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고로, 없는 자는 구해야 합니다. 극장 문 열면 손님 쏟아지던 한국영화의 황금광 시대는 1960년대로 막을 내립니다. 배우들이 뿜어내는 광채에 기대어 더이상 영화를 편하게 선전할 수 없게 된 1970년대.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한 한국영화의 처절한 호객행위는 이때부터 시작됩니다. 지난 30년, 항상 정도만 고집할 순 없었습니다. 문지기 노릇하던 험악한 기도 아저씨들이 나서 “자, 아가씨 막회 보고 가요!”라며 윽박도 질러야 했습니다. 편법도 곧잘 썼습니다. 내용과 다른 포장으로 관객을 현혹해 원성을 사기도 했습니다. 온라인으로 보도자료를 보내고, 배우들의 싸이 홈피를 마련하고, 대규모 현장공개와 시사회를 진행하는 2005년 추석. 지난 30년을 버텨낸 충무로의 상술 일부를 공개합니다.
영화선전, 신문만이 내 세상_1970년대
바야흐로 TV시대가 도래하였도다. 연인하고 약속하고 퇴근시간 재촉하던 샐러리맨 어딨으며, 마누라와 외식하고 오랜만에 손 맞잡던 중년 부부 어딨는고. 극장구경 하자는 것이 이제 다 옛말이 되었구나. 선전문구 펄럭이는 군용트럭 올라타고 종로에서 명동까지 일일순회 한다 해서 뺏겨버린 손님들을 만회할 수 있을 건가. 굿이라도 해야 하나. 종로도심 선전부장, 고민이고 울상이다.
“이 시절 포스터들을 보면 하나같이 떼로 등장해요. 주연이고 조연이고 다들 얼굴을 내밀어서 포스터가 복잡하기 그지없습니다. 모던하고는 거리가 먼 시대였어요.”(유지형)
누가 ‘긴급조치 19호’라도 발동한 것일까. 1970년대 포스터를 훑다보면 누가 주인공인지 헷갈릴 정도로 빽빽하다. 조긍하 감독의 <상해임시정부>(1970) 포스터를 보라. 김지미부터 신성일까지, 16명의 배우 이름을 꼼꼼하게 박아뒀다. 현장 스틸에서 배우들의 얼굴을 일일이 오려 빈틈없이 붙인 도안사(圖案士)의 수고가 놀라울 따름이다. “도안사 생활 몇 십년이면 눈이 저절로 튀어나온다”는 한 영화인의 말이 농 같진 않다. 한문으로 주르륵 새겨진 배우 이름들을 보고 있자면 음식점 메뉴판이 떠오르지 않는가.
<동창생>(1972) 신문광고는 한술 더 뜬다. ‘회한의 명동거리’에 원한 품고 찾아든 16명의 동창생들이 “새해 복많이 받으십시오-새해 아침 스탶 캬스트 一同’이라는 인사와 함께 늘어서서 학익진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름만 올린 배우까지 세어보니 무려 47명이다. 정소영 감독의 <흑녀>(1974) 신문광고는 심지어 외국배우 몇명 출연시키고서 ‘(한·중·미·영) 150명 스타 대거출연!’이라고 뻐기고 있다. 물론 1960년대에도 ‘올 캬스트’라는 문구를 단 영화들이 적지 않았다. 총천연색 시네마스코프라는 휘장과 함께 ‘스타 총출동’ 선언은 ‘초대형 대작’임을 알리는 데 더없이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1970년대 들어서 계속 양산된 이른바 ‘떼거리 포스터’는 TV에 혼을 뺏긴 관객을 향한 호소처럼 들린다. 1965년 불과 3만대에 불과했던 TV 수상기는 10년 만에 200만대에 이르고, 그 사이 극장관객 수는 줄곧 곤두박질쳤다. 사진작가를 동원해서 포스터를 찍기 시작한 것이 1980년에 이르러서인 것을 감안하면, 떼거리 포스터를 만들기 위한 도안사들의 바쁜 칼질은 한동안 영화계의 위기감을 해소하기 위해 쉴 틈 없이 행해졌다. 신문광고에 ‘금자탑’, ‘결정판’, ‘주옥편’ 등 절대로 놓쳐선 안 될 영화”라는 자뻑 카피들 단 영화들이 이때 붕어빵처럼 쏟아졌다.
