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과 냉소 사이
<만지>(卍)
출연 와카오 아야코, 기시다 교코 | 1964년 | 컬러 | 90분
삶의 방식 혹은 목표로서의 욕망을 자주 다뤘다는 점에서 마스무라가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작품에 관심을 가진 것은 자연스런 일처럼 보인다. <만지>는 <문신>(1966), <치인의 사랑>(1967)과 함께 다니자키의 원작을 스크린에 옮긴 영화로 마스무라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제목으로 쓰인 ‘卍’의 모양이 암시하듯이 영화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면서도 한데 엮일 수밖에 없는 네 사람의 이야기를 그린다. 변호사의 아내인 소노코는 취미 삼아 다니던 미술학교에서 미츠코라는 젊은 여성을 만나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이 둘의 관계에 미츠코의 애인이 개입하고 나중에는 소노코의 남편마저 미츠코와 관계를 맺게 되면서 이들 사이에는 복잡한 정열의 미로가 만들어진다. <만지>는 소노코와 미츠코 둘로 시작된 관계의 망이 사태의 전개에 따라 둘 혹은 셋의 관계로 변형을 겪는 과정을 무리없이 매만지는 마스무라의 연출력이 돋보이는 영화다. 뒤에 릴리아나 카바니가 동일 원작을 가지고 <베를린 어페어>(1985)라는 영화를 만든 적도 있다.
<아내는 고백한다>(妻は告白する)
출연 와카오 아야코, 가와구치 히로시 | 1961년 | 흑백 | 91분
암벽 등반 도중 미끄러진 타키가와는 그의 부인 아야코, 그리고 타키가와와는 회사를 통해 아는 사이이고 아야코가 연모하는 있는 듯한 젊은 남자 고다와 연결된 로프에 의지해 무력하게 공중에 매달려 있는 상태다. 더이상 버틸 힘들이 바닥나면 세 사람이 함께 죽을 수도 있다. 이때, 아야코는 로프를 잘라 남편을 희생시키고 자신과 고다의 생명을 구한다. 그녀는 보험금을 받을 계산에 남편을 살해했다며 재판을 받는다. 일종의 실존주의적 스릴러라고 부를 만한 <아내는 고백한다>는 아야코의 유죄 여부와 고다에게 갖고 있는 아야코의 정열의 문제를 축으로 이야기를 끌고 간다. 여기서 마스무라 감독이 보여주는 속도감이란 가히 눈부신 것이어서 아마도 알랭 레네의 <히로시마 내 사랑>에서 영향을 받은 듯한 과거와 현재 교차 구성에서도 그 사이에 어떤 ‘틈’이 있음을 감지할 여유를 거의 주지 않는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내내 연민과 혐오 사이를 오가게 만드는 주인공 와카오 아야코의 연기도 주목할 만하다.
<거인과 완구>(巨人と玩具)
출연 가와구치 히로시, 노조에 히토미 | 1958년 | 컬러 | 96분
영화 속에서 한 회사 간부가 말한다. “미국이 곧 일본이다!” <거인과 완구>는 그처럼 일본이 전후의 어두운 터널을 지나온 뒤 미국과 같은 자본주의 체제를 공고히 갖추게 된 시대, 그 내부의 메커니즘을 날카롭게 비판적인 눈으로 들여다보는 영화다. 영화는 ‘아폴로’, ‘자이언트’에 맞서 캐러멜 시장을 지배하려는 ‘월드’의 내부로부터 이야기를 진행해간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판매 실적을 올리려 하는 선전부 과장 고다, 그의 밑에서 일하는 니시, 그리고 회사의 마스코트로 이용하려 거리에서 고다가 선택한 젊은 여성 교코 사이를 왕래하며 빠르게 전개되는 이야기는 매 순간 시스템이 인간들을 어떻게 망가뜨려놨는가에 대한 증거들을 힘차게 누적하는 과정과 다름이 없다고 말해도 좋을 정도다. 조너선 로젠봄이 더글러스 서크의 것에 상당한다고 평한 마지막 장면은 영화를 본 이들에게 그 씁쓰레한 기운으로 인해 오래 기억될 만한 것이다. 기업 내부의 더러운 암투를 다룬 또 다른 상영작 <검정 테스트카>와 비교해서 보면 더욱 흥미로운 경험이 될 것이다.
<세이사쿠의 아내>(淸作の妻)
출연 와카오 아야코, 다무라 다카히로 | 1965년 | 흑백 | 93분
가난한 탓에 돈 많은 노인의 정부였던 과거로 인해 마을 사람들로부터 경멸의 시선을 받던 오카네는 마을의 자랑인 군인 키요사쿠와 사랑에 빠진다. 그런데 전쟁은 이 사랑을 오카네에게서 영영 떼어놓을지도 모른다. 결국 그녀는 키요사쿠를 해함으로써 그를 지키기로 마음먹는다. <세이사쿠의 아내>는 군국주의와 폭력적인 집단의식에 대해 보내는 싸늘한 시선을 내포하는 영화이지만 근본적으로는 처절한 외로움과 그만큼 폭발적인 열정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영화라고 말할 수 있다. 오카네와 키요사쿠의 사랑을 마스무라는 짓누르는 듯한 암울함이 우아함과 맞닿은 분위기를 내내 자아내며 보여준다. 무라타 미노루가 이미 만들었던 영화를 다시 만든 이 영화에서 마스무라는 남녀가 같이 자살하는 것으로 끝났던 무라타 영화의 결말을 바꿔놓았다. 앞이 보이지 않는 남자를 옆에 앉혀놓고 밭을 가는 오카네를 보여주는 <세이사쿠의 아내>의 마지막 장면은 아름다운 사랑영화에 걸맞게 묵직한 감동을 안겨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