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감독의 스튜디오, 쇼치쿠 110년 [3] - 쇼치쿠가 사랑한 감독들
2005-11-08
글 : 홍성남 (평론가)
오즈 야스지로, 시미즈 히로시, 고쇼 헤이노스케, 기노시타 게이스케, 고바야시 마사키

역사적인 견지에서 보자면, 후지산을 담은 쇼치쿠의 그 오래되고 친숙한 로고 숏은 이제 영화의 인장이 스타가 아니라 감독에게 속하게 되었음을 알리는 한 증표이기도 했다. 일본 영화사를 서술하는 이들은 그런 흐름이 대략 1920년대 초, 즉 쇼치쿠가 당시 할리우드에서 카메라맨으로 활동하던 헨리 고타니(히로시마에서 태어나 아홉살 때 부모와 함께 하와이로 이주했던)를 데려와서 영화에 대한 선진의 기술들을 전수받은 때로부터 발원했다고 쓴다.

하지만 영화사 시스템의 중심을 스타에서 감독으로 완전히 옮겨놓은 이는 기도 시로(1894∼1977)라는 인물이었다. 도쿄제국대학을 졸업하고 1924년, 서른이란 이른 나이에 쇼치쿠 가마타 촬영소의 소장 자리에 오른 그는 신파극과 가부키의 묵은 유산을 털고 내용과 스타일 양면에서 ‘모던한’ 풍취가 나는 (순)영화들을 제작하고자 했다. 그의 영향을 받은, 또는 그와 뜻을 같이하는 쇼치쿠의 감독들과 조감독들은 기도 앞에서 토론할 기회를 가졌고 외국영화들을 보면서 콘티를 그려가며 그것들을 연구하기도 했다. 이른바 ‘영화감독의 스튜디오’는 그렇게 기반을 다져갔다.

스타 오즈 야스지로와 가려진 천재 시미즈 히로시

카메라 오른쪽에 서있는 사람이 시미즈 히로시 감독

기도가 지휘권을 잡은 이래로 쇼치쿠는 일본 영화사의 주역들에 해당하는 수많은 인재들을 배출해냈다(아울러 이미 인정을 받았거나 아니면 아직 날개를 펴지 못한 그들 상당수를 떠나보내기도 했다). 그 가운데 으뜸의 자리에 차지할 인물로 오즈 야스지로(1903∼63)를 꼽는 데엔 아마도 이견이 없을 것으로 보인다. 주지하다시피 그만의 엄정한 시선으로 사소한 가족사를 바라보며 시간과 인생의 흘러감을 성찰하는 그의 영화들은 영화사의 그 어떤 것과도 구별되는 독자적이고 매혹적이며 아름다운 ‘우주’라고 부를 만한 것이다. 오즈는 35여년간의 감독 생활 중 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거의 쇼치쿠의 영토를 벗어나지 않고서 그 우주를 빚어냈으며 그것도 그 안에서 거의 가족이라고 할 만한 것을 꾸려가면서 그렇게 했다. 그런 면에서 그는 기도가, 그리고 쇼치쿠가 영화감독으로서 이상에 가깝다고 생각했을 만한 인물이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니 쇼치쿠가 현재 활동하는 가장 뛰어난 감독들 가운데 하나인 허우샤오시엔을 불러 오즈에 대한 헌정영화 <카페 뤼미에르>를 만들게 한 것은 응당 갖춰야 할 예우를 한 것처럼 보인다. 이 영화가 처음 공개된 2003년은 오즈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여서 유난히도 오즈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많이 나돌던 때였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그 이야기들 속에서 쇼치쿠에서 오즈와 함께 활동한(전후에는 쇼치쿠를 나와 영화사를 창설했지만), 게다가 오즈와 동갑인, 그리고 미조구치 겐지가 한마디로 “천재”라고 부른 인물이 많이 묻혀버렸다는 점이다. 그는 시미즈 히로시(1903∼66)이다.

촬영장의 오즈 야스지로(가운데) 감독

시미즈는 오즈와는 절친한 사이였지만 다른 점이 눈에 띄는 인물이었다. 예컨대 오즈는 술마시길 좋아했지만 시미즈는 그렇지 않았고, 오즈가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데 반해 시미즈는 두번 결혼했다. 둘 사이의 차이점은 영화에서도 고스란히 이어졌다. 오즈가 시선을 가정 내에 두길 좋아했던 데 비해 시미즈는 집 밖으로 나가는 사람들을 즐겨 다루었다. 계획에 따라 정밀하게 촬영에 들어갔던 오즈식의 방식은 시미즈가 선호할 만한 방식이 아니었다. 그는 전후 트래킹의 테크닉으로 아름다움과 효과를 성취하곤 했다는 점에서도 엄정한 구도를 중시해 여간해서는 카메라를 움직이지 않았던 오즈와 달랐다.

