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의 영화 베스트 - 감독·프로듀서·배우 부문
감독/ 이명세
99년은 80년대 말 한국영화의 수평선에 새 물결을 일으켰던 세 기수 박광수, 이명세, 장선우가 ‘여행’에서 돌아온 해였다. 그리고 셋 중 가장 행복한 귀환의 주인공은 스타일리스트 이명세였다. 복귀작 <인정사정 볼 것 없다>에서 그는 장르부터 음악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이명세 상’을 부수는 전략을 통해 더욱 철저히 이명세다워지는 길을 택했다. 전작들에서 동화의 나라를 외로이 유영하는 것처럼 보였던 그의 카메라는 짐승처럼 쫓고 쫓기는 거친 사내들의 세계에서 뜻밖의 안착지를 찾았다. 하나의 사물을 정확히 표현하는 이미지는 단 하나라고 믿는 순결주의자의 집요한 시선은, 추적자와 도망자의 타오르는 집념과 절묘하게 어울렸다. 관객도 ‘광장’으로 나온 그의 장인정신에 따뜻하게 화답했다. 이명세 감독이 세기 끄트머리에서 맞이한 ‘쨍하고 해뜰 날’은 99년 한국영화의 가장 빛나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의 차기작 후보는 오랫동안 구상한 <가족>, 또는 군 생활을 그린 영화 <영자야 내 동생아>이다.
장진과 정지우, 김태용·민규동에게 각 1표씩을 제외한 나머지 응답 위원 모두가 이명세를 올해의 감독으로 꼽았다.
프로듀서/ 차승재
차승재 대표에게 올해는 행복과 고민이 엇갈렸다. 올 초에 <태양은 없다>를, 여름에 <유령>을 내놓으며 생각있는 흥행작 프로듀서로서의 명성을 이어갔고, 크고 작은 영화 네편을 동시 진행하며 우노를 감독·스탭들이 가장 일하고 싶은 영화사로 만들었다. 각종 매체에서 한국의 대표적 프로듀서로 꼽히는 개인적 영광도 안았다. 그러나 5년 전부터 꿈꿔오던 야심작 <유령>의 흥행 성과는 기대에 못 미쳤다. 서울관객 100만까지 노렸으나 40만을 밑돌고 말았던 것. 관객수 자체보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와 배급 싸움에서 밀린 결과라는 점이 뼈아팠다. 우려섞인 시선에도 불구하고, 시네마서비스와 협력을 강화한 건 이 때문. 새해에도 영화 제작 일정은 어느 영화사보다 빽빽하게 잡아두고 있다. 당장 1월에 <행복한 장의사>를 개봉하고 새해중에 서너편을 더 개봉하겠다는 계획. 그중 김성수 감독의 <무사>는 오래 생각해온 야심작.
경합이 가장 치열했던 부문으로 <여고괴담…>을 만든 오기민 프로듀서를 1표차로 제치고 2연패에 성공했다.
시나리오/ 장진
데뷔작 <기막힌 사내들>에서 이미 그의 소질이 입증된 바 있지만 <간첩 리철진>은 이야기꾼 장진의 진수를 여지없이 보여준다. 일찍이 연극무대에서 희곡으로 연마한 듯한 상황 설정, 캐릭터 구축, 대사 등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반복과 과장, 역설과 돌발 등 코미디의 기본문법을 자유자재로 넘나들지만 목소리 높여 주장하지 않는 것도 <간첩 리철진>의, 장진의 장점이다. 자칫 이런 재간꾼들이 범하기 쉬운 오류를 잡아 묶는 법도 통달하고 있는 듯 이야기는 발을 땅에 단단히 붙이고 있다. 따라서 분단, 체제, 이데올로기 등 골치 아픈 주제가 거슬리게 등장할 법하지만 그는 지리멸렬한 등장 인물들의 삶을 현실적인 문제로 끌어낸다. ‘적’이 불분명한 시대와 싸우는 법을 직관적으로 간파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감정을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대신 상황을 비틀고 엉뚱한 것과 얽어매 관객의 뒤통수를 치는 ‘유희정신’은 장진식 리얼리즘의 방법이 된다. ‘코미디의 미덕인 사회적인 관습을 전복하는 유머 포인트를 잡아내는 뛰어난 솜씨’(유지나)가 단연 높은 평가를 받았다.
<해피엔드>를 쓴 정지우와 <세기말>의 송능한이 각 2표, <인정사정…>과 <여고괴담…> 시나리오가 각 1표씩 얻었으며, 응답자 중 나머지는 모두 장진 감독의 <간첩 리철진>을 꼽았다.
