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영화광들이 집단으로 출몰하고 동거동락하는 세곳의 ‘서식처’는 영화산업의 시스템에서 비껴 있고 그래야 옳다. 그러나 자유롭게 상상하고 사유하는 ‘게토’는, 어쩔 수 없이 한국영화의 에너지이자 꿈이기도 하다. ‘젊은 영화광들에게 묻는 한국영화의 오늘과 내일’의 설문조사 결과는 평단과 충무로로 대별되는 기성 세대의 인식과 평가를 살짝 배반하면서도 슬쩍 공유하는 흥미로운 풍경을 보여준다. 세 부류의 취향이 일정한 패턴을 보여주면서도 현장에 가장 근접한 영화아카데미는 영화의 이상 혹은 목적이라는 대목에 이르러선 다른 두 부류와 뚜렷한 ‘노선 차이’를 드러낸다.
어쨌든, 가장 단순하게 뭉뚱그리면 이들은 고결한 작가주의나 취향없는 상업영화 어느 한쪽을 편애하지 않고 이를 동시에 꿈꾸는 가치기준을 자신있게 들이밀고 있다. 단적으로, 박찬욱을 이 시대의 화두처럼 내세운 반면 홍상수(나아가 김기덕까지)를 부재시킨다. 그리고 김동원의 <송환>은 홍상수보다 더 완벽하게 소외된다. 상업적 성공을 견인하지 않는 예술은 더이상 예술이 아닌 듯 보인다. 만장일치에 가깝게 지명된 이들의 미래는 봉준호다.
박찬욱 예고된 스타, 봉준호는 우리의 미래
‘현재 활동 중인 한국영화 감독 중 가장 높게 평가하는 인물’을 묻는 항목에서 세 집단 모두 5순위 안에 공통으로 꼽은 감독은 박찬욱, 임권택이다. 영화과 학생들이 홍상수를 배제한 대신 끄트머리에 김기덕을 수용했고, 영화아카데미는 거꾸로 홍상수를 끌어안은 대신 김기덕을 배제했다. 박찬욱에 대한 열광이 어느 정도 예견된 결과라면, 봉준호에 대한 지지 일변도는 놀라울 정도다. 영화과와 영화아카데미에서 공히 2위로 압도적 지지를 받았을 뿐 아니라 박찬욱이 과대 평가를 묻는 항목에서 최대 이슈가 된 반면, 봉준호에 대한 이의제기는 전무에 가깝다. 무엇보다 향후 가장 주목받을 감독으로, 부동의 1위에 꼽혔다.
그래서 ‘최고의 한국영화’에서 박찬욱의 <올드보이>와 봉준호의 <살인의 추억>이 1, 2위를 다투는 건 자연스럽다. 이들은 상업적 감각이 뛰어나다는 평가에서도 높은 점수를 받았다. 상업적 감각을 묻는 질문에서 1천만 관객을 동원한 강제규와 강우석이 1, 2위를 다투고 있으나 그 다음 자리는 이들 차지다. 봉준호와 더불어 ‘약진’이 돋보이는 감독은 장진이다. 영화과 학생들이 특히 선호하는 경향을 보인 장진은 상업적 감각과 과소평가를 묻는 항목에 자주 출몰했으며 효율적인 영화제작 항목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최소자본으로 최단기간 완성의 틀을 유지하고 있는 김기덕은 효율적인 영화제작에선 독보적 1위를 차지했으나 그 밖의 대부분 설문에선 침묵을 강요당했다. 과대평가 항목에서 단연 1위인 박찬욱에 이어 2위를 두번씩이나 차지한 것으로 봐선 비호감의 대상으로까지 읽힌다.
과대, 과소평가를 묻는 항목에서 젊은 영화광들이 기성 세대를 또 한번 비껴가는 대목이 눈에 띈다. 영화아카데미를 뺀 나머지 두 그룹이 임권택을 과대평가 항목에서 상당히 비중있게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 임상수를 과소평가 항목의 인기 스타로 떠올렸는데, 임상수에 대한 많은 언급들은 이들이 영화가 예민한 사회적 발언이라는 가치를 ‘여전히’ 의식하고 있는 증거처럼 보이기도 한다.
최고의 배우는 황정민, 욘사마 열풍엔 부정적
박찬욱이 예고된 스타였다면, 배우의 ‘깜짝 스타’는 황정민이다. 세 그룹 모두 이견없이 1위로 밀었다. 이른바 빅3의 화제작이 수면 밑에서 움직이고 있는 정황을 감안하더라도 이건 일종의 지각변동으로 받아들여도 무방할 정도다. 특히 영화아카데미쪽은 최민식, 송강호를 모두 순위에서 뺐고, 과대평가 항목에서 이들에 대한 언급이 심심찮게 등장한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 정재영의 약진도 빼놓을 수 없는 조짐이며, 과소평가의 임상수에 비유될 법한 배우 자리는 차승원이 차지했다.
여자배우에선 전도연, 문소리가 이의제기 없는 1, 2위에 올랐다. 그 뒤를 이어 강혜정, 이영애가 두 그룹에서 3, 4위로 지지를 받으며 강세를 보였으나 이영애의 경우 영화아카데미에선 과대평가 일순위로 꼽히기도 했다. 과대평가 공통 1위는 배용준이 차지했는데 욘사마 열풍에 대한 거부반응은 댓글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상업영화로 데뷔하지 않은 감독 중 가장 기대되는 인물로는 윤종빈, 김종관이 손꼽혔다. 윤종빈의 경우,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발군으로 평가받은 <용서받지 못한 자>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는 점에서 젊은 영화광들과 부산의 긴밀한 호흡이 읽히기도 한다. 지난해 선보였던 <폴라로이드 작동법>의 김종관이 여전히 강세를 보인 건, 제2의 허진호를 기대한다는 댓글처럼 섬세한 감성의 영화를 아끼고 고대하는 그들의 소망을 읽을 수 있다. <8월의 크리스마스>와 <봄날은 간다>가 90년 이후 한국영화 베스트 5에 나란히 등장하는 대목도 이를 뒷받침한다. 젊은 영화광들의 기류를 또 한번 명확히 감지할 수 있는 건 ‘현재 활동하는 외국 감독 가운데 당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감독’을 묻는 항목에서다. 왕가위와 팀 버튼이 압도적 지지를 받았고 그 뒤를 스티븐 스필버그와 쿠엔틴 타란티노가 버티고 섰다. 영화사의 거장으로 가장 큰 영향을 받은 감독을 묻는 항목에서 앨프리드 히치콕과 스탠리 큐브릭이 나란히 1, 2위를 차지했다. 정적인 관조와 성찰의 스타일이 상대적으로 앞서는 동양의 대가들은 대체로 이들의 눈 밖에 나 있는 셈이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를 과대평가 항목에서 비중있게 다루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이들 세대에서조차 급격한 단절이 이뤄지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하게 만드는 것도 이 대목이다. 영화아카데미는 왕가위와 팀 버튼 대신 라스 폰 트리에와 허우샤오시엔을 꼽고 있으며, 90년 이후 외국영화 베스트 5에서 다른 두 그룹이 <매트릭스> <반지의 제왕> <킬 빌> 등을 내세운 데 비해 영화아카데미는 이들 영화 대신 <엘리펀트> <아무도 모른다> <아비정전> <열대병>을 꼽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