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구의 일본 아가씨
港の日本娘 | 1933년 | 감독 시미즈 히로시 | 출연 오이카와 미치코, 이노우에 유키코
시미즈 히로시의 영화들에는 추락해버려서 떠다니는 신세가 된 영혼들이 자주 나온다. <항구의 일본 아가씨> 역시 그런 주인공이 사랑과 우정의 문제로 동요(動搖)를 경험하는 이야기를 다루는 영화다. 요코하마에 사는 스나코는 헨리라는 이름의 멋지게 생긴 남성과 교제 중이다. 하지만 자신의 남자친구가 다른 여자도 만나고 있다는 사실을 안 그녀는 남자친구의 다른 연인을 총으로 쏜다. 세월이 흘러 스나코는 교도소를 나와 고베의 바로 흘러들어온다. 그 사이에 헨리는 스나코의 절친한 친구 도라와 부부 사이가 되어 있었고 고향에 돌아온 스나코는 그들과 재회한다. <항구의 일본 아가씨>는 이야기의 얼개만 놓고 보면 뻔하게 감상적인 멜로드라마를 예상할 수 있는 영화이지만 인물들의 심리보다는 어떤 환경 속에 놓인 인물을 관찰하는 시미즈 특유의 시선에 의해 세련미를 획득했다. 여기에는 병행과 생략의 방식을 효과적으로 활용한 형식도 한몫했다. 도널드 리치는 이걸 두고 “스타일의 승리”라고까지 불렀다.
잔국물어
殘菊物語 | 1939년 | 감독 미조구치 겐지 | 출연 하나야기 쇼타로, 모리 마코토
이전에 이미 <오사카 엘레지>(1936)나 <기온의 자매>(1936) 같은 영화들로 명성을 얻은 미조구치 겐지가 쇼치쿠에서 작품 활동을 한 것은 1930년대 후반부터 대략 10년 정도가 된다. 그 첫 번째에 해당하는 것이 <잔국물어>이다. 이른바 ‘예도물’(藝道物)이라 불리는 이 영화는 한 가부키 배우와 그에게 헌신하는 여성의 인생유전 이야기를 우아하고 감동적으로 들려준다. 가부키 명문의 양자인 기쿠는 자신에게 가부키 배우로서 실력이 아직 모자란다고 솔직한 이야기를 해준 오토쿠와 사랑을 키운다. 하지만 둘 사이의 사랑이 기쿠 가족의 반대에 직면하자 기쿠는 스스로 성공하겠다며 집을 나온다. 봉건적 가족제도의 부당함을 내밀하게 이야기하는 이 영화는 형식적인 출중함으로 눈을 끌게 만든다. 호흡을 길게 가져가며 멀찍이 거리를 두고 대상을 포착하는 미조구치적 형식체계는 여기서 원숙의 경지에 올랐다.
도쿄이야기
東京物語 | 1953년 | 감독 오즈 야스지로 | 출연 류 치슈, 히가시야마 치에코
<도쿄이야기>는 서구에 강한 인상을 남겨준 최초의 오즈 영화로 이후로 오즈의 명실상부한 그의 대표작이 된 작품이다. 초창기에 미국에서 소개되었을 때 붙은 제목(<그들의 첫 번째 동경 여행>)처럼 영화는 자식들을 보러 도쿄에 온 노부부의 이야기를 그린다. 하루하루 살기에 바쁜 친자식들은 이들을 귀찮아할 뿐이고 오히려 그들을 따뜻하게 맞아주는 것은 전쟁 중에 남편을 잃은 며느리이다. <도쿄이야기>에 대해 오즈 자신은 자식들이 커가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일본 가족제도의 붕괴를 그리려고 했다고 말한 바 있다. 물론 영화는 사회의 변화를 다루고 있기도 하지만 그 변화란 오즈에게 시간의 흐름이라는 세상의 근원적인 현상에 속하는 것이다. 결국 <도쿄이야기>는 시간의 흘러감, 그래서 그 안에서 겪는 다양한 감정들의 흘러감, 그렇게 흘러가는 삶을 이야기하는 영화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스물 네 개의 눈동자
二十四の瞳 | 1954년 | 감독 기노시타 게이스케 | 출연 다카미네 히데코
<스물 네 개의 눈동자>가 기노시타 게이스케의 최고작으로 꼽힐 만한 영화인가에 대해서는 충분히 의문을 품을 수 있지만 이것이 대중으로부터 가장 사랑받은 그의 영화(그리고 일본영화)라는 점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영화는 작은 섬마을 분교에 부임한 젊은 여선생 오이시가 1928년부터 이후 20년 동안 겪는 일들을 섬세한 시선으로 들여다본다. 전쟁이란 대단한 사건이 포함된 그 20년이란 시간을, 감상적이며 서정적인 이 영화는, 오이시에게 서서히 상실과 슬픔들이 쌓여가고 그러면서도 인고해야 했던 시간이었다고 말한다. 시대의 아픔에 직면한 이들의 슬픔을 강조하는 영화의 순진한 시각은 어떤 이들, 이를테면 좀더 강직한 누벨바그 세대 감독들에게는 비난과 배척의 대상이 될 만했다. 어쩌면 <스물 네 개의 눈동자>가 당대 일본 관객에게 감동을 준 것은 그래서였는지도 모른다. <키네마준보>에서도 그 해 최고작 1위로 이 영화를 선정했다.
