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린쿼터 내줘야 하나?
한국영화 점유율 40% 육박
12월22일 현재 한국영화의 시장 점유율은 36.7%. 문화부와 영화진흥위원회 영화정책연구원이 잠정 집계한 수치다. 한국영화는 지금 “이러다간 ‘우리 스스로 스크린쿼터를 내줘야 할지 모른다’는 말을 그냥 웃어넘겨버릴 수 없는 심각한 상황이 올지 모른다”는 행복한 고민에 빠지게 됐다. 그동안 정부는 물론 영화인들도 한국영화의 시장점유율이 40%가 될 때까지 스크린쿼터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는데, 올해 점유율이 40%에 육박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40%를 넘지 않을 것으로 보이지만 기록적인 성장임은 분명하다. 지난 9월 말 35.3%에 비해서도 1.4% 늘었다. 정확한 통계가 아니라 오차가 생길 수도 있지만 이런 추세라면 연말까지 최종 점유율은 35∼39% 정도로 추정된다. 그동안 한국영화는 점유율이 93년 15.9%에서 94년 20.5%, 95년 20.9%, 96년 23.1%, 97년 25.5%로 꾸준히 늘었으며 98년에는 구제금융체제 아래서도 25.1%를 기록해 ‘저력’을 입증했다. 98년 일본 30.2%, 프랑스 27.4%, 영국 14.1%, 독일 9.5%, 오스트레일리아 4.1% 등 외국 주요 나라의 자국영화 점유율과 비교하면 그 의미는 더욱 뚜렷해진다. <쉬리>의 기록적인 흥행이 점유율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한 점은 감안해야겠지만 당분간 올해 추세는 유지될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영화후진위원회?
영진위 파동
영화진흥위원회(영진위)의 출범과 구성을 둘러싼 공방은 올해 한국영화계의 가장 뜨거운 뉴스거리였다. 1월 초 개정된 영화진흥법에 따라 옛 영화진흥공사를 자율적인 민간기구격인 영진위로 개편한 것은 문화관련 부문의 대표적인 개혁정책으로 기대를 모았다. 5월28일 문화부는 신세길, 문성근, 임권택, 정지영, 안정숙, 조희문, 채윤경, 김우광, 김지미, 윤일봉씨 등 10명을 위원으로 위촉했고, 위원들은 위원장에 신세길, 부위원장으로 문성근씨를 뽑았다. 하지만 김지미, 윤일봉씨 두 사람은 위원직을 수락한 적이 없다며 영진위 구성에 법적 하자가 있다고 주장하고 나서 갓 출범한 영진위의 발목을 잡았다. 문화부가 내놓은 수습안은 위원장과 부위원장 사퇴를 전제로 김지미, 윤일봉씨가 참여한다는 것. 결국 신세길 위원장은 위원직마저 내놓았고 문화부가 요구한 ‘절차’에 따라 옛 문공부 관료 출신 박종국 위원장, 조희문 부위원장 체제로 개편됐다. 영진위의 개혁성에 의문을 제기하며 10월5일 정지영, 문성근, 안정숙씨 등이 사퇴했고, 문화부는 적극적으로 수습에 나서지 않아 영진위의 파행을 방조한다는 비난을 받았다. 12월22일 박종국 위원장마저 사퇴해 전면적인 재구성이 절실해졌다.
영화계 구조조정
대기업 철수, 금융자본 오다
IMF와 기업들의 대대적인 구조조정 여파는 대기업의 영화사업 철수로 이어졌다. 영화사업에 매력을 잃어가던 대기업들은 울고 싶은 참에 뺨 맞은 격으로 서슴없이 발을 뺐다. 삼성영상사업단은 해체됐고, 대우는 극장을 처분하고 ‘남’이 아니었던 비디오 제작사 세음미디어에 뒤처리를 넘겼으며 현대, SK 등의 영화 사업은 사실상 소멸 상태다. 반면 한때 주춤했던 제일제당이 종합엔터테인먼트그룹을 지향하며 재기에 나섰고, 동양그룹이 극장과 케이블 TV사업 위주로 뛰어들었다. 대기업이 빠져나간 자리는 기다렸다는 듯이 창업투자사 등 금융자본이 재빠르게 채웠다. 선발주자 일신창투, 자본시장의 루키로 떠오른 미래에셋, 국민기술금융, 산은캐피탈 등과 삼부파이낸스가 대기업 대체 자본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합법적인’ 창투사와는 다른 자본으로 덩치를 불려왔던 삼부는 양재혁 회장이 횡령 등의 혐의로 구속되면서 퇴장했으며, 일신창투를 정상에 올려놓은 ‘파워맨’ 김승범도 일신의 그늘을 벗어나 독립을 준비하고 있어 귀추가 주목된다. 한편 미래도 <거짓말>이 묶이고, <세기말> 흥행 실패 등으로 심기가 편치 않은 처지다. <박하사탕>에 투자한 유니코리아와 같은 피를 가진 드림벤처캐피털이 기대를 모으고 있으며, 계획이 틀어지긴 했지만 무한창투도 아직은 가시권에 들어 있다.
