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적인 영화광고 시대, 튀어야 산다_1980년대
바야흐로 벗어야 사는 시대인가. 애마부인이 그러하고, 람보가 그러하다. 사용무기는 다르지만, 살색유혹 앞에 당할 자 있으리요. 통금해제와 함께 달려온 애마부인을 영접하고자 유리창을 박살내는 관객의 이 극성을 보라! 태평양 건너 날아온 람보를 염탐하고자 새벽 행렬도 마다않는 관객의 저 아우성을 들으라! 여기에 더해 어우동과 코만도는, 변강쇠와 엠마뉴엘은 또 어떠한가. 불황의 터널을 벗진 못했지만, 극장가는 잠시나마 웃음을 되찾는구나.
“1980년 초인가. 극장 앞에 금성 19인치 TV를 놓고서 외화 수입사들로부터 받은 예고편을 비디오로 받아서 틀었어요. 반응이 꽤 좋아서 정식영업증을 내고는 청계천 등지의 TV 파는 가게 등에도 돌리면서 전시용으로 좀 틀어달라고 했다고. 그러다 <람보> 때인가. 불법복사 하는 놈들이 걸려들어갔는데 어떻게 내 전화번호를 갖고 있어서, 어느 날인가 경찰서에 잡혀간 적이 있어. 영화사에서 받은 예고편이라고 설명을 해도 그쪽에서 알아먹어야지.”(복철)
“<터미네이터> 개봉할 때인데, 배급 일 하다가 갑자기 홍보를 하게 됐어요. 그런데 그쪽에서 보내온 자료가 하나도 없는 거예요. 대개 일본의 <로드쇼> 같은 잡지를 번역해서 정보를 얻곤 했는데. 아직 일본에서 개봉을 안 해서 그것마저도 불가능해졌고. <코난>에 출연한 근육질의 배우라는 사실만 갖고서 보도자료를 쓸 순 없잖아요. 결국 동생을 청계천에 보내 온갖 보디빌더 잡지들을 찾게 했어요.”(송혜선)
‘당신은 애마부인을 아십니까?’ 1982년, 밤의 도래를 알린 <애마부인>의 질주 이후 전국 각 영화관에는 주말 ‘심야극장’이 차려진다. ‘불꽃처럼 확 솟아오른 젊은 남자의 이야기’(<춤추는 달팽이>), ‘마지막 4분59초, 문을 닫고 그녀를 만난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0시의 호텔>) 등 애마 특수를 누리려는 영화들이 자극적인 카피를 달고 밑빠진 독처럼 계속 쏟아져나온다. 우려도 만만치 않았다. “욕망의 진실이라는 이름으로 무분별한 노출 경쟁을 벌이는” 상황은 “불고기를 좋아하는 손님이 많다고 해서 장안 식당 메뉴가 불고기 일색이 되는 것과 다름없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이 무렵 신문을 뒤져보면, ‘No Cutting’을 강조한 <金마리라는 부인>의 광고가 나오는데, 하단에 ‘관람도중 비디오 촬영 절대금지’라는 경고문구가 쓰여져 있다. ‘암표상 극성’이라는 기사가 실은 극장에 도움이 되던 때였으니, 이같은 경고문구가 노리는 바가 실은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전법일지 모르지만, 이때 이미 불법 비디오 촬영이 적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람보>를 시작으로 조조 관객에 한해 오리지널 티셔츠 등을 제공하는 홍보·마케팅이 눈에 띄게 늘어난 것도 특징이다. 외화에 한정됐지만, PL의 송혜선 이사는 “1970년대와 달리 남들보다 미리 영화를 보고 싶어하는 젊은 관객이 생겨났다는 점에서 고무적이었다”고 말한다. 1980년대 말 <스크린>에 따르면, “모자, 열쇠고리, 볼펜, 체온계 등 영화판촉물이 날로 다양화하는 추세”를 보인다. 1970년대 말 주로 외화 홍보 때 뿌려졌던 미니달력, 책갈피, 엽서 등이 도입됐고, 배우들의 브로마이드와 사인이 담긴 팸플릿도 없어서 못 팔 정도로 성행했다. 82년은 시민게시판이 생긴 해이기도 하다. 담벼락에 덕지덕지 붙이는 관행은 여전했지만, 포스터가 극장 바깥에서도 정식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김수용 감독님의 <허튼소리>가 공륜에서 많이 잘렸잖아요. 그때 위원장이 여성분이셨는데, 제작사 대표가 어찌나 화가 났던지 사무실에 찾아가서는 바지를 벗어내렸다고 하시더라고요. 위원장이 비명을 질러서 막상 비서들이 들어가보니 어느새 제작사 대표는 바지 올려입고 무릎 꿇고 있고, 위원장만 이상한 사람이 된 거죠. 하여튼 그때 공륜은 공공의 적이었어요.”(석명홍)
간판에 총을 그릴 때 바라보는 이의 정면으로 향하도록 그리지 마라. 80년대 중반 공륜이 새로 추가한 자체 심의조항이다. 심약한 이들이 쇼크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인데, 1980년의 원죄를 숨기고자 3S 정책을 추진하던 당시 정권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한 배려로밖에 안 보인다. 공륜의 판단은 꼭 조항을 따르는 것도 아니어서 <에이리언>의 경우 아무런 이미지 없이 ‘죄송합니다. 엄청난 충격에 그만, 드릴 말씀을 까먹었습니다’라는 애교 섞인 멘트조차 과대광고라고 불가 판정을 받았다.
