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뉴웨이브
장선우, 박광수, 이명세
이장호-배창호의 시대가 막을 내릴 무렵인 88년, 세 젊은 감독의 등장이 한국영화의 새 시대를 예고했다. 장선우, 박광수는 그때까지 한국영화사에 등재되지 않았던 사회적 리얼리즘의 깃발을 들었다. 전통적 영화어법을 능숙하게 구사하면서도, 이들은 데뷔작에서부터 영화를 당대 현실 깊숙이 끌고 들어갔다. 장선우는 <성공시대>로 한국 자본주의의 폐부를 건드렸고, 박광수는 <칠수와 만수>로 도시빈민, 장기수 같은 예민한 사회적 이슈를 정면으로 다뤘다. 90년에 나온 두 사람의 두 번째 작품 <우묵배미의 사랑>(장선우)과 <그들도 우리처럼>(박광수)은 지금도 많은 평론가들에 의해 각각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수작. 한국 뉴웨이브로 불리게 된 이들과 다소 떨어진 자리에서 제3의 인물 이명세가 <개그맨>으로 외롭게 데뷔했다. 영화가 개인적 상상력의 산물임을 굳게 믿는 이 영화광은 영화 형식을 본격적으로 고민한 거의 최초의 한국 감독이었다. 영화 정신과 형식 양면에서 혁신을 일으킨 세 사람은 신인들의 위세 속에서도 올해까지 왕성한 작품활동을 펼쳐왔다. 흥미로운 점은 그동안 명성과 흥행성적에서 앞서 있던 장선우(<거짓말>), 박광수(<이재수의 난>) 감독이 각기 다른 이유로 주춤한 반면, 진가를 인정받지 못하던 이명세가 <인정사정 볼 것 없다>로 흥행·작품성 양면에서 거의 최상급 실적을 올렸다는 점.
배급의 힘
강우석과 시네마서비스의 무림평정
88년 직배허용 이후 90년대 중반까지 국내 배급망은 직배사 영화 중심 체제였다. 폭스, 워너, 디즈니 3사의 지방배급을 대행한 서울극장 곽정환 회장의 영향력이 급증하는 동안 강우석 감독은 <투캅스> <마누라 죽이기>의 잇단 흥행 덕에 서울극장과 친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투캅스2> 흥행을 계기로 서울극장 배급망의 확실한 후원을 얻은 강우석은 한 사람의 흥행감독에서 제작자 겸 배급업자로 변신했다. 그는 큰 도박을 하듯 한국영화 제작, 배급에 승부수를 던졌다. <투캅스2> <넘버.3> <편지> 등 잇단 흥행작은 <홀리데이 인 서울> <초록물고기> 등에서 손해본 부분을 만회할 만한 것이었고 강우석은 차츰 판을 키워나갔다. 삼성, 대우 등 대기업이 영화업에서 철수하는 시기에 과감한 투자를 개시한 시네마서비스는 99년 개봉작 43편 가운데 10편을 제작, 배급했다. 강우석의 영향력은 <씨네21> 창간 이래 한번도 한국영화산업을 움직이는 파워맨 1위 자리를 놓치지 않은 데서도 확인된다. 강우석-곽정환 연합이 처음 등장했을 때만 해도 “배급망 확보를 통해 한국영화 점유율을 획기적으로 늘리겠다”는 강우석의 발언은 젊은 감독의 치기섞인 야심으로 보였으나 확실히 지금 강우석과 시네마서비스는 충무로 제1의 메이저영화사로 자리잡았다.
장밋빛 청사진과 쓸쓸한 퇴각
대기업의 흥망
90년대 한국영화는 대기업의 재채기와 하품에 일희일비했다. 장밋빛 청사진을 펼쳐보이며 들어왔던 대기업들은 충무로의 지형을 흔들었고 몇몇 기업은 세계시장까지 넘보는 의욕을 불태웠다. 하지만 IMF체제에 들어가면서 대기업들은 서둘러 철수를 선언하고 보따리를 쌌다.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불어난 몸집 때문에 울며 겨자라도 먹어야 하던 차에 IMF체제와 구조조정 회오리는 퇴각 명분이 됐던 셈이다. 대우와 현대는 사실상 손을 뗐고, 삼성은 최근 금융사업 부문에서 권토중래를 모색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90년대 후반 삼성가의 분화로 독립해 영화쪽에 뛰어든 제일제당과 새한은 오히려 좌판을 더 벌이고 있다. 제일제당은 최근 극장 사업에 주력하면서 제작투자쪽에도 상당한 의욕을 보이며 주목받고 있으며, 새한은 비디오 시장에서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처음부터 대기업의 영화계 진출은 우리나라 기업들의 해묵은 생리와 영화의 산업적 메커니즘과 사회·문화적 특성이 겉돌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삼성, 대우 등이 80년대 중반 이후 본격화된 VCR 판매 확대 전략에서 영화쪽을 넘보기 시작했고, 소프트를 확보해야 한다는 당위성만 가지고 있었지 영화산업에 대한 예습과 이해가 턱없이 부족했다. 자발적으로 유입된 대기업 자본을 합리적으로 수용하지 못하고 대립구도로 내몬 충무로의 어설픈 관행도 대기업이 퇴각한 한 원인으로 꼽힌다. 대기업들이 비싼 수업료만 물고 도중 하차한 것은 이미 예정된 귀결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제작 환경을 개선하고 극장 등 하드웨어와 시스템을 현대화하는 데 기여한 공은 적지 않다.