큰 게 좋다
한국형 블록버스터 바람
지난해 칸영화제에서 국내 언론들은 황금종려상보다 <용가리>에 더 많은 관심을 보였다. 포스터와 기획안만으로 272만달러에 이르는 사전판매 계약을 체결했다는 심형래의 주장은 그럴듯한 뉴스거리였으며 정부까지 나서 심형래를 IMF를 극복하고 새 천년을 열어갈 ‘신지식인 1호’라고 추어올렸다. 정부는 요로를 통해 직간접적으로 <용가리>를 성원해 마치 국책사업이라도 되는 듯 오해될 정도였다. 심형래는 어렵지 않게 100억원의 제작비를 모았고, 잇따라 해외판매 실적을 과시했다. 그러나 심형래와 <용가리>에 대해 의구심은 부풀어만 갔다. 실상 별 구속력 없는 계약 사실을 부풀려서 바람몰이를 의도한 것이라는 주장에 대해 영구무비아트쪽은 극장에 걸지도 않은 영화를 매도하는 것은 한국영화 죽이기라는 감정적인 반론을 내놓았다. 그러나 <용가리>는 실체를 드러낸 뒤 배급 및 상영과 관련해 피소까지 당하는 망신을 샀다. 서울에서 50만명을 불러모았으나 제작비가 100억원이나 든 영화치고는 낯뜨거운 수준이다. “못해서 안 하는 것이 아니라 안 하니까 못하는 것”이라는 심형래의 주문은 한바탕 해프닝의 슬로건으로 끝나고 말았다.
벼랑 끝에서 한숨 돌리다
스크린쿼터
영화인들에겐 스크린쿼터 때문에 한시도 마음을 놓지 못했던 한해였다. 지난해 11월 한-미투자협정을 맺기 위한 협상과정에서 우리 정부가 미국쪽에 스크린쿼터를 지금보다 대폭 줄이겠다는 안을 제시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영화인들은 ‘벌떼’같이 들고일어났다. 국회의원들이 정부에 현행 유지를 촉구하는 결의문을 채택하고 당시 신낙균 문화부 장관이 “2002년까지는 축소안을 논의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밝혀 수습되는 듯했다. 그러나 6월 들어 2002년 이후 단계적 축소안을 가지고 미국과 협상에 나섰으며 6월 안에 협상을 마무리짓고 7월 초 김대중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해 투자협정을 맺을 예정이라는 정부 방침이 알려지자 영화인들은 다시 거리로 나섰다. 6월16일 동숭홀, 18일 광화문 네거리에서 집회를 열고 영화인들은 삭발을 하고 명동성당에서 단식 농성을 시작했다. 이어 24일에 광화문 집회에서는 임권택 감독까지 삭발에 나서는 등 총 117명의 영화인들이 삭발하는 등 싸움의 강도를 높였다. 박지원 장관이 국회에서 현행 고수 방침을 밝히고, 대통령 방미 때 협정을 체결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천명하면서 스크린쿼터 문제는 다시 물밑으로 가라앉았다. 그러나 지난 10월6일 한덕수 통상교섭본부장이 “양쪽의 이견이 큰 스크린쿼터 문제는 이행의무 금지원칙의 대상으로 일단 정하되 예외로 인정하는 방식으로 협상이 진행되고 있다”고 말해 파문이 일기도 했다. 스크린쿼터 문제는 지난 11월30일 시애틀에서 시작된 밀레니엄라운드에서 지루한 줄다리기를 계속해야 할 판이다.??