일본의 밤과 안개
日本の夜と霧 | 1960년 | 감독 오시마 나기사 | 출연 와타나베 후미코, 구와노 미유키
내용과 형식 양면에서 영화의 정치성을 사고하는 <일본의 밤과 안개>는 아무리 혈기왕성한 오시마라도 보수적인 쇼치쿠 영화사 안에서 이런 영화를 만들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영화다. 영화는 각각 구좌파와 신좌파의 일원이었던 신랑과 신부의 결혼식장을 카메라를 가져간다. 갑자기 이 장소에 경찰에 쫓기는 다른 멤버가 나타나면서 식장은 돌연 전투장으로 변한다. 영화는 이제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학생운동의 전술적 과오에 대한 논쟁의 자리를 마련한다. 디스커션드라마와 음울한 호러무비를 기묘하게 결합한 듯한 이 영화에서 또 주목할 것은 영화의 독특한 형식이다. 영화는 부분적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는 등의 연극적인 기법과 극도의 롱테이크를 적극 활용해 형식의 정치성이란 문제를 치열하게 고민한다. 어느모로 보나 이 대담한 정치(교육)영화를 두고 데이브 커 같은 영화평론가는 마오이스트 고다르를 예견한 영화라고 쓴 적도 있다.
할복
切腹 | 1962년 | 감독 고바야시 마사키 | 출연 나카다이 다쓰야, 미쿠니 렌타로
고바야시 마사키는 굳건한 권력에의 저항을 주제로 영화를 만든 이였다. 그는 자신의 첫 시대극이 되는 <할복>을 만들면서도 그런 관심사를 버리지 않았다. 이번에 억압적인 권력과 적대하는 주인공은 로닌(주군이 없는 사무라이) 츠쿠오이다. 1630년의 어느 날, 웅장한 사무라이 가문에 들어선 그는 더이상의 비참함을 견딜 수 없어 그곳에서 할복 자살을 하겠다고 주장한다. 이어서 영화는 플래시백을 통해 실은 복수의 결의를 하고 온 그가 어떻게 해서 그곳까지 왔는가를 알려준다. 시스템이 부과한 명예라는 것의 공허함과 그에 따른 시스템의 잔악한 억압을 이야기하는 <할복>은 그 주제의식의 진중함만이 딱딱하게 다가오는 영화는 아니다. 영화는 여러 상징들, 공간, 행위 등을 세심하게 조율해서 보는 이로부터 여러 색깔의 숨차오름을 경험하게 한다. 아마도 그래서 칸영화제에서 수상했을(심사위원 특별상) 이 영화는 고바야시라는 이름을 서구에 알린 첫 작품이다.
마른 꽃
乾いた花 | 1963년 | 감독 시노다 마사히로 | 출연 이케베 료, 가가 마리코
이시하라 신타로의 원작을 영화화한 <마른 꽃>은 그 이듬해에 만들어진 정교한 형식의 시대극 <암살>과 함께 시노다 마사히로가 쇼치쿠에서 만든 최고작으로 꼽을 만한 영화다. 영화의 주인공 무라키는 살인죄로 수감되었다가 풀려난 야쿠자이다. 다시 자신의 친숙한 ‘어둠의 세계’로 돌아온 그는 도박장에서 사에코라는 여자를 보게 되고 삶의 흥분감을 구하려 드는 그녀의 묘한 매력에 끌리게 된다. 시노다 자신은 <마른 꽃>이 뒤이어 유행의 물결을 탈 야쿠자영화의 모형이 되었다고 자신하지만 실은 이것은 진기(仁義)를 내세우고 액션을 강조하는 전형적인 야쿠자영화는 아니다. 오히려 <마른 꽃>은 암흑 세계의 구조가 되는 의식(儀式), 흥분의 원천으로서의 마조히즘과 파멸충동 같은 문제를 엄격한 미의식이 담긴 형식 안에 담아내는 암울하게 아름다운 영화라고 봐야 한다. 스토리보다는 비주얼이 앞서고 니힐리즘적 색채가 강한 이 영화는 그걸 빌미로 9개월이나 개봉이 연기되기도 했다.