민족영화의 새로운 전기
장산곶매와 <파업전야>의 독립영화운동
“그날 광주의 하늘은 봄볕으로 따뜻했고 전남대 교정의 잔디는 푸르름을 더해가고 있었다. 그 하늘 위로 한대의 헬기가 요란하게 떠오르고 페퍼포그차를 앞세운 1800명의 전경이 순식간에 교정을 점령했다. 푸른 잔디는 희뿌연 최루탄으로 뒤덮였다.”(<한겨레신문> 90년 4월20일치) 독립영화집단 장산곶매의 16mm장편 <파업전야> 상영은 현실 변혁을 위해 카메라를 들었던 80년대 한국독립영화의 정신을 요약해서 보여준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90년 4월6일 서울, 부산 등 전국 11개 도시에서 일제히 공개된 이 영화는 상영중 필름과 기자재 압수, 관객 폭행, 불법 연행, 관람 노동자에게 사직 강요, 관람 군인 보안대 이첩 등 끊임없는 사건을 불러일으켰다. 정부의 상영저지 명목은 <파업전야>가 영화법 가운데 영화의 독립제작 금지와 검열 조항을 위반했다는 것이지만 속내는 영화의 선동성이 눈에 거슬렸기 때문이다. 상영을 막자 장산곶매 등 18개 단체는 ‘<파업전야> 탄압분쇄를 위한 공동투쟁위원회’를 결성해 맞섰고 결국 30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했다. 정부 또한 제작·상영 관련자를 긴급검거하는 등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검찰은 장산곶매 대표 이용배씨와 예술극장 한마당 대표 김명곤씨를 영화법과 공연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기소했다. 당시 이용관 교수(중앙대)로부터 “내용과 형식에서 민족영화의 새로운 양식을 창출했다”라는 평가를 받은 <파업전야>는 87년 이후 급속하게 확산된 노동자 의식이 노동조합 설립으로 구체화되는 사업장을 배경으로 노동자의 계급각성은 비합법적 공간에서 관객의 심중을 건드렸으며, 영화를 무기로 한 정치투쟁은 다음해 <오 어머니 당신의 아들>로 이어졌다.
아무도 몰랐던 영화
배용균,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로카르노영화제 대상
89년 배용균의 등장은 극적이었다. 정말 그는 혜성처럼 잠시 시야에 들어왔다 사라졌는데 별빛을 먼저 발견한 곳은 엉뚱하게도 스위스의 낯선 도시 로카르노였다. 이해 로카르노영화제 수상 결과는 1등격인 황금표범상은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2등격인 은표범상은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3등격인 동표범상은 박광수의 <칠수와 만수>가 차지했다. 수상소식이 전해지기 전까지 <달마가…>에 대해 알려진 것이라곤 영진공 현상실에 이상한 필름이 들어왔는데 이 영화의 감독이란 자가 현상실 직원의 잘못 하나하나를 꼬집어 지적하는 등 충무로의 관행을 무시하는 소란을 피웠다는 것 정도였다. 어쨌든 <달마가…>의 로카르노영화제 수상은 한국영화사상 처음 시스템 바깥에서 주류영화계에 충격을 던진 사례가 됐다. 각본, 연출, 제작, 촬영, 조명, 미술, 편집 등 영화제작 전 과정을 혼자 도맡아한 배용균 감독의 이야기는 ‘완전작가’라는 평을 듣기 충분했는데 정작 작가 스스로는 자신을 밝히기를 꺼려했다. ‘은둔자’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인터뷰를 기피하며 작업을 계속한 그는 95년 두 번째 영화 <검으나 땅에 희나 백성>을 완성했다.
