이슬람 혁명 성공을 가리키는 말이며, 그것을 기념하는 뜻으로 시작되었다. 하타미는 1982년부터 몇년간 이란 문화지도부 장관을 지낸 사람이었고, 이 영화제를 주최하는 파라비 영화재단은 하타미가 장관으로 부임한 다음해인 1983년 그의 영향력하에서 출범한 국영 영화사다.
이슬람 혁명 당시 시위대는 샤 왕조의 부패와 허위를 타파한다는 명목 아래 수많은 극장을 불태웠다. 테헤란 안에서만 25%의 극장이 불타 없어졌다. 혁명 직후 이란영화는 최악이었다. 연간 4편에서 5편의 제작에 그치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국영 파라비 영화재단의 설립 등 정부의 개입으로 영화는 다시 활성화됐고, 80년대 40편 내지 50편, 90년대가 넘으면 50여편에 이르고, 2000년대 초에는 60∼70편까지 올라간다. 2004년에는 83편이 제작되었다. 이로써 알 수 있는 것이지만, 이란영화의 역사에서 이슬람 세계관과 그 당위, 혁명과 그뒤 정부의 역할은 엄청난 영향력을 끼친다.
23회째를 맞은 파지르영화제는 올해도 외국 초청작 외에 많은 이란영화들이 출품되었다. <천국의 아이들>로 한국에 잘 알려져 있는 마지드 마지디의 신작 <버드나무 사랑>, 이란의 정치적인 여성감독으로 유명한 타흐미네 밀라니의 <주변부 여인>, 그녀에 버금가는 여성감독 락샨 바니 에테메드가 모흐센 압돌바합과 공동 연출한 <길라네> 등이 영화제를 수놓았다. 영화관계자들이 모여서 영화를 보는 곳 중 하나인 사하르극장은 좀 휑하다. 슬쩍 안을 들여다보니 이란영화 한편이 상영 중이다. 내부시설이나 극장의 크기나 한국의 옛 대형관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극장 내부를 촬영해서는 안 된다고 엄포를 놓는다. 썰렁한 사하르극장을 지나 일반관객이 관람하는 팔레스틴극장 앞에 오자 드디어 축제 기분이 좀 난다. 다음 영화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다. 나이 많은 관객보다는 대개 젊은 관객으로 가득하다. 그중에 영화 보러 온 젊은 대학생들을 붙잡고 말을 붙인다. 어떤 영화들을 좋아하냐고 물었더니 “로맨스나 멜로물, 코미디물을 좋아한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지금도 그런 걸 보러 왔다”고 한다. 혹시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나 모흐센 마흐말바프 같은 감독의 영화들은 어떠냐고 했더니 가차없이 “별로 관심없다”는 반응이다.
이란을 대표하는 감독 모흐센 마흐말바프는 이란영화를 상업영화, 프로파간다영화, 예술영화로 나눈 적이 있다. 이 범주는 대개 맞다. 이란의 상당수 많은 작품들은 상업적인 전투영화이거나, 로맨스영화, 코미디영화다. 대개 그것은 해외영화제를 겨냥한 것이라기보다는 자국 관객의 수용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다. 생각해보니 테헤란으로 올 때 이란 항공에서 보여준 영화도 <행운의 신부>라는 코미디영화였다. 이란영화는 외부에서 인식하는 것처럼 키아로스타미나 마흐말바프 같은 국제영화제를 통해 유명해진 예술작품들만 양산되는 곳은 아니다. 팔레스틴극장, 영화를 보기 위해 늘어선 인파 속에서 한국이나 이란이나 영화가 대중과 접점을 찾는다는 건 어디에서나 숙제라는 생각을 떠안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