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아톤> <…아름다운 일주일> <웰컴 투 동막골>에서 보여주는 이야기 구조
올해 마지막 달에 이르러, 결국은 또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순간이다. 과연, 우리는 새로운 이야기를 기다리는가?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우리가 기다리는 건 새로운 이야기일까? 화려한 스타일과 현란한 기술력과 거대한 제작비가 익숙하지 않던 시절에는, 그저 이렇게 말하면 될 것이었다. 스타일은 훌륭하군. 기술력은 도약할 만한 발전을 이루었군. 오, 돈 좀 많이 들인 티가 나는걸, 할리우드 부럽지 않아. 그러나 어느 순간 그것이 전부가 아님을 알게 되고, 영화를 보면 볼수록 이상하게도 마음에 허무한 바람만 쌩쌩 불기 시작하면, 결론은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내려진다. 역시, 이야기가 중요해. 사람들은 결국 그렇게 이야기로 돌아간다.
나는 올해 개봉한 영화들, 그중에서도 흥행에 성공한 영화들을 돌이켜보면서, 문제는 바로 이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물론, 관객 동원에 성공한 영화들의 이야기가 역시 훌륭했다는 등식을 세우려는 것도, 영상 이미지와 이야기 사이에서 위계를 논하려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이 흥행한 영화들에는 공통된 구조, 패턴이 있다. 그것은 아무 이야기가 아니라, 특정한 어떤 이야기이다. 이를테면, <사랑니>와 <극장전>이 다층적이고도 흥미로운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들, 흥행에는 성공하지 못했다는 아픈 기억을 더듬어보자. 여기서 분명해지는 건, 관객이 기다리는 것이 새롭고 모험적인 이야기, 이야기의 실험, 이야기의 창조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들이 지지를 표한 이야기들은 놀랍게도 우리 모두가 이미 ‘아는’ 이야기, 한번쯤은 봄직한 익숙한 이야기이다. 사유를 거쳐야만 하는 낯선 감정의 이야기는 환영받지 못했다. 아는 감정에 호소하는 이 안정적인 이야기들에의 의존 혹은 돌아감. 나는 이것이 올해 흥행한 영화들의 공통된 특성이라고 말하고 싶다. 여기서 다룰 영화들은 그중에서도 평단과 관객으로부터 고른 지지를 얻었던 <말아톤>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 <웰컴 투 동막골>, 세편이 될 것이다.
이미 ‘아는’ 익숙한 이야기
이 영화들은 어떤 식으로든 이미 검증된 소재를 바탕으로 한다. 잘 알려져 있듯, <말아톤>은 자폐증 마라토너인 실제 인물의 삶을 영화적으로 재구성한 것인데, 그의 영화 같은 이야기는 영화화되기 전, 이미 <인간극장>을 통해 방영되어 큰 인기를 끈 바 있다. <웰컴 투 동막골> 역시 흥행에 성공했던 동명의 연극이 바탕이 되며, 연극에 출연했던 신하균과 정재영이 그대로 등장하고 있다.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은 특정한 실화를 소재로 하는 것은 아니지만, 마치 <인간극장> 등에서 숱하게 보았던 여러 에피소드들을 좀더 보편화해 한데 모아놓은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러니까 이 영화들은 일단 소재적 측면에서 별다른 위험 부담 없이 매우 안전해 보인다. ‘또 똑같은 이야기군’이라며 식상해할 만도 한데, 올해 관객은 그 똑같은 이야기, 유사한 감정을 매번 선택했다. 물론 이를 두고 각색의 성공, 연기와 연출의 훌륭함 혹은 우리 삶과의 밀접함을 들어 칭찬할 수도 있겠지만, 이러한 분석은 뭔가 미진한 구석이 있다. 그렇다고 위의 세 영화들의 성공을 검증된 소재의 선택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는 것 역시 표면적인 분석일 뿐이다. 나는 이 지점에서 이 이야기들의 어떤 점이 이 이야기들의 반복을 허락하는 것인지, 다시 말해, 무엇이 관객으로 하여금 이 식상한 이야기들에 끊임없는 지지를 보내게 하는 것인지 살펴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관객이 그토록 갈증을 느끼는 이야기는, ‘어떤’ 이야기일까?
