뤼미에르 형제가 사람들에게 영화라는 멋진 신세계를 선사한 지 110년인 올해. 일본의 영화 메이저 스튜디오 중 하나인 쇼치쿠가 11월에 110주년을 맞는다. 쇼치쿠는 1895년 교토의 유명 가부키 극장을 오타니 다케지로가 인수한 데서 시작되었다. 쌍둥이 형인 시라이 마쓰지로 역시 극장흥행업주였는데, 1902년 <오오사카 아사히 신문>에 두 형제의 이름을 따 ‘쇼치쿠의 신년’이란 제목의 기사가 나며 이름이 세상에 알려진다. 형제가 영화계에 뛰어든 건 1920년, ‘쇼치쿠 키네마 합명사’를 만들면서다. 1912년 일본 최초의 영화사로 닛카쓰가 태어났지만 중간에 문을 닫았던 데 비해 쇼치쿠는 중단없이 110년을 ‘생존’해왔다. 말이 쉽지, 100년 넘게 엔터테인먼트 회사가 유지되어온 건 세계에서 드문 예다. 쇼치쿠의 부침의 역사는 일본 영화사의 부침과 궤를 같이한다. 이 오래된 일본영화의 시니세(대를 잇는 노점포)의 과거와 오늘을 들어봤다.
도쿄의 긴자에서 몇분만 쓰키지 방향으로 걸어내려오면 영화와 가부키를 두 바퀴로 굴려온 쇼치쿠의 거리다. 먼저 일본 최대의 가부키 극장인 가부키좌가 눈에 들어온다. 1889년 처음 건설된 가부키좌는 1914년 쇼치쿠의 손으로 넘어왔다. 가부키 배우들은 모두 쇼치쿠 소속이라 보면 된다. 그 대각선엔 도게키 극장이 있다. 신작도 상영하지만 <대부> 감독판 상영, 제임스 딘 특별전 등 같은 라인업으로 고전영화 팬들이 몰리는 곳이다. 이 건물 안에 쇼치쿠 본사가 있다. 건너편엔 영화 연극 자료 전문인 오오타니 도서관 등이 있는 ADK 쇼치쿠 스퀘어, 근처엔 무대 신바시연무장까지 있다.
화려한 기색의 건물들과 달리 최근 몇년간 쇼치쿠는 급격한 변화를 겪었다. 100주년을 기념해 1995년 오후나 촬영소 부지 안에 개장했던 대형 오락시설 가마쿠라 시네마월드는 적자로 3년 만에 문을 닫았다. 급기야 99년에는 63년의 역사를 지닌 오후나 촬영소를 매각했으며, 자체제작 영화는 올스톱되다시피 했다. 교토에 시대극 전문으로 촬영소가 남아 있지만 오후나의 상실은 상징적인 것이었다. 도호, 도에이, 가도카와, 닛카쓰 등이 잇따라 촬영소를 리뉴얼해 대여장사를 톡톡히 하는 데 비해, 쇼치쿠는 자기 영화도 다른 영화사의 촬영소를 빌려 찍고 있다. 그나마 젊은 사카모토 준이치 현 사장을 중심으로 조금씩 상황이 호전되어 지난해 경영이 흑자를 기록했고, 자체제작 영화도 늘어나기 시작했다.
11월19일부터 시네마스위치 긴자에선 한달간 도쿄필름멕스국제영화제와 공동기획으로 쇼치쿠 110주년제가 열린다. 41편의 영화가 풍경, 생활, 여배우, 첫사랑, 긴자 등을 키워드 삼아 상영된다. 또 <아수라성의 눈동자> <망국의 이지스> <시노비>가 110주년 기념작으로 개봉됐고, 가부키를 스크린으로 보는 ‘시네마 가부키’가 전국에서 순차 상영 중이다. 110주년 기념 DVD로는 기노시타 게이스케 전집과 미소라 히바리 박스 세트가 발매됐다. 4천여편의 영화를 만들어온 영화사의 110년치곤 조용해 보이는 데 비해, 오히려 해외에서 평가는 더 높은 느낌이다. 올해 뉴욕영화제에서 쇼치쿠 회고전이 열렸고, 베를린·토론토·홍콩영화제가 특별공로상을 건넸다.