남자는 괴로워
男はつらいよ| 1969년 | 감독 야마다 요지 | 출연 아쓰미 기요시
30년 가까운 긴 세월 동안 48편이나 만들어진 <남자는 괴로워>는 쇼치쿠의 ‘얼굴’ 같은 영화였다. 1958년에 방영된 TV드라마를 스크린으로 옮겨놓은 이 장기 시리즈 영화는 1969년에 첫걸음을 뗐다. 이 때부터 가끔씩 집에 돌아오곤 하는 떠돌이 행상 도라상의 오래 이어질 영화적 유랑이 시작된 것이다. 어이없는 말과 행동도 잘하고 다혈질이기도 하지만 마음속에는 선한 마음을 품고 있는 도라상은 아름다운 여인과 사랑에 빠지지만 그 결실을 맺지는 못한다. 1편에서 보여준 그런 이야기는 이후에 계속해서 미묘한 변형과 함께 반복되었다. 시리즈의 대부분을 연출한 야마다 요지는 그런 점에서 <남자는 괴로워>를 ‘라면’이라고 불렀다. 이 라면을 통해 일본 관객은 인정이 살아 있고 센티멘털한 로맨스와 자유로운 유랑이 가능한, 이제는 사라져가는 시대를 추억했다. 시리즈는 주연을 맡은 아쓰미 기요시가 1996년 사망하면서 끝을 맺었고 그해에 야마다는 그에 대한 오마주영화인 <무지개를 잡은 남자>를 만들었다.
복수는 나의 것
復讐するは我にあり | 1979년 | 감독 이마무라 쇼헤이 | 출연 오가타 겐, 미쿠니 렌타로
이마무라 쇼헤이는 쇼치쿠에서 조감독 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결혼도 해야 했는데 자기 앞에는 거의 50명이나 되는 조감독이 대기하는 있는 불확실한 상황에서 그는 쇼치쿠를 나와 닛카쓰로 향했다.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쇼치쿠와 손잡고 이마무라는 아마 영화 역사상 가장 창의적인 연쇄살인자라고 할 만한 영화, 그리고 그에게 상업적·비평적 성공을 안겨준 영화를 만들었다(그 덕에 그는 은행으로부터 집을 되찾았고 해외에 자신의 이름도 알렸다). 실화를 기반으로 만든 이 영화에서 이마무라는 교활한 사기범에다가 잔인한 연쇄살인자인 한 남자를 거의 잔인하다고 표현할 만큼 비정한 시선으로 들여다본다. 이따금 막막한 에로티시즘과 블랙 유머를 결합하는 그의 손길은 그 인물이 도대체 어떤 존재인지를 파고들 권리가 없다고 느끼는 것처럼 보인다. 오히려 그래서 <복수는 나의 것>은 영화를 본 이들에게 심원한 불쾌감을 안겨준다.
죽음의 가시
死の棘 | 1990년 | 감독 오구리 고헤이 | 출연 기시베 이토쿠, 마쓰자카 게이코
오구리 고헤이의 세 번째 작품인 <죽음의 가시>는 오구리의 <결혼의 정경>과도 같은 영화다. 영화는 시작하자마자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는 듯 보이는 부부를 보여준다. 이렇게 오기까지는 그들 사이에 꽤 많은 사연이 작동했을 것만 같지만 불친절하기 짝이 없는 영화는 영화 이전의 이야기들을 상세하게 들려주고 싶은 마음이 없어 보인다. 대신 아마도 남편에게 생긴 다른 여자 때문에 발작적인 흥분 상태에 빠져드는 여자 미호와 그녀의 행동에 어떻게든 대처를 해야 하는 남편 도시오의 관계를 집요하게 보여준다. 그 집요함 속에서 영화는 흔히 정상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사람과 그에 ‘대답’해야 하는 남편의 이야기가 또 다른 우아한 사랑 이야기임을 천천히 드러나게 한다. 게다가 엄숙한 양식화를 이룬 화면은 그 이야기를 결국에 세속을 넘어선 것으로까지 올려놓는다. 억눌림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죽음의 가시>는 칸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