한국영화의 표현수위는 어디인가
<거짓말> 파동
두번에 걸친 <거짓말> 등급보류 파동은 한국사회에서 가능한 표현의 수위를 가늠케 한 눈금자이며, 등급외전용관 없이는 완전등급제가 불가능함을 역설해준 사례였다. 사전 홍보를 배제한 채 촬영을 끝낸 <거짓말>은 아이러니하게도, 지난 8월 등급위가 최종적으로 등급보류 결정을 내리면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3개월 등급보류의 이유는 “미성년자와의 변태적인 성관계와 가학 행위를 여과없이 묘사해 사회 통념에 어긋난다”라는 것이었다. 개봉이 좌절되자 신씨네는 8월17일 기자와 영화평론가를 대상으로 <거짓말> 시사회를 열어 평단과 언론으로부터 폭넓은 지지를 이끌어냈다. 이어 베니스로 자리를 옮긴 <거짓말>은 바티칸이 <거짓말>에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할 정도로 격렬한 찬반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해외 평단의 호평이 등급위를 움직이지는 못했다. 지난 10월 말 등급위는 <거짓말> 재심의에서 다시 등급보류를 결정했다. 이로써 <거짓말>의 개봉은 해를 넘기게 됐는데, 영화개봉이 지연되면서 <거짓말>의 불법 비디오와 CD가 음란물처럼 유통되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국민정서를 보호하기 위해 <거짓말> 상영을 봉쇄한 등급위의 결정이 정반대로 ‘또다른 오양 비디오’의 유포를 불러온 것이다. 결국 등급위의 결정은 제작진을 짓밟고 음란비디오 유통업자를 살린, 최악의 좌충수가 돼버렸다.
젊은 영화인 한목소리
영화인회의 출범
올해 초, 스크린쿼터 지키기 싸움이 진정 국면에 접어들자 영화인들은 장기적인 전망을 가지고 힘을 모을 수 있는 ‘조직’의 필요성에 공감했다. 당시 헌신적으로 활동하며 나섰던 젊은 영화인들은 “스크린쿼터 지키기 싸움을 계승하고, 영화계 내부를 스스로 개혁해 21세기를 대비하는 전망을 제시할 조직이 필요”하다는 데 뜻을 모으고 영화인 단체를 만들기로 한 것. 8월18일 발기인대회를 열고 실체를 드러낸 영화인회의는 스크린쿼터 지키기 싸움을 상시적으로 벌여 문화주권을 지키고, 영화관련 법규 개정과 적극적인 정책 건의, 영화제 개최, 영화인들의 권익과 복지 향상, 세부 기술분야별 경쟁력 제고를 위한 환경개선과 연구 활동, 정보공유 등을 우선 사업으로 정하고 9월17일 오후 스카라극장에서 창립대회를 열고 공식출범했다. 영화인회의 출범으로 사실상 영화계는 신구세력이 양분됐으며, 1955년 설립, 45년 그동안 영화계의 유일한 영화인 단체로 명맥을 이어온 한국영화인협회(영협)은 입지가 상당히 좁아지게 됐다. 영진위 구성을 둘러싼 갈등 등도 영화인회의 결성을 서두르게 된 요인으로 작용했다. 등급외전용관 허용문제, 영화진흥금고 운영 방안 등 많은 부분에서 입장과 정서가 다른 영화인회의와 영협의 경쟁 관계는 계속되겠지만 왕성하게 활동하는 제작자, 감독, 평론가, 배급 및 마케팅 관계자 등을 포괄하고 있는 영화인회의쪽으로 급속하게 힘이 쏠릴 것이라는 게 중평이다.
