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제2회 메가박스 일본영화제 가이드 [3] - 프리뷰 ②
2005-11-09
글 : 김혜리

나는 두살

감독 이치카와 곤 | 출연 스즈키 히로오, 후나코시 에이지 | 88분 | 제작 다이에 | 1962년

막 태어난 사내아기 타로의 독백이 영화를 연다. “발을 움직였더니 체중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고독을 깨닫고 슬퍼졌다.” 아기의 시점으로 이야기를 끌어가는 스타일이 에이미 해커링의 1989년작 <마이키 이야기>를 앞선 가족영화다. 그러나 아기를 관찰자로 내세워 결국 어른들의 사연을 풀어놓는 영화가 아니라, 영화 전체를 ‘육아’라는 테마에 바쳤다. 8남매를 둔 타로의 이모는 “애들이 빽빽 울 때면 한 셋쯤 죽여버릴까 생각도 해”라면서도 동생에게 아이를 더 갖지 않냐고 묻는다. 하지만 신세대 초보부모는 하나만으로도 벅차다. 아기 기르기에 위험한 신식 가옥 구조부터 고부간의 육아 갈등까지, 고도 경제성장 시대 일본의 젊은 샐러리맨 부부가 첫 아이를 키우며 겪을 만한 시행착오들을 두루 보여주는 연출은, 다큐멘터리적 분위기를 낸다. 타로 역의 아기는 3240:1의 오디션을 통해 뽑혔다고 한다. 역시 이번 영화제에서 상영되는 <검은 10인의 여자>와 함께 이치카와 곤 감독이 다이에에서 이룬 전성기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가마타 행진곡

감독 후카사쿠 긴지 | 출연 마쓰자카 게이코, 가자마 모리오 | 109분 | 제작 쇼치쿠, 가도카와 하루키 사무소 | 1982년

‘큰방 배우’라 불리는 액션 단역 배우와 그가 동경하는 대스타의 관계를 그린 후카사쿠 긴지 감독의 영화에 관한 영화. “시대극 영화의 본산인 교토 촬영소를 무대로 한 인정희극”이라고 카탈로그는 소개하고 있지만 흥겨운 도입부를 뒤따르는 이야기는 어이없을 만큼 처절하다. 제목의 ‘가마타’는 쇼치쿠 촬영소가 있던 도쿄의 지명. 제멋대로의 스타인 긴짱은 본인의 아이를 임신한 여배우 코나츠를 자기를 추종하는 말년 단역 야스에게 떠맡긴다. 비굴할 만큼 선한 야스는 결혼과 출산 비용을 벌기 위해 온갖 위험한 스턴트를 자청해 깁스로 몸을 휘감는다. 코나츠는 야스의 선량함에 점점 마음을 열지만 위기를 맞은 긴짱에게 멋진 장면을 선사하기 위해 야스는 자살이나 다름없는 39계단 추락 연기를 자청한다. 사형대와 같은 세트에 오른 야스는 난생처음 현장에서 위엄있게 큰소리를 친다. 사무라이와 주군의 그것을 연상시키는 야스와 긴짱의 관계, 새벽 인력시장을 연상시키는 단역 캐스팅 풍경, 응석받이 스타들의 행태 묘사가 한폭의 풍속도 같다.

언젠가 책 읽는 날 (폐막작)

감독 오가타 아키라 | 출연 다나카 유코, 기시베 잇토쿠 | 127분 | 제작 파라다이스 카페, 퍼그포인트 재팬 | 2005년

“마을에서 변하지 않은 것은 그녀뿐이다.” 오바 미나코에 대해 마을의 소설가는 그렇게 쓴다. 태어난 나가사키에서 청춘을 보내고 독신으로 늙어가는 50대 여인 오바 미나코. 새벽이면 우유를 배달하고 낮에는 슈퍼마켓 계산대를 지키다가 밤이면 방 안에 가득 찬 책을 한권씩 읽으며 잠드는 그녀는 아무도 방해하지 않으며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는다. 그러나 오바의 시선이 멈추는 대상이 딱 하나 있으니 학창 시절 남자친구인 구청 사회복지과 직원 다카나시다. 둘은 부모들의 불륜이 사고로 밝혀진 이후 멀어졌다. 암으로 죽어가는 다카나시의 아내는 남편이 아무도 먹지 않는 우유를 계속 배달시키는 것을 보며 “처음으로 남편의 속마음을 안 것 같아 기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오바에게 만나기를 청한다. 그러나 영화는 삼각관계에 집중하는 대신 다양한 나가사키의 이웃을 통해 기억과 사랑, 독서와 글쓰기의 의미를 사색한다. 운명적 고독의 탐구는 <토니 타키타니>를, 이미지의 운용은 <바다가 들린다>류의 재패니메이션을, 강인한 여인의 심호흡이 배어나는 스토리는 장율의 <망종>을 닮았다. 영화제 폐막작이다.

