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케팅다운 마케팅이 시작되다_1990년대
긴 겨울 지나 바야흐로 봄이 오는 것일까. 싹이 트기 전에 누군가는 밟힐 것이라 했고, 활공하기 전에 누군가는 떨어진다고 했는데, 견디고 또 견디니 볕이 드는구나.
“윗선배들을 배제하려는 건 아니었고, 각 분야에서 일하고 있는 의욕있는 젊은 영화인들의 네트워크 정도였다. 매일 만나다시피했던 것 같은데, 충무로에서 삼겹살 먹고 강남이나 이태원에 있는 나이트클럽에도 가고 그랬다. (웃음) 그러다 모임 내에서 스터디를 하게 됐는데 제작, 배급, 상영 등 자신이 맡고 있는 업무에 대해 발제하는 식이었다. 내 경우에는 <광고학개론>이라든가 <카피라이팅의 기술> 같은 이론서를 구해서 읽기도 했지만 김정률, 이황림 같은 선배들이 내놓은 광고물을 보면서 더 많이 배울 수 있었다.”(심재명)
1990년대 초에 결성된 영화사기획실모임은 그저 단순한 친목도모에서 끝나지 않았다. 신철, 이춘연, 채윤희, 이준익, 석명홍, 권영락, 심재명, 노종윤, 안동규, 김태균, 지미향 등 30여명으로 구성된 네트워크 안에서 극장쪽 기획인력들과 제작사 내 기획인력들의 도킹이 이뤄졌다. “영화시장 개방과 영상매체의 다변화라는 시대적 변화 속에서 도약을 하려면 한국영화는 기획능력을 보강해야 한다는 현실적 필요성과 맞물려” 이들은 곧이어 전문기획자로 변신하게 된다. 특히, 1990년대 한국 기획영화의 장을 열어젖힌 <결혼이야기>(1992)는 “대기업으로부터 광고료를 받고서 상품을 배치하는 PP(Product Placement) 사례”로만 여겨져선 곤란하다.
영화전문기획사인 올댓시네마에서 근무하면서 한때 삼성영상사업단의 영화들을 홍보·마케팅했던 심영 KM컬쳐 이사는 “<결혼이야기>는 대기업과 충무로의 파트너십이 지속될 수 있게끔 한 영화”라면서 “대기업이 충무로에 들어오면서 종전과 달리 체계적인 마케팅 계획을 세울 수 있게 됐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이를테면 “개봉일을 중심으로 디데이 작업을 하면서 마케팅 목표를 설정할 수 있었고, 과정상의 포맷을 만들 수 있었다”는 것이다. 대기업의 충무로 진출은 사실상 우려가 적지 않았다. 하지만 새로운 시스템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던 젊은 영화인들에게 대기업의 자본은 기회였다. 심재명 MK픽처스 이사는 “마케팅 비용을 체계적으로 산정하고 합리적으로 집행하는 시스템이 절실하던 양쪽 모두에게 좋은 결과로 남았다”면서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결혼이야기> 등으로 대기업 자본을 유인할 수 있었고, 이후 관객의 수요가 무엇인가를 좀더 체계적으로 고민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센스, 센서빌리티>는 개봉 전 호암아트홀에서 즉석 미팅을 마련했다. 시사회 관람 뒤 가장 근사하게 프로포즈를 한 커플에게 30만원 상당의 반지를 주기로 했는데, 이벤트 참가자 중 진짜 키스를 하는 커플이 결국 당첨됐다. 나중에 반지를 전달하려고 전화했더니 남자가 10만원 받고 여자에게 팔기로 했다고 하더라. (웃음) <플레전트빌>의 경우엔, 시가 8천만원 상당의 오피스텔 1년 이용권까지 내놓았었다.”(심영)
대기업 자본들이 들어오면서 전문 영화홍보사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1992년 <세계일보> 보도에 따르면, 이준익, 석명홍, 정승혜 등이 함께한 시네시티를 비롯해 신씨네, 한국영화기획정보센터 등 8곳이 생겼다. 전문회사가 설립되면서 인력들이 모여들고 이벤트 등 각종 마케팅 방법 또한 풍성해졌다. <프렌치 키스>의 경우, 1995년 가장 화제를 모은 이벤트였다. 수입사였던 익영영화사는 당시 서울-파리간 왕복항공권을 내걸고 영화 속 키스장면을 재연하는 커플 이벤트를 열었는데, 무려 2천여명에 달하는 남녀가 피카디리극장 앞에 운집했다. 하지만 이벤트는 실행되지 못했다. 관할 종로경찰서에서 절대불가 통보를 내렸기 때문이다. 키스는 물론이고 포옹이나 손을 잡는 것조차 허용할 수 없다고 했다. 결국 참가자를 남녀 각각 5명으로 제한하고 참가자 혼자서 투명 아크릴판에 그려진 입술에 키스하는 식의 싱거운 해프닝으로 막을 내렸다.