촬영/ 홍경표
빛과 색에 대한 감각, 실험성과 창의성이 돋보이는 촬영으로 데뷔작 <하우등>부터 주목받은 홍경표가, <유령>으로 올해의 촬영감독에 선정됐다. 홍경표 자신의 욕심처럼 <유령>은 한국영화의 기술적 퀄리티를 한 단계 높여놓은 작품으로 평가된다. 영화내용을 적절한 기법과 형식에 담아내야 한다는 촬영의 핵심에 다가갔음은 물론이다. 음울한 분위기와 배역의 캐릭터를 강렬하게 뽑아낸 데는, 빛을 효과적으로 사용하고 영화내용과 조화를 이룬 홍경표의 촬영의 공이 크다. 25분 가량의 바닷속 장면에 스모그를 이용한 드라이 포 웨트 기법을 국내 최초로 구사한 점도 평가할 만하다. “만화적인 느낌을 살리기 위해 인공조명과 화려한 색채로 리듬감을 살리는 데 주력했다”는 것이 <유령> 촬영의 또다른 포인트. 시나리오를 해석하고 영상으로 변환하는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이, 홍경표에 대한 충무로의 중평이다. <하우등> <처녀들의 저녁식사>의 카메라를 잡은 바 있는 그는, 최근 김지운 감독의 <반칙왕> 촬영을 마쳤다.
<인정사정…>의 정광석·송행기 3표, <해피엔드>의 김우형, <이재수의 난> <태양은 없다>의 김형구,<텔미썸딩>의 김성복이 각 2표씩 받았으며, 홍경표를 추천한 응답자 중 한 사람은 <하우등>을 해당작으로 지목했으며 나머지는 모두 <유령>.
남자배우/ 최민식
영화 밖에서의 최민식에겐 아직도 <서울의 달>의 춘섭이 보인다. 빠르지만 약간 어눌한 말투, 남부럽지 않은 스타인데도 왠지 수줍어하는 태도가 그렇다. 최민식에게 1999년은 두말할 것 없는 연기인생 최고의 해였다. 초특급 히트작 <쉬리>의 세 주인공 중 하나였던데다, 연기의 중량에선 모든 출연진 중에서 독보적이었고 대종상 남우주연상 등 숱한 상도 휩쓸었다. 그리고 해를 넘기기 직전에 개봉된 <해피엔드>에선 무기력하면서도 내면이 섬세한 가장 역을 열연해 또 한번의 호평을 받았다. <서울의 달>의 춘섭에서 <넘버.3>의 검사, <조용한 가족>의 삼촌을 거쳐, <쉬리>의 북한 특공대장까지 최민식은 아주 느리게 정상에 올랐다. 그리고 쉽게 정상에서 내려가지 않을 것 같다. 열거된 작품 모두에서 최상급의 연기를 보여줬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폭이 동시대 어떤 배우들보다 넓다는 점에서 그렇다.
감독 부문 못지 않게 압도적으로 최민식을 추천했다. 박중훈 2표, 이정재와 정우성이 각 1표씩 받았다. 최민식을 꼽은 사람 중 2명은 <쉬리>를, 4명은 <해피엔드>를 따로 지목했고 나머지는 두편 모두를 해당작으로 썼다.
여배우/ 전도연
심은하, 고소영, 전도연. 올해 벽두 장차 한국영화계를 이끌어 갈 여배우 트로이카로 주목받았던 세 사람 가운데, 99년 말 현재 선두를 달리는 주자는 전도연이다. 나머지 두 배우가 출연작의 허약함, 또는 자기 안에 갇힌 듯한 연기로 주춤하는 동안, 전도연은 두 가지 함정을 모두 피해가는 총명함을 보였다. 올해 전도연은 <내 마음의 풍금>과 <해피엔드>에서 맨 얼굴과 맨 몸으로 열일곱 소녀의 첫사랑과 가정 주부의 치명적인 마지막 사랑을 열연해, 한편의 영화를 짊어질 수 있는 배우로 성장했다. 유난히 남의 감정에 잘 전염되는 성격의 소유자로서 인물을 이해하는 직관력이 뛰어나는 평을 듣는 그에게, 선정위원들은 “캐릭터에 성실한 연기의 미덕이 무엇인지 보여줬다”(김영진), “내면이 있는 여성 캐릭터의 완성”(유지나) 등의 칭찬을 선사했다. 아직 더 다듬어져야 할 그릇인 전도연이 <마요네즈>의 ‘고수’ 김혜자를 2위로 제친 배경에는 한국영화의 귀한 보유 자산으로 남아 달라는 기대가 깔려 있는 듯하다.
김혜자 6표, 박진희와 이재은이 각 1표씩 받았으며, 전도연을 지목한 표 중 2표는 <내 마음의 풍금>을, 3표는 <해피엔드>를, 나머지는 두편을 모두 해당작이라고 응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