키스보다 간단

감독 와카마쓰 고지 | 출연 하라다 요시오, 하야세 유카코 | 94분 | 제작 와카마쓰 프로 | 1989년

‘뉴 섹스 라이프 스타일’이라는 부제를 단 이 경쾌한 영화는 키스보다 간단히 섹스를 하는 마아코의 S다이어리다. 해맑은 미모와 천진한 눈동자를 지닌 마아코는 내키는 대로 섹스를 하며 틈틈이 ‘남자의 생리, 여자의 몽정’이라는 소설을 끼적이는 대학생이다. 누구나 멋진 구석이 있다고 여겨서,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 안의 작은 구멍이 좀처럼 메워지지 않는다고 느껴서 마아코는 쉽게 섹스를 한다. 아버지가 모두 다른 네딸을 남기고 죽은 어머니는 마아코를 낳을 무렵 세 남자와 동시에 연애 중이었다. 마아코는 숱한 섹스 파트너 가운데 아빠일지도 모르는 남자와 아빠일지도 모르는 남자의 아들에게 깊이 끌린다. 신중한 섹스의 중요성을 가르치는 대신 영화는 캐릭터의 이름을 빌려 “연애만 많이 한 애들과는 다르다”고 마아코 나름의 미덕을 예찬한다. 영화 말미의 팔레스타인 사진은 성을 포함한 개인의 해방이 곧 자유를 위한 정치적 투쟁이라는 감독의 견해처럼 보인다.

사라쌍수

감독 가와세 나오미 | 출연 후구나카 고헤이, 효도 유카 | 99분 | 제작 닛카쓰 외 | 2003년

1997년 칸영화제 황금카메라상을 수상하며 극영화에 데뷔한 가와세 나오미는 고향인 나라 지방에서 줄곧 작업하며 도시 밖 일본사회와 자연의 이미지를 명상하도록 부추기는 영화를 만들어왔다. <사라쌍수>는 나라현의 먹 만드는 장인 아소의 집안 마당에서 시작된다. 어울려 놀던 쌍둥이 형제 중 케이가 갑자기 일어나 골목길을 달리고 슈운이 뒤를 따른다. 그러나 마치 길이 삼킨 것처럼 케이는 실종된다. 5년 뒤. 아소 일가는 케이를 언급하지 않고 평온히 살아가고 엄마는 새 아기를 임신한다. 그러나 케이가 남긴 공동(空洞)은 덮을 수 없다. 과묵한 소년으로 자란 슈운은 이웃 소녀 유에게서 잃어버린 반쪽의 가능성을 본다. 어느 날 날아든 비보와 그 조용한 파문을 통해 영화는 아소 가족이 생의 섭리와 화해해가는 과정을 그린다. 오래된 마을 나라현의 신앙과 축제가 그들의 몸부림을 양수처럼 보듬는다. 골목길의 영화라 할 만큼 자의식적인 트래킹 숏이 많다. 가와세 나오미가 엄마 역으로 출연했다.

박사가 사랑한 수식 (개막작)

감독 고이즈미 다카시 | 출연 데라오 아키라, 후카쓰 에리 | 117분 | 제작 <박사가 사랑한 수식> 제작 위원회 | 2005년

기억이 없으면 자아 정체성의 형성도 사랑도 불가능하다는 통념이 있다. 그러나 <박사가 사랑한 수식>은 수학의 정밀하고 투명한 논리를 빌려, 언어와 기억을 초월하는 인간성의 고유한 아름다움이 있음을 역설한다. 가정부로 일하며 홀몸으로 아들을 키우는 쿄코는 사고로 기억이 80분밖에 지속되지 않는 장애를 얻은 천재 수학박사에게 고용된다. 메모에 의존해 생활을 유지할 뿐 정상적 대화가 어려운 박사는 언어 대신 숫자로 쿄코와 소통한다. 쿄코가 신발 치수나 생일을 들려주면 박사는 그 숫자의 품성과 비밀을 들려주는 식이다. 박사에 따르면 허수는 겸손한 수이며, 소수는 보상을 바라지 않는 수다. 똑같은 대화가 반복됨에도 불구하고 신뢰는 쌓여가고, 쿄코의 어린 아들도 곧 이 특별한 공동체에 합류한다. 기억이라는 삶의 토대가 모래성처럼 무너진 박사와 그를 사랑하는 쿄코 모자에게 수학은 곧 위로와 구원의 철학이 된다. 고이즈미 다카시 감독은 <카게무샤> 이후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모든 작품에서 조감독으로 활동했고 2000년 구로사와의 유작 시나리오인 <비 그치다>를 연출해 장편 극영화에 데뷔했다.

취재협조 일본 문화청, 도쿄 이미지 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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