우선 이 영화들에는 현실적으로 매우 극단적인 상황이 배경으로 놓여져 있다. 그 상황은 언제나 외부로부터 이미 주어진 상황이다. 한낮 유약한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그대로 일단 수용할 수밖에 없는 고통스러운 운명. <말아톤>에서 그것은 자폐증 장애를 가진 소년 혹은 그 소년을 아들로 둔 어머니의 상황이었다. <웰컴 투 동막골>에서 그것은 분단이었고,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에서는 가난이었고 종교였고 동성애였다. 이 영화들이 영화의 시작부터 던져놓은 이 외적 조건들에는 아무런 의문부호가 달려 있지 않다. 그것은 그냥 받아들여야만 하는 숙명이다. 그것은 이야기들의 시작점, 모든 것의 원인이다. 그 조건들이 인물들의 행위, 관계의 원인이라는 환원론보다도 더욱 문제가 되는 건 이 외적 조건들은 마치 예수가 짊어진 십자가의 형벌처럼 그려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들에는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는 인간들의 고통이 있을 뿐, 십자가의 형벌에 고개를 들어 완강히 거부하는 인간들의 모습은 없다. 이를테면, 자폐증과 분단과 가난과 동성애는 세상이 내게 부여한 천형이며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은 그 천형을 최대한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뿐이다. 다소 거칠게 말하자면, 왜 나의 자폐증은 비정상으로 취급받는가, 왜 우리는 아직도 분단을 벗어나지 못하는가, 왜 나는 가난할까, 왜 나의 성적 정체성은 은폐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이 존재할 자리는 없다. 왜 나는 도대체 이 조건 때문에 고통받아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의 완벽한 부재. 나를 규정짓는 외적 조건은 그대로 두고 그 조건을 빌미로 사회가 부여하는 고통은 최대한 예쁘고 성실하게 받아들이자는 것. 나는 이 이상한 낙천주의가 위의 세 영화들을 구성하는 공통된 논리라고 생각한다.
이에 따라 이 세 영화들에는 배경의 극단성에도 불구하고 그 중심에 격렬한 갈등이나 대립의 축이 극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만약 인물들에게 싸워야 할 대상이 있다면 그건 이미 주어진 외적 조건이어야 하겠지만, 영화들은 인물들의 조건에 절대성과 고정성을 부여하여 갈등, 저항의 가능성을 차단하기 때문이다. 이건 곧, 영화 내부에서의 싸움 자체가 불가능함을 의미한다. 인물들은 오직 그 내부에서 자신과 동일한 처지의 타자와 티격태격 다툴 수 있을 뿐이다. 초원의 엄마와 코치의 반목도, 남북한 군인들간의 대립도, 채무자와 채권자의 관계도 모두 그런 식으로 읽힌다. 이 영화들은 결말에 이르러, 서로 대립하는 듯 보였던 인물들도 결국은 똑같이 불쌍하고 똑같이 고통받는 인간이라는 식으로 마무리 짓는다. 그 토대를 지탱하는 인간들간의 보편적인 연민과 이해를 강조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내가 인물들간의 반목을 대립의 축으로 읽지 않는 것은, 인간의 밑바닥은 결국 모두 똑같다는 식의 유약한 인본주의 때문이 아니라, 영화 속 인물들간의 반목이 너무도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정작 싸워야할 대상은 그대로 두고, 서로에게 생채기만 내고 있다는 점에서 무기력하다. 언제나 본질적인 문제는 저만치 멀리 떨어져 있다.