아마도 이런 시미즈를 정의하는 중요한 어구들 가운데 하나가 되는 것은 ‘길 위의 존재’쯤이 되지 않을까 싶다. <아리가토 상>(1936) 같은 로드무비를 만들었던 그는 스튜디오를 벗어나는 것에서 즐거움을 찾는 영화감독이었다. 그는 현장촬영을 선호했고 그 과정에서 별 준비없이 맞닥뜨리는 상황들을 영화 속에 끌어들이곤 했다. 그에게는 종종 풍경이 인물(의 심리)보다 더 가치를 가진 것이었기에 ‘연기’를 과시할 전문배우를 굳이 기용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그래서 그는 <바람 속의 아이들>(1937) 같은 아이들에 대한 영화들도 즐겨 만들 수 있었다). 확실히 시미즈는 오즈와는 다른 방식으로 모던하고 또 래디컬한 고전기의 시네아티스트였다.

고쇼이즘을 아십니까

오즈와 시미즈의 동년배로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또 다른 쇼치쿠의 중요한 영화감독은 고쇼 헤이노스케(1902∼81)이다. 주변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사람들의 일상사를, 따뜻한 시선으로 그리고 현대적인 방식으로 그린다는 기도의 의도를 처음으로 제대로 현실화한 감독은 시마즈 야스지로(1897∼1945)였다. 그 시마즈의 조감독 생활을 했던 고쇼는 스승의 활동 영역이었던 서민극을 더욱 세련되게 하면서 자기 것으로 만들어냈다. 고쇼의 세련됨이란 것은 우선 에른스트 루비치의 것을 비롯한 외국영화들로부터 보고 배운 바를 자기 안으로 끌어들이는 데서 생겨났다. 그가 특히 눈여겨본 것은 개별 숏들의 짧은 길이와 클로즈업을 적절하게 활용하는 분석적인 편집 방식이었다. 이걸 자기 영화에 적극적으로 그리고 효과적으로 적용한 그는 1920년대 중반쯤에 이미 다른 이라면 하나의 숏으로 찍을 것을 세개의 숏으로 나누어 찍는 영화감독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한편으로 고쇼는 이 서양식 테크닉에 일본적인 미의식을 접합해냈다. 그 자신이 하이쿠를 짓기도 했던 그는 그 일본 전통양식을 구성의 요소로 활용할 줄 알았다. 이를테면 고쇼의 영화는 새장 속의 새를 보여주는 짧은 숏을 삽입해 함축과 대조의 묘미를 만들어내곤 했던 것이다. 그의 영화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처럼 외래적인 것과 전통적인 것이 결합되어 만들어진 틀 안에서 보통 사람들의 사소한 이야기를 웃음과 슬픔이 함께 묻어나는 미묘한 톤으로 매만져냈다는 점이다. <인생의 짐>(1935) 같은 그런 독특한 영화들은 마치 루비치의 ‘루비치 터치’와 유사하게 ‘고쇼주의’(Goshoism)라는 용어를 필요로 하는 것들이었다.

순결함에 대한 연구자, 기노시타 게이스케

기노시타 게이스케 감독

고쇼 말고도 시마즈를 스승으로 받드는 영화감독들로는 도요다 시로, 요시무라 고자부로, 나카무라 노부오 등이 있었는데 이 리스트에서 빠질 수 없는 이름 하나는 바로 기노시타 게이스케(1912∼88)이다. 1943년에 데뷔작(<꽃피는 항구>)을 만든 이래로 그는 풍자극에서 홈드라마까지, 그리고 서정적인 리얼리즘영화에서 양식화의 욕구가 강한 영화에 이르기까지, 장르와 양식 면에서 스펙트럼의 넓은 영역을 침투하면서, 그것도 두루 빼어난 행보를 밟으며 작품 활동을 했다.

평자들은, 그리고 감독 자신도 그처럼 다양한 색채들이 혼합된 기노시타의 필모그래피에서 기어이 관통하는 어떤 흐름을 찾아내곤 하는데, 그건 순결함에 대한 집착 혹은 애착이라는 식으로 불릴 만한 것이다. 기노시타는 순결함, 아름다움, 진실함을 동등한 가치를 갖는 덕목으로 파악한다. 그리고 그것들이 파괴되었을 때 어떤 비극이 생기는가를 센티멘털리즘의 기운을 지워내지 않은 정직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 실례가 되는 것이 <일본의 비극>(1953)이나 <스물 네 개의 눈동자>(1954) 같은 영화들이었다. 이 영화들에서 기노시타는 전쟁과 그로 인한 혼란이 어떻게 착한 마음을 가진 여주인공의 삶을 힘들게 하는지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 같은 고난을 몸으로 느끼는 당대 관객에게 감동을 주었고 아울러 고통의 원인에 대한 다소 순진한 설명을 듣는 그들에게 정신적인 위안을 주었다. 쇼치쿠의 1950년대 그리고 일본의 1950년대를 대표하는 감독인 기노시타는 더 ‘여성적인’ 방식으로 구로사와 아키라와 함께 휴머니즘의 문제를 절실하게 고민하는 인물이었다.

