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과 두려움 사이, 피터팬의 어른되기
조창호 감독의 <피터팬의 공식>
소년이 정액을 만들어낼 수 있는 나이가 되면, 그 몸은 그때부터 성장통을 겪는다. 여자를 훔쳐보다가, 여자의 냄새가 밴 물건을 찾아내고, 여자의 육체에 감싸이는 직접적인 감촉을 욕망하게 된다. 통증이 견딜 수 없는 순간에 이르렀을 때 소년은 그것을 견디거나, 해결하기 위해 선택을 한다. 조창호 감독의 장편데뷔작 <피터팬의 공식>은 자위할 때의 신음소리가 너무 작은 내성적인 소년의 성장통에 관한 영화다.
어촌의 작은 고등학교 수영부에서 유일하게 ‘아시아대회 출전급’ 실력을 갖춘 한수(온주완)는 어느 날 수영을 그만둔다. 그날, 그의 엄마가 인생이 허무하다며 자살 기도를 했다. 아버지의 얼굴도 모르고 자란 고3짜리 아들에게 ‘미안하다’는 유서를 남기고 살충제를 마신 엄마는, 의식없는 육체로 병원 침대 위에 드러누웠다. 삶의 동인을 잃은 듯한 한수에게 두 여자가 나타난다. 옆집에 이사온 고등학교 음악교사 인희(김호정)와 병실 맞은편 침대에서 제 엄마를 간호하는 미진(옥지영)은 한수가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다. 소년은 손을 뻗는다. 인희와 미진을 훔쳐보다, 그녀들의 팬티와 스타킹을 손에 넣게 되고, 그녀들의 육체 안으로 파고들기를 욕망하게 된다.
<피터팬의 공식>은 방과 병실이라는 좁은 공간 안에서 소년의 성장통을 끝까지 발가벗겨내는 성장영화다. 교사라는 반듯한 직업을 가진 유부녀에게 한수가 자위를 부탁할 때, 병실 간이 침대에 앉아 여자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그녀가 신었던 스타킹을 움켜쥔 손 사이로 하얀 정액을 쏟아놓을 때 그 곁엔 언제나 차가운 관찰자가 존재한다. “작은 부분의 떨림까지 포착하고 싶었다”는 감독의 시선은 정서를 잡아내되 감정적이지 않다. 엄마의 몸을 닦아주던 한수가 자신의 손이 파고들 수 없는 곳 앞에서 눈물을 쏟고 마는 장면은 잔인할 정도의 클로즈업이다. 개인의 내면을 향한 정면 응시. 아버지에게 거부당하고 학교를 자퇴했으며 절도행위를 처벌당하지 않는 한수는 자기 자신에게 가장 솔직한 방식으로 통과의례를 거친다. 제도나 윤리는 무의미하고 무력하다. 성장의 고통과 두려움 사이에서 한수를 해방시켜줄 수 있는 것은 끝없는 바다뿐이지만 그곳으로 나아가는 일은 소년에게 죽음을 담보해야 할 자유다.
시나리오에 담겨 있던 판타지의 분량을 촬영 때 거의 포기했다는 감독은 피터팬의 어른되기 ‘공식’을 다루기 위해 어느 정도 고상한 이론과 친절한 비유의 힘에 의존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수의 정서를 붙드는 피아노 솔로곡의 울림이나 숏의 편집만으로 이뤄진 비약의 순간들은 장편데뷔작을 만든 손길의 미숙함을 흠잡지 못하게 한다. 5억원으로 찍은 35mm 필름영화, 6주 27회 촬영으로 완성된 러닝타임 약 110분의 영화라는 점까지 감안하면, 말쑥한 완성도가 더욱 믿기지 않는다. 조창호 감독은 주연인 온주완을 인터넷에서 우연히 본 사진의 느낌만으로 캐스팅하게 됐다고 한다. 한수가 엄마의 몸을 닦아주는 “신의 난이도로 따지면 훨씬 더 어려운” 장면보다 한수가 세숫대야를 들고 걸어가다 “엄마 목욕 시켜주려고요”라고 미진에게 한마디 던지는 장면에서 테이크가 더 많았다는 감독이 공들여 잡아낸 한수의 얼굴에는 <발레교습소> <태풍태양> 이후 TV 쇼프로그램에 종종 출연해온 발랄한 연예인 온주완의 흔적이 없다.
엄마 역의 손희순는 누구예요?
<피터팬의 공식>에서 한수의 성장통 영향권 내에 있는 세 여자 가운데 가장 평면적일 수 있는 인물이 한수의 엄마다. 대사 한마디 없는 이 역할에 주어진 일은 마지막 한신을 제외하고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이 전부다. 연기경력 2년차 된 신인 중년배우 손희순(53)의 연기는 그 이상의 것을 한다. 그는 뇌사상태의 환자가 보여줄 수 있는 보편적인 반응 행위에도 풍부한 의미를 담아 캐릭터를 만든다. 한수의 엄마가 입을 오물거리거나 눈동자를 움직이거나 고개를 움찔하면, 과거 그녀의 목소리와 어조와 말투는 어떠했을지, 성격은 어떠했을지가 궁금해지는 것이다. 조창호 감독은 그녀를 제작사인 LJ필름 건물 앞에서 처음 만났다고 한다. 이른 출근 시간 문 잠긴 회사 앞에서 열쇠 가진 직원의 출현만 기다리던 감독은, 한 아주머니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한수 엄마 역의 오디션을 보러온 배우 중 하나가 아닐까 추측했다. 상대가 알아채지 못하도록 조심스레 관찰하면서 “중세 여인의 양감과 어린아이의 손으로 만져지는 엄마 젖의 질감”을 가진 여인은 아니지만 그저 한수 엄마 같다는 느낌을 받고 회사 문이 열리기도 전에 한수 엄마 역으로 확정지어버렸다 한다.