이상한 낙천주의에서 피어난 화해와 평화
그리하여 이 영화들에서 진정한 갈등과 싸움이 부재한 자리에는 어느덧 조화, 화해, 평화의 이야기가 들어선다. <말아톤>의 초원은 싸늘했던 코치와 지쳐버린 엄마, 그리고 그 둘 사이의 갈등을 마라톤이라는 지극히 평화로운 방식, 즉 홀로 뛰기로 풀어낸다. <웰컴 투 동막골>에서 남북한 군인들은, 심지어 미군은 동막골이라는 마을 안에서 조화롭게 공존하며 동막골을 살리기 위해 함께 죽음을 맞이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에서 아이를 유괴했던 가난한 여자는 감옥으로 가지 않고 남편에게 돌아오고 자신의 성적 정체성으로 고통받던 남자에게는 때마침 사랑이 찾아오며 종교적 신념과 사랑 사이에서 갈등하던 여자는 사랑하는 이를 살리고 종교로 귀의한다. 분명 아무것도 변한 것은 없는데 화해는 너무 쉽게 이루어진다. 고통받던 인물들은 어느 순간 세상에서 가장 평화로운 얼굴을 하고 있다. 초원이 영화의 마지막, 결승선을 넘어설 때, 동막골의 남북한 군인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불꽃들을 바라볼 때, 수녀가 된 여인이 사랑하는 남자의 떠남을 지켜볼 때, 나는 우습게도 그들의 미소가 변태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내일이면 더 큰 고통이 기다리고 있음이 분명할 텐데, 그들의 미소는 마치 천국을 눈앞에 둔 것처럼 갑자기 모든 시공간을 초월한 듯, 환하게 빛나며 거기 그 자리에 멈춰 있다.
무엇보다 이해할 수 없는 건, 개인적인 고통과 갈등이 화해로 도달하는 그 복잡다단한 과정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건 곧 이 영화들이 고통에서 평화로 나아가는 과정 속에 현실적 조건에 대한 고려를 개입시키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예컨대, 초원의 순수한 열정 하나만으로 코치와 엄마와 남동생과 아빠 사이의 그 미묘한 간극들, 그리고 초원을 정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회의 오래된 편견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남북한 군인들과 미군이 손을 잡는다고 분단의 아픔과 복잡한 이해관계가 끝나는 것도 아니다. 가난한 여인이 무사히 집으로 돌아와 남편과 만난다고 그들의 가난이 종결되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이 영화들은 그 복합적인 현실적 조건들을 외면하고 평화로운 결말로 건너뛴다. 그 조건들을 털끝만큼도 건드리지 않으면서도 인물들의 상처를 봉합하고 치유하기 위해, 즉 갑작스럽게 도달한 조화로운 세계를 정당화하기 위해, 이 영화들은 그 간극 사이에 판타지를 등장시킨다. 여기서 나는 판타지라는 용어를 단순히 현실을 넘어선 무엇이 아니라, 현실에서는 결코 지워질 수 없는 대립구도와 적대관계가 한순간 사라져버린 ‘비현실적인 현실’, 현실에서는 결코 도래하지 않을 현실을 의미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싶다. 이 판타지의 세계에서는 모두가 모두의 친구이고 모두가 한편이다. 자폐아도 비장애인도, 남북한 군인과 미군도, 가난한 자와 부자도, 이성애자와 동성애자도 모두 하나가 될 수 있다. 이분법이 해소되고 차별이 사라진 세상, 이데올로기가 없고 적이 없고 악이 없는 세상, 따뜻한 세상!
그런데 이 세상은 무언가 불구적이다. 과거,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 유지되던 이야기들만큼 불구적이다. 사회적 구조는 그대로인데 사람들의 관계만 평화로워진 세상의 이야기는 이분법적 세상보다 어쩐지 더 병적으로 다가온다. 분단 영화에서 분단이 사라지고 자폐아의 영화에서 장애가 사라지고 가난한 부부의 이야기에서 가난이 사라지고 동성애의 이야기에서 동성애가 사라진다. 대신 거기에는 만인에게 평등한 사랑이 등장한다. 사랑이 모든 이를 구한다. 인물들은 자신들을 규정하는 모순적인 사회와 싸우는 대신, 분노를 슬픔으로 승화하고 적의를 감동으로 바꾸며 함께 눈물 흘린다. 그들의 에너지는 밖으로 분출되지 못한다. 그러나 조금만 면밀히 살펴본다면, 이 하나 됨의 강박, 하나 됨의 착각을 작동시키는 것은 초월적인 인류애가 아니라 여전히 대단한 ‘내 가족’, ‘내 사랑’, ‘내 나라’의 이야기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부단히 안으로 환원되는 세상.