일본영화 모두 본다
일본영화 2차 개방
문화관광부가 지난 9월10일 밝힌 일본대중문화 2차 개방은 사실상 일본영화에 대한 준전면개방에 가깝다. 개방대상 영화를 공인된 70여개 국제영화제 수상작과 전체관람가 영화로 대폭 확대한 것. 한국의 에로비디오에 해당되는 핑크영화들 외엔 소수. 이른바 저질·외설물만 아니라면 대부분의 일본영화들을 한국 극장에 걸 수 있게 된 것이다. 2차 개방의 효과는 곧 나타났다. 1차 개방으로 들어온 <카게무샤> <하나비>가 예상 밖의 저조한 성적을 올린 반면, 11월20일 개봉한 <러브 레터>는 불법 복제비디오가 널리 퍼져 있는데도 한달 동안 서울에서만 60만 관객을 모았다. 하지만 이를 심각하게 보는 시각은 많지 않다. <러브 레터> 같은 폭발력을 지닌 상업영화를 지속적으로 만들어낼 능력이 일본영화산업에 없으며 이 점에선 오히려 한국이 앞선다는 점, 그리고 질 좋은 일본영화들의 수입이 좋은 자극제로 작용하는 효과가 더 크다는 점 등이 그 논거. 따라서 좀더 본질적인 문제는 동아시아 전체를 하나의 영화문화권으로 묶어낼 수 있는 국제 프로젝트의 개발과 정책적 지원방안이 아직 부재하는 점일 것이다.
용두사미
<용가리> 헛소동
지난해 여름 <퇴마록>이 ‘한국형 블록버스터’를 표방하며 화려하게 등극할 무렵, 그저 ‘조짐’으로만 비치던 대작 열기는, 올 한해 현실로 다가와 성공적인 출발을 알렸다. <쉬리> <유령> <용가리> <건축무한육면각체의 비밀> <자귀모> 등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개봉하면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 맞서 눈부신 선전을 펼친 것이다. 이들 작품은 모두 25억원 안팎의 ‘한국형’ 거대 예산, ‘크기’를 강조하는 과감한 사전홍보, 컴퓨터그래픽을 동원한 화려한 영상, 액션 스릴러라는 블록버스터의 장르 전략을 공유했다. 결국 이들 작품의 성패를 가늠한 것은 드라마의 밀도와 긴장감. 이중 <타이타닉>의 기록을 능가한 <쉬리>, 할리우드 여름 대작들을 제친 <유령>은 볼거리와 드라마의 매력을 결합한 이상적인 모델이 됐다. 더욱이 <쉬리>는 홍콩과 일본 등지에서 개봉하게 돼, 그간 한국영화가 안고 있던 ‘해외시장 부재’ 콤플렉스에 종지부를 찍기도 했다. 그러나 직배영화에 밀리곤 하는 한국영화 배급의 불안정성, 삼성과 삼부의 이탈 등으로 다소 침체된 이즈음의 한국영화계를 돌아보면, 과연 내년에도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행진이 이어질 수 있을지 의문스럽다.
최고흥행기록
<쉬리> 240만명
강제규 감독의 <쉬리>가 서울관객 240만명을 동원하며 한국영화사를 다시 썼다. <쉬리>는 개봉 3주째이던 3월6일 한국영화 최고의 흥행작인 <서편제>의 기록 103만명을 돌파했으며, 4월9일에는 197만7천명(서울)을 동원해 <타이타닉>의 197만1780명(문화관광부 집계)을 깨고 국내 흥행 최고 기록을 세웠다. 또한 최저 보장수익 130만달러라는 한국영화사상 최고 금액으로 일본에 수출됐으며, 비디오 판매에서도 최고기록인 <쥬라기 공원>의 13만장을 넘어서 13만7천장을 팔았다. 이같은 성공으로 강제규 감독은 99년 <씨네21>이 선정한 ‘한국영화 파워 50’에서 단박에 5위로 뛰어올랐다. 전국에서 500만, 그러니까 전 국민의 10분의 1이 본 <쉬리>는 신문의 정치·경제·사회면을 동시에 오르내리며 신드롬으로 퍼져갔다. <쉬리>의 성공은 새로운 장르 개척이나 특수효과 기술 향상 등의 측면에서 한국영화산업에 적잖은 파고를 일으켰는데 무엇보다 한국영화 관객층을 넓힌 점을 중요한 성과로 꼽을 만하다. 또한 <쉬리>의 성공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못지 않은 한국영화의 상품가능성을 증명해 금융자본의 충무로 진출 타진에 먹음직한 유인책이 되기도 했다. 물론 이같은 성과는 영화 자체에 대한 평가를 차치했을 때의 이야기여서, <쉬리>의 만듦새에 대해 쓴소리를 늘어놓는 반응도 적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