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나이트 플라이트>와 웨스 크레이븐 [1]
2005-09-07
글 : 김도훈
호러의 장인, 미국의 악몽을 그리다

웨스 크레이븐의 신작 <나이트 플라이트>가 순조로운 비행을 시작했다. 첫 주말 개봉성적 1650만달러. 미국 박스오피스 2위. 장거리 순항을 예측하기에는 아직 이른 시기일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3500만달러를 첫 주말에 벌어들였던 <스크림2>와 <스크림3>의 성공이 <스크림>이라는 기념비적인 작품의 속편들이었고, 올해 초 개봉한 <커스드>가 비참할 정도의 흥행성적을 거둔 것을 염두에 둔다면, <나이트 플라이트>의 비상은 웨스 크레이븐이 맛보는 오랜만의 성공이라 할 만하다.

<나이트 플라이트>는 ‘호러영화의 대가’ 웨스 크레이븐의 이름을 찬찬히 음미하도록 만드는 작품이다. 영화사상 가장 기분 나쁜 영화 중 하나로 회자되는 <왼편 마지막 집>(1972) 이후, 웨스 크레이븐은 <나이트 메어> 시리즈로 현대 슬래셔영화를 정의내렸고, <뉴 나이트메어>와 <스크림> 시리즈를 통해서는 장르 자체에 대한 성찰을 시도하며 끊임없이 전진해왔다. <나이트 플라이트>는 그가 서스펜스를 창출하는 기술에 있어서 동세대 최고의 위치에 오른 장인임을 증명하는 동시에, <스크림>의 자장을 성공적으로 벗어버리는 재기작이다. 9월9일 개봉을 앞둔 신작 <나이트 플라이트>를 미리 짚어보고, 친절한 웨스 크레이븐과의 인터뷰를 싣는다.

스.릴.러

붉은 눈을 가진 악마가 나오는 웨스 크레이븐의 초자연적 호러영화.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착각했던 것도 무리는 아니다. 영화의 원제인 ‘레드 아이’(Red Eye)는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비행기를 탄다는 연유로 ‘야간 비행’이라는 뜻을 지닌 구어지만, 영화의 트레일러는 붉은빛을 번득이는 킬리언 머피의 눈동자를 클로즈업하면서 끝이 난다. 비행기 날개를 갉아먹는 괴물을 목격한 남자에 대한 <트왈라이트 존>의 한 에피소드, 혹은 죽은 엔지니어의 유령이 비행기에 출몰한다는 내용의 컬트영화 <401번가의 유령>(The Ghost of Flight 401)은 어떤가. 밖으로 나갈 수 없는 비행기에 초자연적인 존재가 동승한다는 아이디어는 소름끼친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웨스 크레이븐의 신작에는 붉은 눈의 악마가 없다.

웨스 크레이븐이 불길한 야간 비행에 밀어넣는 것은 호텔리어 리사 리서트다. 아름다운 리서트는 마이애미 호텔에서 일하는 호텔리어. 그에게 잭슨 리프너라는 기묘하게 푸른 눈동자의 남자가 다가온다. <나이트 플라이트>의 전반부는 공항 대기실에서 꽃핀 로맨스영화처럼 보인다. 물론 눈치빠른 장르팬들은 이미 잭 리프너라는 이름에서 전설적인 살인마 ‘잭 더 리퍼’를 떠올렸을 것이다. 잭 리프너는 리서트의 옆자리에 앉자마자 악마로 돌변한다. 그가 요구하는 것은 VIP 예약담당자인 리서트가 호텔에 전화를 걸어 국토방위부 차관의 객실을 바꾸는 것. 바뀐 객실에는 분명히 음모가 도사리고 있을 것이다. 게다가 리서트가 객실을 바꾸지 않으면 집에 머무르고 있는 그녀의 아버지는 잠복 중인 암살자에게 난도질을 당할 참이다. 3만 피트 상공. 빠져나갈 곳도, 빠져나갈 방법도 없다.

술.래.잡.기.