사랑으로 통합된 유토피아에 대한 꿈
나는 여기서 우리 삶의, 현실의 안과 밖의 경계를 구별하는 데 중심을 두려는 것이 아니라, 이 영화들이 그리는 세상이 매우 폐쇄적임을 지적하고자 한다. 그 세상에는 오직 내 아들, 내 아내, 내 남편만이 있다. 물론 표면적으로 볼 때, <웰컴 투 동막골>은 이와는 다른 길을 걷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 여기서도 역시 동막골은 오갈 곳 없는 군인들에게 마지막 남은 ‘내 고향’으로 기능한다. 후반부로 갈수록 전쟁의 냉혹한 논리 대신, 끝까지 사수해야 할 ‘내 고향’과 그곳을 지키는 군인들간의 사랑의 연대만이 부각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 영화들에서 인물들은 외부와의 관계 대신, 내부의 안위만을 걱정하고 있다. 그래서 인물들의 희생과 고통은 절절하지만 이기적이며 결코 사회적 차원으로 열리지 않는다. 이를테면,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에서 그 복잡한 에피소드들이(인물들이) 어느 순간 서로 만나고 있음에도 그 만남에서 아무런 필연성이 느껴지지 않는 이유도 여기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이 영화에서 인물들 개개인의 유대가 강조되고 있지만, 그 유대는 그들만의 사건에 갇혀, 정작 에피소드들의 유대에서는 실패하고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는 ‘만일 당신이 나라면, 만일 저 상황이 현실이라면’과 같은 자리 바꾸기 차원에서 오는, 일면 강제적으로 보이는 감동만 있을 뿐, 현실로 깊숙이 침윤하는 울림이 없다. 그건 다른 말로 하면, ‘내가 그가 아니라면, 내가 그 상황에 놓여 있지 않는다면’ 극장을 나서며 잊으면 그만일, 혹은 나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이야기들이라는 것이다.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에는 모든 등장인물들이 다 함께 하나의 화면에 등장하는 순간이 있다. 그들이 각자 그간 어떠한 인생의 길을 걸어왔건 간에, 사랑에 도취된 표정들로 화면 한 가득 구획된 틀 속에 꽉 짜여지는 순간. 나는 이 순간이 위의 세 이야기들의 성공을 단적으로 설명해준다고 생각한다. 그건 오직, 착한 세상의 착한 사랑, 성도 계급도 장애도 아무것도 없는 오직 사랑으로 통합된 유토피아에 대한 꿈이다. 물적 토대가 없는 사랑에 대한 꿈, 이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사랑에 대한 꿈. 그리하여 관객이 선택한 이야기들에서 중요한 것은 구조도, 새로움도, 그야말로 ‘이야기’도 아님이 명확해졌다. 통속과 신파와 고루한 휴머니즘을 딛고 우뚝 선 유일무이한 사랑만이 이야기를, 그리고 관객을 구원해주었다. 그런데 이 구원은 사이비 약속이 아닐까? 혹은 관객과 영화가 현실에 눈 딱 감고 짜고 치는 게임? 그들은 함께 익숙한 현실의 이야기로 돌아가 아이러니하게도 현실을 지우며, 결코 현실일 수 없는 현실을 재생산하고 있다. 나는 뒤늦게 이 세 영화들을 뒤돌아보면서, 그들이 구현하는 이 평등한 사랑의 세상,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될 세상이 두려워졌다. 그 보편적인 사랑의 세상에서 이야기는 사라지고 있거나 분명 퇴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