세상에 대고 외쳐라, 고바야시 마사키

고바야시 마사키 감독

고바야시 마사키(1916∼96)는 이른바 ‘기노시타조’에서 활동했음을, 그리고 자신이 거기서 감독으로 승진이 된 첫 번째 인물임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러니 만큼 그의 데뷔작(<아들의 청춘>(1952))이 기노시타의 영향력이 묻어나는 서정적인 홈드라마였다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워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굳이 명칭을 붙이자면, 기노시타처럼 휴머니스트이긴 했으되 스승보다는 더 격하고 강직한 자유주의적인 휴머니스트였다. 포로수용소에 억류되어 있기까지 했던 전쟁의 경험은 그에게 강렬한 원체험 같은 것이었던 듯싶다. 전쟁이란 절대악을 경험한 뒤로 고바야시는 “광기의 시대에 진지한 삶을 살려고 하는” 가지(<인간의 조건>(1959∼61)의 주인공)는 바로 자신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런 그가 만들고 싶어했던 것은 사회에 대해 어떻게든 논평을 가하는 유의 영화였다.

그렇게 보자면, 그의 세 번째 작품이 되는 <벽 두터운 방>(1953)이야말로 첫 번째 고바야시적인 영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고바야시는 감옥생활을 하는 B급, C급 전범들이란 잔혹한 시스템의 희생자들은 아닌가라는 문제를 제기했다. 이같은 주제의 민감함 때문에 기도는 영화의 상영을 3년이나 미뤘다. 이후로 고바야시는 시대와 사회의 억압을 다루는 영화들을 계속 만들어갔다. 러닝타임이 거의 열 시간에 이르는 3부작 <인간의 조건>은 전쟁에 대한 그의 경험과 신념이 모두 녹아든 역작이었다. 이 밖에도, 유망한 야구선수의 스카우트 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현대극 <당신을 삽니다>(1956)에서도, 주군 없는 사무라이의 이야기를 그린 시대극 <할복>(1962)에서도, 세상은 항상 부패한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다는, 그래서 그것을 우선 드러내야 한다는 고바야시의 신념은 여실히 유지되었다.

쇼치쿠의 이단아 오시마 나기사

오시마 나기사(오른쪽) 감독

고바야시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나는 항상 권위에 도전했다고 생각한다. 그건 내 인생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발언으로 볼 때나 그의 영화들을 살펴볼 때, 분명히 고바야시는 뒤 이어 올 새로운 흐름의 선구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고 평가할 만했다.

그런데 그의 쇼치쿠 영화사 후배가 되는 인물은 부정의 정신에서 만큼 선배를 훨씬 능가하는 인물이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른바 ‘쇼치쿠 누벨바그’의 핵심이라고 할 오시마 나기사(1932∼)는 오즈를 비롯한 기존의 일본영화 전체를 혐오한다고 공공연히 말하는 사람이었다. 그처럼 앞으로 순종적인 일본영화의 전통과 그뿐 아니라 일본의 기성 정치와 지배 이데올로기, 허위의식, 위선과도 영화로 격렬하게 싸울 그는 자신이 몸담고 있는 영화사 안 행보에서도 앞선 시대의 (조)감독들과 달랐다. 그는 감독들의 지시를 듣고 열심히 달려가는 ‘뛰어난 조감독’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는 남을 위해서 하는 일은 되도록 줄이고 대신 열심히 시나리오를 쓴 대가로 감독 승진의 기회를 얻었다. 데뷔작 <사랑과 희망의 거리>를 만들고난 다음해인 1960년에 그는 모두 걸작인 세편의 영화(<청춘 잔혹 이야기> <태양의 묘지> <일본의 밤과 안개>)를 발표하며 ‘누벨바그’를 선포하고 또 이끌었다. 그 가운데 마지막 작품은 정치적으로도 형식적으로도 대단히 급진적이었으니 쇼치쿠 간부들을 당혹게 할 만했다. 개봉 당시 사회당 당수의 피살 사건이 일어나자 기도는 그걸 빌미삼아 <일본의 밤과 안개>의 상영을 나흘 만에 중단하고 만다. 분통이 터진 오시마는 쇼치쿠와 결별을 고했다.

이후로 누벨바그의 다른 멤버들, 즉 오시마와 비교적 유사한 문제의식을 공유했던 요시다 기주(1933∼)도, 오시마보다는 전통적인 미학(주의)에 더욱 경도되었던 시노다 마사히로(1931∼)도 시스템의 이런저런 압력이 싫어 쇼치쿠를 나왔다. 남은 것은 오시마의 입사동기이면서 그와는 아마 가장 반대편에 서 있지 않을까 싶은 야마다 요지(1931∼)였다. 기도가 원래 모던함을 내세우며 촉구했던 영화적 틀, 하지만 이제는 그 모던함의 광채가 많이 사라져 스스로 묵은 ‘전통’이 된 그것을 거의 유일한 작동 원리로 삼고서 문을 단단히 걸어 잠근 듯한 성채에서는 활력의 농도가 슬슬 옅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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