일본 최초의 토키영화 <마담과 아내>(1931), 최초의 컬러 극영화 <카르멘 고향에 돌아오다>(1951)를 비롯해 <당신의 이름은> <24개의 눈동자> <기쁨과 슬픔의 시간들> 등 대히트작을 낳은 쇼치쿠 역사는 말 그대로 찬란했다. 1965년 이래 10년마다 발행되는 <쇼치쿠사>는 각각 1천 페이지가 넘는 ‘무기’에 가까운 두께다. 하지만 뭐라 해도 외국인에게 쇼치쿠 하면 우선 떠오르는 이미지는 오즈 야스지로, 쇼치쿠 누벨바그, 그리고 <남자는 괴로워> 시리즈일 게다. 사실 이는 전후 쇼치쿠를 상징하는 각각의 키워드이기도 하다
감독중심주의 그리고 오즈 야스지로
일본영화를 흔히 감독중심주의 또는 디렉터 시스템이라 하는데, 그 중심이 오후나 촬영소였다. 오즈는 그 절정기를 살았다.
1920년에 만들었던 가마타 촬영소가 관동대지진으로 파괴된 뒤 쇼치쿠는 1936년 야심차게 가마쿠라 부근의 오후나 9만평 땅을 사들였다. 촬영소만 3만평, 당시 휑한 이 부지에 따로 하수도 시설까지 만들었다. 쇼치쿠의 프로듀서였던 야마노우치 시즈오는 “오후나는 ‘동양의 할리우드’를 꿈꿨고, 당시 수많은 스타와 감독들이 모여 살았던 가마쿠라는 베벌리힐스였던 셈”(<쇼치쿠 오후나 촬영소를 기억하는 책>) 이라 말한다. 하마노 야스키 도쿄대 교수도 가마쿠라를 “일종의 문화계 인텔리들의 커뮤니티 공간”이었다고 말한다.
전성기 때는 한해 50여편의 영화가 오후나에서 만들어졌다. 제작기간을 감안하면 동시에 7∼8편 가까운 영화가 만들어진 셈이다. 수백명의 전속 스탭과 배우들이 출퇴근했고 스탭들은 ‘오즈조’, ‘기노시타조’처럼 각각의 감독 밑에 소속되어 있었다. 일이 없으면 날마다 출근할 의무도 없었다. 쇼치쿠 영화를 일군 기도 시로의 방침인 이런 사풍과 독특한 ‘조’ 문화는 강력한 디렉터 시스템을 뒷받침했다. <쇼치쿠 110년사>의 책임자인 다나카 고기는 “촬영소는 자치제로 운영되었는데, 입사시험도 회사가 아니라 이 조감독 자치모임에서 출제했을 정도”라고 회고한다.
인재들이 모여든 만큼 빠져나가는 이도 많았다. 나루세 미키오에 대해 기도 사장이 “쇼치쿠에 두명의 오즈는 필요없다”고 말한 건 유명한 일화다. 신도 가네토, 이마무라 쇼헤이, 스즈키 세이준, 구마시로 다쓰미, 가와시마 유조 등이 쇼치쿠 출신이다. 1954년을 전후로 닛카쓰가 제작을 재개하며 사람을 가장 많이 뺏긴 쇼치쿠는 급거 모집을 해야 할 정도였다. 마지막까지 쇼치쿠 사람으로 남은 이는 오즈, 기노시타 게이스케, 노무라 요시타로, 야마다 요지 정도다. 이치야마 소조 필름멕스 프로그래머는 “일본 영화계에 많은 인력을 길러냈다는 것도 중요한 기여”라 말한다.
이미 1920년 전문배우학교를 설립했던 쇼치쿠에선 스타들도 많이 나왔다. 일부는 프리가 되었지만 다나카 기누요, 다카미네 미에코, 우에하라 겐, 사다 게이지, 하라 세쓰코, 다카미네 히데코 등이 전전과 전후를 걸쳐 활약한 스타들이다. 1943년 전쟁격화로 중단되기 이전까지 쇼치쿠는 대간부, 간부, 간부대우 등의 서열을 매겨 해마다 배우 승격식을 열었다. 전전의 대여배우 다나카 기누요는 쇼치쿠의 마지막 ‘대간부’다. 오후나 촬영소의 배우관에는 신작 촬영마다 문패가 바뀌었지만 그의 방만큼은 스케줄이 없어도 문패가 계속 걸려 있었다고 한다. 할리우드의 스튜디오 전성기를 방불케 하는 이야기다.
이미 오즈가 전전에 탁월하게 성취해낸 소시민 드라마는 쇼치쿠의 상징이 되었고, 밝고 명랑하되 씁쓸한 웃음이 배어 있는 서민들의 삶을 그렸던 이 영화들은 ‘오후나조 영화’라고 불렸다. 전전부터 오후나조 영화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대부분 직업여성인 것도 특색이다. 쇼치쿠의 영화 광고에는 늘 ‘밝고 즐거운 쇼치쿠 영화’라는 문구가 들어갈 정도였다. 도호의 도시풍의 세련된 드라마, 닛카쓰의 경향영화, 다이에의 멜로드라마, 도에이의 시대극까지, 각 스튜디오가 자신의 색깔을 내걸고 영화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