<나이트 플라이트>는 한정된 공간 속에서 벌어지는 술래잡기(Cat and Mouse)의 순수한 쾌감을 과시하는 스릴러다. 형식적으로 <나이트 플라이트>는 간결하게 구분되는 3개의 막으로 구성되어 있다. 1막에서는 리서트와 리프너가 만나 로맨스와 음모가 각자에게 시작된다. 영화의 중심축이기도 한 2막에서는 리프너의 음모가 밝혀지고 리서트는 선택의 기로에 선다. 관객이 기대했던 <나이트 플라이트>는 딱 2막까지일 것이다. 비행기가 땅에 바퀴를 내리면서는 3막이 시작된다. 리서트는 리프너에게서 도망쳐나와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집으로 차를 몬다. <스크림> 속 십대 살인마들의 행동이 살인인형들의 ‘마임’(Mime)에 가까웠던 것에 비해, 리프너는 명백한 목적의식을 가진 인간이고 냉철한 테러리스트다. 웨스 크레이븐의 영화에서는 처음으로 만나는 이성적인 살인마다. 그런데 영화의 마지막 장에 도달하면서 리프너는 점차 <스크림>의 살인인형이 되어가고, 무대가 전형적인 미국 이층 가옥으로 옮겨가면서 영화 또한 <스크림>에 가까워진다. 2막이 심리적인 술래잡기였다면 가옥에서 벌어지는 3막은 육체적인 술래잡기다. <스크림>의 술래잡기 장면들처럼 그는 집안 곳곳의 공간을 도구 삼아 서스펜스의 곡예를 벌인다. “이층에서의 추격장면을 보면 알 수 있겠지만, 나는 커튼을 통해서 희미하게 바깥이 보이는 부분에 카메라를 설치했다. 관객은 리프너가 커튼 밖으로 곧 튀어나올 거라 믿는다. 보통의 호러영화가 보여주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리서트가 커튼을 휙 젖혔을 때 안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관객은, 내가 리프너보다 똑똑하지는 않구나 하고 생각한다.” 웨스 크레이븐은 관객을 놀리면서 그들과 게임을 한다. 하지만 그는 관객 위에 오만하게 군림하지 않는다. “크레이븐이 ‘놀래!’라고 하는 장면에서 모두가 놀란다. 그리고는 그렇게 쉽게 넘어간 것 때문에 모두가 웃게 된다. 하지만 중요한 건 이거다. 크레이븐은 우리를 향해 웃지 않고 우리와 함께 웃는다.”(www.salon.com)

B.급.영.화.

에인트 잇 쿨 뉴스닷컴(www.aintitcoolnews.com)의 친구들은 <나이트 플라이트>를 ‘<패닉 룸>이 스스로 되고 싶었던 영화’, 풀어서 해석하자면 “데이비드 핀처가 <패닉 룸>으로 만들어내고 싶었던 영화’라고 평했다. 이 짧은 문장은 음미해볼 만하다. <패닉 룸>과 <나이트 플라이트>가 공히 원했던 것은 히치콕적인 서스펜스다. 갇힌 공간에서 최대한의 긴장감이 넘치는 드라마를 조리하는 것이다. 다만, 다리우스 콘지와 콘래드 W. 홀의 우아한 촬영과 미끄러질 듯한 프로덕션디자인으로 완성된 <패닉 룸>은 냉장고에 가득 찬 에비앙 생수병마저 계산해서 배치한 듯하다. 그런 스타일의 향연은 실재해야만 하는 서스펜스의 발목을 가끔 붙잡기도 한다. 웨스 크레이븐은 서스펜스를 구축하는 데 방해가 될 만한 곁가지들을 모두 쳐낸다. 당대의 스타일리스트가 아닌, 웨스 앤더슨의 단짝 로버트 여먼(<로얄 테넌바움> <빌 머레이의 맥스군 사랑에 빠지다>)이 잔재주 없이 찍어낸 <나이트 플라이트>의 세계는, 엘름가나 우즈버로 마을의 외양과 마찬가지로 현실에 발을 딛고 있다. 그렇게 평균적인 세상의 광경이 살짝 허물어지는 순간, 인간은 미쳐버린다. 인간에게 견고하게 디자인된 패닉 룸은 없으며, 매일매일이 3만 피트 상공을 날아가는 비행과도 같다. 웨스 크레이븐은 진짜 공포와 서스펜스는 언제나 일상적인 인간의 삶에서 기인한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미술은 최소화할수록 좋고, 공간은 평범할수록 좋다. “나는 작은방에 앉아 있는 그저 보편적인 감독일 뿐이다. (웃음) 그래서 나는 성인으로서 나를 흥미롭게 만들 만한 무언가를 하고 싶을 따름이다. 영화의 포장은 그와 별 상관이 없다.”

비.행.기

<나이트 플라이트>의 무대가 비행기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민간 항공의 대중화 시대가 열리자 항공 재난의 시대도 함께 열렸고, <에어포트>(1970) 시리즈는 새로운 시대의 개막을 틈타 공포의 범위를 3만 피트 상공으로 높여놓았다. 그리고 9·11이 발생하자 테러리스트의 납치와 기상악화로 인한 추락의 공포는 광증으로 번져나갔다. 사람들은 더이상 옆자리의 승객을 여행의 동반자로만 여기지 않는다. 라이터, 눈썹가위, 손톱깎이가 치명적인 테러의 도구가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시대다. “나는 9·11을 자인하고, 그날 이후로 우리의 삶이 얼마나 변했는지를 보여주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당신의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믿음이 어떤 것이건 간에, 9·11은 죄없는 사람들도 희생될 수 있고, 그들이 순수함과 결백함을 잃어버리지 않는 것 또한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그것이 바로 9·11의 한 단편이다.” 웨스 크레이븐은 스스로의 영화에 정치적인 자의식을 심어온 작가다. 그는 살해당한 딸의 살인범을 처단하는 부모의 복수극인 <분노의 13일>(The Last House on the Left, 1975)을 “베트남전에 대한 혐오감 속에서” 만들었고, <공포의 휴가길>(The Hills Have Eyes, 1977)에서는 죽은 엄마의 시체를 도구로 살인마를 유인하는 청년들을 등장시키며 “부모세대를 극복하려는 청년문화”라고 설명했다. 미디어 비판(<영혼의 목걸이> <스크림>), 인종, 종교와 빈부문제(<공포의 계단> <악령의 관>)에 이르기까지, 끈질기게 장르영화의 정치학을 믿어온 웨스 크레이븐은 관객에게 질문을 던진다. “나는 이 영화가 매우 무서운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당신은, 당신 자신을 악마에게 팔지 않고서도 악마와 싸울 수 있는가?” <나이트 플라이트>는 9·11에 대해 미국이 자신을 악마에게 팔지 않고서도 악마와 싸울 수 있냐고 묻는 웨스 크레이븐의 물음이다.