1986년 아시안게임, 1988년 올림픽을 앞두고서 규정은 바뀌지 않지만 여론을 의식해 공륜의 검열은 완화되는 양상을 보인다. “소금장수는 힘도 좋다… (중략)… 월향이는 돈도 안 들고 소금 사러 가나”(<소금장수>), “이제는 너도나도 소문난 대물 구경가세… (중략)… 이 세상에 커서 나쁜 것 아무것도 없다”(<대물>), “쎄기는 쎄구나! 떨구렁 떨구렁, 과연 강쇠로다! 더 뜨겁게, 더 강하게, 더 힘있게”(<가루지기>) 등 특히 토속 에로물들의 카피들은 이러한 분위기를 한껏 이용했다.
이런 상황에서 유독 눈에 띄는 포스터와 카피가 있다면, 그건 대개 김정률, 이황림, 이세룡 등 1970년대 말부터 두각을 나타낸 홍보맨들의 것임에 틀림없다. 소설가 최인호가 ‘충무로의 손오공’이라 불렀던 김정률은 명보극장, 태멘영화사 등을 거치면서 1970년대 말부터 <겨울여자> <꼬방동네 사람들>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엘리베이터 올라타기> 등의 기획, 홍보에 참여했고, 그의 참신한 시도는 지금까지도 충무로에서 회자되고 있다. 특히 1985년부터서 김중만, 최준관, 변승우 등 전문 사진작가를 포스터 작업에 적극적으로 끌어들인 점은 이전의 시도와 차별된다. 이황림 감독이 디자인한 것으로 알려진 <도화>(1987)는 지금 봐도 앞서간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파격적이다. 수묵화로만 포스터를 만들어 빠지지 않고 거명되는 포스터 중 하나다. 여기에 피카디리의 신철, 단성사의 석명홍, 서울극장의 이준익 등 대학에서부터 시각디자인, 미술 등을 체계적으로 공부한 젊은 인력들이 1985년을 전후로 충무로에 가세하면서 적어도 영화 포스터와 카피에서만큼은 일대 비약을 보인다.
“예매가 없었을 때니까. 신문광고 나간 뒤에 극장으로 얼마나 문의 전화가 왔느냐, 개봉날 극장 앞에 늘어선 행렬이 어느 정도냐, 암표가 얼마나 팔렸느냐 등으로 관객의 반응을 알 수밖에 없었죠.”(채윤희)
“그때만 하더라도 버스가 주된 대중교통 수단이었다. 따라서 전시효과가 필요했다. 개봉일에 극장 앞에 긴 행렬을 만들기 위해 일부러 표를 늦게 팔았다. 그렇다고 상영시작 시간을 넘겨서는 곤란했기 때문에 적절한 타이밍이 요구됐다. 이런 건 어느 마케팅 이론서에도 나오지 않는다. 당시 현장에서만 배울 수 있었던 기술이었다.” 석명홍 씨네라인 대표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1980년대에도 명백한 한계가 있었다. 어떤 영화를 만들어야 관객에게 호소할 수 있는지에 대한 데이터를 전혀 얻을 수 없었다. 그저 사후적으로 짐작하고 추정하는 것만 가능했을 따름이다. 시뮬레이션이 필요한 단계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시험을 감당할 만큼 충무로의 제반 상황은 여유롭지 않았다. 게다가 1988년을 기점으로 할리우드 직배사들이 한국에 진입하기 시작했다. 이준익, 신철, 석명홍, 심재명, 채윤희 등 당시 젊은 영화인들이 이제는 극장이 아닌 영화제작사에서 홍보·마케팅 업무를 맡아야 한다고 생각한 것도 이 무렵이다. 이들의 구상이 1990년대 들어서면서 대기업 자본과 만나게 되고 직배사와의 경쟁을 통해 한국영화 마케팅의 밑바탕을 다진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일이다.
1980년대엔 이런 일이
성기완전노출영화?!
“1980년 여름이었을 것이다. 그때 이장호 감독의 재기작이었던 <바람 불어 좋은 날>의 포스터와 버스광고 문안이 문제가 됐다. 그때 포스터와 광고에 썼던 사진이 바람이 불면 여배우 유지인의 치마가 날리는 장면이었는데, 은밀한 곳에 ‘바람 불어 좋은 날’이라는 제목을 쓰고서는 ‘성기완전노출영화’라고 덧붙였다. 자연스레 사람들의 화제에 오르내리면서 결국 문화공보부에서 전화를 했다. 그쪽에서 해명을 하라고 해서 “아역배우였던 안성기군이 성인으로 노출되는 첫 번째 영화거든요”라고 말해줬다. 안성기가 중국집 자장면 배달부로 나오는데, 이번 영화는 아역배우였던 안성기가 성인 배우로 데뷔하는 영화다, 그래서 그렇게 붙였다고 해서 넘어갔다. 그로부터 5년 뒤에도 그런 소동이 한번 있었다. 직접 제작한 영화 <엘리베이터 올라타기>를 중앙극장에서 개봉하면서 감독, 배우, 스탭 12명을 선거출마용 포스터처럼 만들었더니 높으신 정보기관 분들까지 나서서 의도가 도대체 뭐냐고 추궁한 적도 있었다. 그때는 대통령 선거도 없었던 때니까 그런 광고물을 보고 적잖이 당황했을 것이다.”(김정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