곳간까지 진출한 할리우드영화
직배 정착
88년 신촌 신영극장과 명동 코리아극장에서 UIP 첫 직배영화 <위험한 정사>가 상영된 이래 지난해까지 우리나라에 수입된 직배영화는 모두 598편. 직배 원년 88년에 수입된 직배영화가 6편에서 92년부터 98년까지 해마다 59∼75편을 유지하고 있다. 직배영화가 불러모은 관객수도 93년 처음으로 1천만명을 넘어 1200만명∼1500만명 사이를 오가다 98년에는 2250만명을 넘어섰다. 이 통계는 직배영화가 불과 2년 만에 자리를 잡고 92∼93년에 이미 안정적인 시스템을 구축한 사실을 말하고 있다. 93년은 월트 디즈니까지 들어와 5대 직배사가 한국 상륙을 완료해 직배영화의 위력이 현실화한 해다. 이처럼 일본, 홍콩 등과 달리 우리나라에서 직배사가 빠르게 뿌리내릴 수 있었던 것은 서울극장 라인과 긴밀한 제휴 관계를 맺었기 때문이다. 서울극장 라인은 워너브러더스, 20세기 폭스, 디즈니 등 직배 3사의 배급대행을 맡으면서 일방적인 독주 체제를 갖췄으며 결과적으로 직배사의 발판 구실을 했다. 하지만 9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 직배사들과 서울극장의 밀월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일찌감치 자체 배급망을 구축하고 있던 UIP처럼 다른 직배사들도 독자 행보에 나서 서울극장 라인에 대한 ‘반란’을 꾀한 것. 이런 양상은 여러 스크린을 가진 복합극장이 늘어나면서 직배사와 극장 사이의 역학관계가 역전되는 결과를 가져왔고, 직배사들이 배급 대행과 비디오 유통을 무기로 한국영화 폐부까지 들어오는 단초가 됐다. 20세기 폭스와 시네마서비스 사이처럼 한국영화의 비디오 판권료로 오가는 돈이 제작비 일부를 충당하기도 한다. 직배사가 사실상 한국영화 제작에도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셈이다.
삼인삼색 작가주의
홍상수, 이창동, 이광모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1996)이 나왔을 때, 한 평론가는 “한국영화에서 희귀한 한순간이 열리는 소리”라고 했다. 자기만의 영화 문법을 가진 냉소적 모더니스트 홍상수의 등장은 90년대 한국영화계의 빼놓을 수 없는 빛나는 순간이었다. <돼지가…>와 <강원도의 힘>(1998) 단 두편만으로도, 세계관, 이야기, 이미지와 사운드의 결합, 연기 등 영화의 모든 요소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빚어내는 말 그대로의 작가를 얻은 것. 이창동은 처음부터 화려하진 않았다. 전통적인 어법을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당대의 진실과 인간의 복합적 내면을 빈틈없이 짜여진 이야기 속에 녹여넣는 재능은 장르적 관습을 일부 수용한 데뷔작 <초록물고기>(1998)에서보다 <박하사탕>(1999)에서 더욱 빛났다. 이야기와 캐릭터에서 그보다 더 치밀하고 정교한 감독은 없다. 이광모의 데뷔작 <아름다운 시절>(1998)은 각종 국제영화제에서 무수한 상을 받으며 또다른 작가의 탄생을 알렸다. 역사에 대한 사려깊은 태도, 정교하게 계산된 구도와 미려하고 시적인 화면은 90년대 한국영화가 이른 새 경지였다. 세 감독의 존재는, 한국영화 르네상스가 물량에만 있지 않음을 웅변하는 증거가 됐다.
신인 감독의 질주
데뷔작 러시
9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 가히 봇물 터지듯 신인 감독이 쏟아져 나왔다. 주목할 것은 신인 감독수만큼이나 다양한 영화가 나왔다는 사실이다. 92년 박찬욱, 김영빈, 장현수, 홍기선, 김의석, 이현승 등이 무더기로 충무로에 입성하면서 새 기운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93년 이정국, 94년 유상욱, 김홍준, 여균동, 김성홍 등이 뒤를 이었고, 이광훈, 박재호, 이민용, 김상진, 김성수 등이 데뷔한 95년부터 나름의 목소리와 스타일, 발랄한 재기까지 갖춘 감독들이 선을 보이기 시작했고, 96년에는 신인 감독들이 한국영화의 지평을 확장한 문제작까지 내놓았다. 홍상수, 강제규, 김기덕, 임순례, 김응수 등이 그들이다. 한지승, 김용태 등도 같은해 데뷔한 감독들이다. 이처럼 90년대 중반 이후 두드러진 신인들이 속속 충무로에 입성할 수 있었던 데는 ‘선수층’이 두터워진 까닭도 있지만 대기업과 금융자본이 영화쪽으로 들어오면서 제작 환경이 나아진 탓도 크다. 97년에는 중량급 신인 이창동과 상업영화의 새 모델을 제시한 장윤현, 윤인호, 곽경택, 이서군 등과 도저한 작가주의를 표방한 전수일, 미완의 모더니스트로 가능성을 보인 구성주 등이 등장했다. 신인들의 질주는 세기말이 다가오면서 더욱 빛을 발했다. 98년 벽두를 열어젖힌 <8월의 크리스마스>의 허진호와 장르영화의 새 지평을 연 김지운, 교육현실에 대한 비판적 문제의식까지 담은 <여고괴담>의 박기형, 임상수, 이광모, 이재용, 이정향, 박광춘, 장진 등과 99년의 이영재, 정지우, 김태용·민규동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90년대는 신인들의 절정기를 구가했다.