현실의 벼랑에서 마지막 연애를 꿈꾼다
오석근 감독의 <연애>
오석근 감독은 2000년 부산국제영화제 사무국장을 그만뒀다. 그리고 부산에 직접 라이트 하우스라는 영화사를 차렸다. 두 번째 영화 <백한번째 프로포즈>를 내놓은 지 7년 만의 일이었다. 카지노 딜러와 마약수사관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 창립작은 그러나 부화되기 전 시나리오 단계에서 물거품이 됐다. 메가폰의 꿈을 다시 놓아야 했으니, 이후는 누가 봐도 고통의 연속이었을 일. 그러나 그는 아니라고, 그때야말로 “세상을 다시 볼 수 있었던 소중한 개안의 시간이었다”고 말한다. “영화에 미쳤을 때는 몰랐다. 그러다가 빚이란 게 이런 것이구나, 이혼이란 게 이런 것이구나, 사람들의 눈총을 받는 게 이런 느낌이구나, 세상 공부를 실컷 할 수 있었던 소중한 시간들이었다.” 그가 돌이켜 곱씹은 시간이 헛된 자위가 아님을, <연애>는 충분히 증명한다.
몇백만원의 빛 때문에 가압류 딱지를 이마에 붙이고 살아야 하는 30대 초반의 주부 어진(전미선). 무능한 남편을 대신해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그녀는 사내들의 헐떡임에 몸서리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전화방 일을 하고, 우연히 만난 김 여사(김지숙)에게 이끌려 급기야 2차를 강요당하는 술집에까지 나가는 처지가 된다. 정말 어진의 말대로 “비온 뒤에 행복의 무지개가 뜨는” 것일까. 남자들의 욕설과 구타를 몸으로 받아내야 하는 그곳에서 어진은 민수를 만난다. “우리 친구할래요?” 술집에서 만나 함께 몸을 섞은 민수의 호의는 점점 적극적이 되고, 어진은 한발 물러서면 낭떠러지라는 냉혹한 현실의 벼랑에서 마지막 연애의 상상을 한 모금 들이마신다. 그러나 모멸과 수치를 피하기 위한 탈출구가 실은 더 깊은 수렁이었음을, 파국으로 향하는 또 다른 입구였음을, 어진은 뒤늦게 깨닫는다.
<마지막 연애의 상상>이라는 이름으로 싸이더스FNH의 차승재 대표가 개발하던 <연애>의 시나리오가 오석근 감독의 손에 들려진 건 2년 전. 부산영화제에서 만나 차 대표와 맥주 한잔을 들이켰던 오 감독은 연애의 상상이 무참히 깨지는 후반부의 한 장면 때문에 연출을 결심했다. “어진은 관계에 대한 모든 미련을 떨구기로 맘먹는다. 민수의 무리한 요구를 결국 받아들이는 건 자신을 산화하기 위한 의식이다. 그러나 감정을 끊어내는 것이 말처럼 쉬운가. 그 장면을 보고서 혼란이 왔고, 나한테 짜증이 나더라. 그때 내가 하고 싶은 영화는 삶을 적극적으로 살아내는 인물이 나오는 밝은 영화였지만, <연애>는 그전에 한번은 넘어야 할 산처럼 느껴졌다.”
“어진의 처연한 정서에 최대한 집중하는” <연애>는 삶의 비루함에 대한 애조(哀調)의 기운이 가득하지만, 손쉽게 신파를 택하는 우를 범하지 않는다. 이미 메마른 어진의 동공에서 짜낼 눈물이 있을까. 세련과 쿨함을 가장한 신파영화들이 난무하는 시대, <연애>의 미덕은 여기에 있다. 세심한 카메라는 그래서, 그녀가 마음으로 떨궜을 눈물의 실루엣을 빼놓지 않고 하나씩 들여다본다. 보석핀을 만드느라 해진 그녀의 손 대신 빨래집게가 울고, 원치 않은 타액으로 더럽혀진 그녀의 몸 대신 샤워기가 울고, 폭탄주를 마시느라 속이 뒤집힌 그녀의 위장 대신 좌변기가 운다. 오석근 감독이 12년의 휴지기 동안 진심으로 그린 우리의 끔찍한 자화상을 맨눈으로 보기란 쉽지 않다.
오랜 인연으로 뭉친 벗들과 찍은 영화
벗들이 아니었다면 <연애>는 불가능했다. 제작자인 차승재 대표는 <백한번째 프로포즈>에서 감독과 프로듀서로 만나기 전 함께 어울렸던 영화동지다. 오 감독은 예산과 촬영회차가 늘어나서 “동아줄을 내려준” 차 대표에게 적지 않은 타격을 입혔다고 미안해한다. “차 대표가 너마저도 나를 죽이는구나 하더라.” 전미선, 오윤홍, 장현성 등 주연배우들의 호연에 앞서 <연애>는 제작진의 팀워크가 빛나는 영화. 감정을 따를 줄 아는 카메라와 어진을 달래는 애잔한 기타선율은 10년 넘게 인연을 맺어온 박상훈 촬영감독과 송병준 음악감독의 선물. 배우 섭외까지 도맡은 송민호 작가 또한 오 감독이 오래 두고 볼 동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