웨.스.크.레.이.븐

웨스 크레이븐에게 지난 5년은 그리 행복한 시기가 아니었다. 본격적인 드라마 <뮤직 오브 하트>(1999)는 별다른 반향을 얻지 못했고, <스크림3>(2000)는 삼부작의 김빠진 결말이었다. 데뷔소설 <파운틴 소사이어티>(Fountain Society)의 영화화는 좌절되었고, 구로사와 기요시의 걸작 <회로>(2001)의 리메이크는 100일 촬영 뒤 무산되었다. 대신 손에 들어온 것은 <스크림>의 케빈 윌리엄슨이 각본을 맡은 늑대인간 영화 <커스드>였다. 하지만 제작사는 완성돼 나온 “(웨스 크레이븐의 말에 따르자면) 귀엽고 작은 호러영화”를 좋아하지 않았다. 결국 크레이븐은 대부분의 장면들을 다시 찍어야 했고, 영화는 완성과 개봉까지 2년이 넘는 세월을 집어삼켰다. 비평은 혹독했고 흥행성적은 볼품없었다. 그의 커리어는 꼼짝없이 저주받은(Cursed) 상태에 이르렀다. “사람들은 종종 저주와 맞닥뜨린다. 그것이 당신을 괴물로 만드는가, 아니면 어떻게든 분노를 누그러뜨릴 수 있는가. 혹은 그냥 받아들이고 다른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가.” 그는 저주를 받아들였고, 공장에서 뽑은 듯한 공산품 각본을 들고 <나이트 플라이트>를 만들었다. “나는 오랫동안 호러영화 감독으로만 여겨져왔다. 심리학적 복잡성이 들어 있는 명백한 스릴러영화를 만들어 관객을 대할 수 있다는 것, 관객을 새로운 나의 영역으로 데려갈 수 있다는 것은, 지금의 나에게 진심으로 중요한 일이다.” 그는 <나이트 플라이트>를 통해 9·11 이후 미국의 공포를 형상화하는 동시에, 능숙하게 서스펜스를 조리하며 호러의 거장으로 불렸던 웨스 크레이븐 자신의 이름을 다시 쓴다. <나이트 플라이트>는 야심없이 작고 날씬한 공산품인 동시에 지적으로 세공된 장인의 공예품이다. 66살의 웨스 크레이븐은 아직도 멈추지 않았다.

저주받은 신작 <커스드>(2005)

늑대인간이 된 남매 이야기

“만들지 말아야 했던 영화다. 형편없는 대본에도 불구하고 달려들었지만, 결과적으로는 2년간의 지옥뿐이었다.” - 웨스 크레이븐

토크쇼 작가인 엘리(크리스티나 리치)와 남동생 지미(제시 아이젠버그)는 늦은 밤 귀가 도중 교통사고를 당한다. 두 사람은 전복된 상대방 운전사를 구조하는 과정에서 괴물한테 습격당해 상처를 입고, 그 이후로 두 사람의 몸에는 변화가 일어난다. 갑자기 성적인 매력이 늘어나고, 냄새에 민감해지고, 운동신경이 발달한다. 지미는 인터넷 웹사이트를 통해 자신들을 공격한 것이 늑대인간이며 그들 역시 전염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를 믿지 않던 엘리조차 자신의 몸이 점점 피를 갈구하는 것을 느끼기 시작한다.

케빈 윌리엄슨과 웨스 크레이븐이 다시 만난 <커스드>는 <틴 울프> <런던의 늑대인간> <진저 스냅> 등의 늑대인간 영화들에 대한 장르적 성찰을 기대하게 했다. 하지만 제작사의 간섭하에 여러 번의 재고를 거친 케빈 윌리엄슨의 각본은 극적 구성이 허약하고, 그런 연유로 <스크림>식의 장르적 농담들도 거의 빛을 발하지 못한다. PG-13등급의 제약에 묶여 본격적인 호러장치와 고어장면은 그저 유순한 수준. 두 사람의 이름을 머릿속에서 지우고 본다면 <커스드>는 꽤 즐길 만한 구석이 있는 소품이긴 하나, 제작사의 재촬영 요구가 있기 전에 완성되었다는 초기 버전이 여러모로 궁금해질 따름이다. <커스드>의 DVD는 지난 7월8일 한국에서 정식으로 출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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