1996년 <디아볼릭>은 개봉한 지 일주일 뒤에 샤론 스톤과 이자벨 아자니를 닮은 이를 뽑는 행사를 열어 영화출연 기회를 부여하는 닮은 사람 선발대회까지 열었다. <은행나무 침대>의 경우, 고가의 침대를 선물하고, <러브 스토리>의 경우, 다이아몬드 반지를 내걸었다. 1990년대 중반 들어 통신, 인터넷이 활성화되면서 마케팅 방식 또한 변화를 겪게 된다. <접속>은 유니텔 회원과 기존의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넘어간다. <접속>은 소재 때문에 유니텔로부터 PP를 해주는 대신 티켓 구매와 선금 지원을 받은 케이스. 배우들하고의 채팅을 주선하는 이벤트 등을 더했다. <조용한 가족>의 홈페이지를 만드는 등 온라인쪽에 관심을 지속적으로 둬왔던 심재명 MK픽처스 이사는 “처음엔 인터넷 예매에 할당되는 정도가 작아서 미비했다”고 말한다. 2000년대 들어 인터넷 예매가 급속도로 자리잡을 수 있었던 것은 빠른 인터넷 보급률 때문이기도 하지만 전국 지역별 망을 확보하고 있는 거대 멀티플렉스의 영향도 적지 않다. 현재 예매 결과는 관객의 취향을 파악하는 것뿐만 아니라 흥행 스코어를 예상하는 기준으로도 사용되고 있는 상황이다.
“개인적으로 <여고괴담>(1996)이 생각난다. 제작비가 대략 7억원 선이었던 것으로 아는데 흥행이 되면서 광고비만 14억원 정도 썼다. 4월에 개봉해서 방학까지 상영이 연장됐는데, 신문광고에 ‘너희들 방학했지?’라고 썼다. 개인적으로 보너스를 받은 게 그때가 처음이다. 나중에 씨네2000 이춘연 사장님이 따로 불러서 수고비를 챙겨주더라. 이건 네 거다, 네가 가져야 한다고 하시면서. 그때처럼 기분 좋았던 적이 없었다. 그전까지만 해도 일하고 나서 돈을 못 받고 떼인 적이 셀 수 없이 많았다.”(정승혜)
한국영화 마케팅 분야가 대접받게 된 건 불과 몇년 전이다. 지금은 오프라인과 온라인으로 나뉘어 상당 부분 전문화가 진행되어 있다. 그러나 일부의 걱정스런 견해 또한 있다. 영화사 아침의 정승혜 대표는 “크리에이티브를 발휘하는 측면에선 과거보다 떨어지는 것 아닌가 싶어 후배들에게도 조언을 하곤 한다. 개인적으로도 올라운드 플레이어가 되기를 요구받던 시절이 가끔 그리울 때가 있긴 하다”고 말한다. 단순히 기능적인 업무를 수행하는 것만으로는 상업영화의 컨셉을 의도대로 실현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한국영화가 천대받던 시절, 남아서 한국영화를 지키겠다는 초심이 아직 살아남아 있다면 큰 문제는 아니겠지만 말이다.
1990년대엔 이런 일이
팩스 한장에 양조위 방한?
“1990년에 <첩혈가두> 개봉 때문에 양조위가 이자웅과 같이 한국에 왔다. 1990년대 초만 하더라도 사인회가 가장 큰 이벤트였다. 공항에 마중을 나갔는데 매니저를 대동하지도 않고 달랑 두 사람만 왔더라. 숙소 잡고, 인터뷰 진행하고, 사인회까지 혼자서 진행해야 했는데 의외로 쉽게 풀렸다. 지금이라면 그 정도 해외배우가 오면 미리 어느 정도급 호텔을 잡아야 하느냐 하는데 그때는 그런 게 없었다. 다행히 두 배우 또한 까다로운 요구도 없었고. 사실 그쪽에 내한 요청을 할 때도 홍콩쪽 영화사에 팩스 한장 보내서 언제까지 오라고 해서 성사됐으니. 그때는 모든 절차들이 간단했다. 어느 매체와 인터뷰를 하겠다는 것도 사실 사전 조율이 필요한데, 양조위는 공항에서 자신을 붙잡고서 질문을 하는 잡지사 기자들의 요구에도 친절하게 응한데다, 심지어 초상권 허락을 받지도 않고 화보집을 만들겠다며 촬영에 협조를 부탁하는 이들에게도 별도로 시간을 내줄 정도였다. 지금이라면 정말 상상도 못할 일이다.”(심재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