“영화가 안 되니까 쇼를 참 많이 했어요. 개봉관뿐만 아니라 재개봉관 등지에서도 영화 1회 상영하고 쇼를 덤으로 끼워서 하기도 하고. 1970년대 초·중반까지만 하더라도 쇼를 하면 그래도 관객이 꽤 왔던 것 같아요.”(배병조)
극장에 관객의 발길이 뜸해진 건 TV 때문만은 아니었다. 1970년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전국적으로 레저 붐이 일기 시작했다. 사회 일각에서는 ‘나는 구두쇠’라는 휘장을 달고 사치용품 소비근절, 허례허식의 간소화 등 ‘구두쇠 운동’을 펼치기도 했지만, 동시에 시골에서는 하나둘씩 골프장이 늘어갔다. 1970년대 중반 들어서는 도심에 우후죽순 술집들까지 생겨났다. 아이들은 이 무렵 동요의 가사를 바꿔서 “아빠를 찾으러 맥주집에 갈까. 엄마를 찾으러 댄스홀에 갈까. 누나를 모시고 고고홀에 가고 싶지마는 어쩔 수 있나요”라고 불렀을 정도다.
이랬으니 극장으로서도 먼산 남의 일 보듯 할 수 없었을 것이다. 1970년대 들어서 남진, 나훈아 등 영화에도 출연했던 가수들을 비롯해 신성일, 최무룡, 김희라, 박노식 등의 배우들이 출연한다는 쇼 광고가 이어졌고, 서울뿐 아니라 지방 극장에서도 빈번하게 ‘페케이지 쇼’가 열렸다. <쟉크를 올려라>(1972)의 경우 을지극장에서 개봉 때부터 영화 관람 뒤 ‘단연! 여러분을 위한 호화로운 쇼’가 이어졌다. 해당 영화의 감독이자 출연배우였던 ‘박노식과 그 일행’의 공연에는 이종훈과 오케스트라, 오병화 전속무용단 등이 결합해 눈요기를 실컷 할 수 있는 ‘버라이어티 쇼’임을 강조했다.
“선전부 일이라는 게 포스터 붙이는 게 전부였어요. 포스터 안 붙이는 날에는 표도 받고. 디자인 일이야 선배들 하는 거 눈으로 봐서 제 것으로 만들거나, 나처럼 그것이 부족하다고 생각되면 미문화공보원 같은 곳에 가서 전시물 도안을 들여다보기도 하고, 다 그런 식이었지요.”(복철)
1970년대 ‘선전’이라 불렸던 영화 홍보·마케팅은 고작해야 개봉 전날 전야제를 열고, 대학가와 대로변 상점 등에 포스터를 붙이는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라디오·방송 광고 등을 활용하기 시작한 것도 1980년대가 다 될 무렵이었고, 그전까지는 신문광고 동판 짜는 데만 주력했다. 영화계가 불황을 타개할 만한 선전 비책을 쉽게 마련하지 못한 데는 전문화된 인력이 거의 전무했다는 이유도 있지만, 그보다 한국영화에 대한 당시 영화계의 낮은 인식이 더욱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잘라 말하면, 이때 한국영화는 미끼에 불과했다. 정권이 인정하는 우수, 국책영화를 만들어야 외국영화를 수입할 수 있는 쿼터를 얻을 수 있었던 시절, 한국영화 제작은 흥행을 보장받는 외국영화를 수입하기 위한 요식행위나 다름없었다. 제작사들은 심지어 배정받은 수입쿼터를 또 다른 수입업자에게 거액에 되파는 방식으로 생존해나갔는데, 이러한 조건 아래서 한국영화 ‘선전’은 제자리걸음을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1970년대엔 이런 일이
천지호텔 신사협정을 아시나요
“영화를 ‘선전’할 수 있는 방법이 많지 않았던 시대였기에 극장에 내걸린 간판 또한 중요한 홍보수단이었다. <결혼교실>(1970)의 경우 하마터면 극장 간판 없이 개봉했을지도 모른다. 애초 이 영화는 남정임, 문희, 윤정희 등 당대의 세 여배우가 동시에 출연한다고 해서 화제를 모았다. 감독, 제작자, 남자배우가 세 여배우에게 맨투맨으로 들러붙어 꼬드긴 끝에 캐스팅에만 6개월이 걸렸다. 어렵사리 스케줄을 맞춰가며 촬영을 진행했지만 세 여배우는 현장에서 매번 의상경쟁을 벌이는 등 적지 않은 신경전으로 제작진의 기를 뺐다. 제작진만 세 여배우의 알력 다툼에 곤란을 겪었던 것은 아니었다. 국도극장 개봉을 앞두고 간판을 그리기로 했던 이는 붓 한번 제대로 들지 못한 채 도망다니기 바빴다. 세 여배우의 매니저들이 서로 자신의 배우들을 크게 그리지 않으면 큰일날 줄 알라고 위협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을지로 천지호텔에서 세 매니저들이 신사협정을 맺지 않았다면 어찌 됐을지 모를 일이다.”(정종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