할아버지를 극장으로
국민영화 <서편제> 신드롬
93년, <서편제>를 보려는 관객 행렬은 끊일 줄 몰랐다. 가장 놀란 건 첫주에 반도 채우지 못한 객석을 보면서 한주만 더 버텨보자던 제작사쪽이었다. 퍼지기 시작한 입소문은 청와대까지 들어갔고 언론은 연일 매진 사례를 보도했다. 극장에 가본 기억조차 까마득한 할아버지, 할머니들까지 불러앉힌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는 6개월 동안 서울에서만 정확히 103만5741명의 관객을 불러모았다. 단성사 한곳에서만 하루 평균 4318명, 총 84만6427명을 기록한 <서편제>는 그해 대종상, 영평상 등 대부분의 국내영화제를 독식했으며, 제1회 상하이국제영화제에서 감독상과 여우주연상 수상을 비롯 해외에서도 상당한 호평을 받았다. <서편제>에 대한 관심은 영화에만 그치지 않고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 이청준의 원작 소설, 판소리 강좌 및 국악 공연까지 ‘전 국민적’ 열풍으로 번져갔다. 그것은 일종의 신드롬이라 불릴 만했다. 그러나 황톳길에 기다랗게 펼쳐진 한의 울림을 예술적으로 포착했다는 찬사에 모두가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기세에 눌려 곧바로 제기되지는 못했지만 ‘서편제 신드롬’에 대한 분석들은 세계화 담론과 민족주의의 교접 결과였다는 지적부터 관객이 흘렸던 눈물의 타당성(?)에 대한 추궁까지 다양했다. 그리고 6년 뒤, 흥행 최고 기록은 <쉬리>로 바뀌었지만 93년 ‘소리의 힘’과 99년 ‘물고기의 힘’의 작동방식은 유사했다.
아시아영화의 창
부산국제영화제
96년 9월13일 첫막을 올린 부산국제영화제는 올해까지 양질면에서 가파른 성장을 거듭하며 아시아의 유수 영화제로 자리를 잡았다. 단적인 예로 110편에서 시작된 상영작 편수가 3, 4회에서는 200편을 훌쩍 넘어섰다. 그만큼 영화제가 차려내는 식단이 다양해졌다는 것인데, 관객은 부산에서 새롭고 낯선 영화에 대한 목마름을 한꺼번에 해소했다. 특히 1회 때에는 국내 처음으로 일본영화와 애니메이션이 합법적으로 상영되면서 일본영화에 대한 대대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관객의 지지는 부산영화제 성공의 일등공신이었으며, 해외게스트들도 한국 관객의 열광적인 반응에 놀라워했다. 94년 부산평론가협회 세미나에서 “다양한 아시아권영화의 소개로 아시아지역 영화예술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새롭게 하고 세계 각국 영화계 인사와의 교류를 통해 아시안게임 개최지 부산의 이미지를 부각시킨다”라는 취지에서 발의된 부산영화제는 96년 4월 조직위원회의 발족으로 구체화됐다. 조직위는 애초의 취지에 걸맞게 ‘아시아영화의 창’이라는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해 애써 왔다. 또한 한국영화의 대외창구 노릇도 해왔는데, 두 번째 한국영화회고전에서 재조명된 김기영 감독의 영화 4편이 98년 베를린영화제 영포럼 부문에 회고전 형식으로 초청되기도 했다. 심의면제 첫해였던 3회를 맞으며 부산영화제는 일종의 사전 마켓인 PPP로 새로운 도약을 시도했으며 올해에는 규모와 관계자들의 참여도가 더욱 커져서 PPP행사 3일간 150건의 미팅이 이뤄졌다. 국내에서 국제영화제의 가능성을 확인시켜준 부산국제영화제의 성공은 갖가지 영화제 붐으로 이어지면서 한국 영화문화의 지형도를 바꾸는 계기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