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파도> <간큰가족> <가문의 위기-가문의 영광2>에서 보여준 노인 코미디
<마파도> <간큰가족> <가문의 위기-가문의 영광2>의 공통점은 뭘까? 첫째, ‘노인’이 주연인 ‘노인-코미디’이고, 둘째, 배우 ‘김수미’가 나왔다는 점이다.
그간의 코미디의 경향을 살펴보자. <넘버.3>(1997)는 풍자가 살아 있는 걸작 코미디이지만, 이후 조악한 조폭 코미디영화의 기원이 된다. 본격적으로 조폭 코미디가 쏟아져나온 것은 <신라의 달밤>(2001) 이후로, 그해 <조폭 마누라> <달마야 놀자> <두사부일체>가 흥행하면서 전성기를 구가한다. 조폭 코미디는 2002년 <가문의 영광>이라는 변종상품의 출시로 장르의 서퇴(暑退)를 암시하더니, 2003년 <조폭 마누라2>의 ‘죽쑴’으로 약발이 다했음을 고(告)하였다. 이미 사망선고가 내려진 뒤였는지 <달마야, 서울 가자>(2004)의 반응도 전작에 턱없이 못 미쳤고, <목포는 항구다>(2004)는 꽤 웃겼음에도 외면당했다(그러나 이 영화를 패러디한 SBS <웃음을 찾는 사람들>의 “폼생폼사”는 잘 나가고 있다).
그즈음 코미디는 <몽정기>(2002), <색즉시공>(2002)류의 섹스 코미디와 <광복절 특사>(2002) 같은 황당 코미디가 잠시 관심을 끌다가 <동갑내기 과외하기>(2003) 이후 청소년 관객층을 겨냥한 로맨틱코미디가 다크호스로 떠오른다. 이후 <어린 신부>(2004)가 대박나면서, 10대 로맨틱코미디가 줄줄이 기획된다. 10대를 타깃으로 하면 일단 고정관객을 확보할 수 있다는 현실적인 계산이 작용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놈은 멋있었다> <늑대의 유혹>이 기대에 못 미쳤다. 그러자 2005년에는 성적코드는 강화하되, 등급을 고려하여 정작 야한 장면은 없는 <제니, 주노> <몽정기2>를 만들었지만, 이러한 고육지책도 더이상은 어려워 보인다. 그렇다면 2005년 연말을 앞두고 진단할 수 있는 코미디영화의 최신 트렌드는 뭘까? 바로 ‘노인-코미디’이다.
노인, 스크린의 새로운 주인공으로 등장
<마파도> <간큰가족> <가문의 위기-가문의 영광2> <까불지마> 등 노인이 주연인 ‘노인-코미디’가 나오게 된 배경으로 여러 가지를 생각해볼 수 있다. 일단 코미디뿐 아니라 ‘노인’이 나오는 영화 자체가 많아졌다. 노인이 나오는 영화는 <집으로…>(2002), <죽어도 좋아>(2002)가 고작이었지만, <고독이 몸부림칠 때>(2004), <시실리 2km>(2004), <가족>(2004) 등 지난해부터 갑자기 많아져서 올해 개봉한 영화만도 <엄마> <활> <귀여워> <초승달과 밤배> 등 상당히 많다. 이는 마치 조폭영화 <친구>가 빅히트쳤던 2001년에 일련의 조폭 코미디들이 거부감 없이 관객에게 받아들여졌던 것과 마찬가지로, 노인이 주인공인 영화들이 드물지 않게 만들어지는 가운데 ‘노인-코미디’가 하나의 현상으로 자리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렇다면 왜 노인이 나오는 영화들이 갑자기 많아진 걸까? 첫째는 급격한 고령화 사회의 자연스러운 반영이고, 둘째는 노인을 포함한 가족단위의 관람 등 노인 관객층을 염두에 둔 것이고, 셋째는 TV 등에서 오랫동안 연기해온 관록있는 연기파 배우를 재활용하는 것이 연기 면에서나 인기 면에서나 제작비 측면에서나 ‘안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산발적인 ‘노인-영화’들이 모두 성공적이진 못했다. 그 이유는 노인의 삶과 죽음을 전면에 내세운 <엄마>의 실패가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갈팡질팡한 장르 속에 녹록지 않은 주제의식은 관객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노인’이라는 새로운 화두는 좋았지만, 관객이 익숙하게 따라갈 수 있는 장르와의 결합에 실패한 것이다. 그런데 ‘노인’이 코미디와 결합하자 양상이 달라졌다. <마파도>는 예상 밖의 흥행을 거두었고, 기괴한 포스터의 ‘촌할매들’은 새로운 웃음의 아이콘이 되었다. <간큰가족>의 신구는 CF에서의 유머의 이미지를 역상(逆像)으로 투영해냈고, <가문의 위기-가문의 영광2>는 그다지 신선하지 않았는데도 (‘여성 보스’는 <조폭 마누라>에서 이미 봤던 요소이고, ‘조폭 집안의 결혼’은 <가문의 영광>에서 보았고, ‘조폭과 여검사간 러브스토리’는 <목포는 항구다>에서 이미 본 것이다) 대단한 흥행을 거두었는데, 여기서 추가된 요소는 홍덕자(김수미) 캐릭터가 전부이다. 결국 홍덕자(김수미)가 사멸해가는 조폭 코미디를 심폐소생시킨 셈이다. ‘노인’이 코미디의 핵이 되는 작금의 상황에서 갑자기 궁금해진다. 왜 ‘노인-영화’는 안 되어도, 유독 ‘노인-코미디영화’는 되는 걸까?
왜 노인-영화가 아니라 노인-코미디인가
첫째, CF, 시트콤 등을 통해 ‘노인’과 ‘코미디’의 결합가능성이 이미 타진되어왔다. 집음기를 들고 지붕 위를 뛰어다니던 전원주 (데이콤)CF를 필두로 하여 “니들이 게 맛을 알아?”라던 신구의 (롯데리아) CF, 그리고 젊은 남녀가 어렵게 산 정상에 올라왔는데, 호미 하나 달랑 들고 정상에 도착해 “어, 실례했습니다”라고 하는 김수미의 (하이트)CF 등 노인에 대한 고정관념을 역으로 이용하는 CF가 이미 ‘노인-코미디’의 발판을 마련하고 있었다. 또한 시트콤의 영향을 간과할 수 없다. 직접적으로는 <귀엽거나 미치거나>를 통해 김수미, 김성원의 ‘위선적인’ 코믹연기와 <올드미스 다이어리>의 영옥-영숙-혜옥 자매를 통해 파격적이고 능청스러운 코믹연기를 접한 상태였고, 간접적으로는 <안녕, 프란체스카>를 통해 신체 나이의 고정관념이 뒤흔들린 뒤였기 때문에, 노인이 주인공이 되어, 기존의 노인 이미지를 교란하며 웃음을 자아내는 ‘노인-코미디’에 마음을 열고 웃을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둘째, ‘노인’이라는 새로운 코드를 녹여줄 안정된 장르로서 코미디가 적합하다는 점이다. 코미디는 정체성이 분명한 장르이다. 관객을 웃기겠다는 지극히 실천적인 목표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어떤 이색적인 요소와도 결합이 가능하며, 그 결합한 요소를 코미디의 자장 안으로 흡수할 수 있는 힘을 지닌다(KBS <개그콘서트>의 “Go Go! 예술 속으로”를 보라. CF, 드라마, 뮤직비디오, 뉴스 등 각종 장르가 코미디라는 자장 안으로 어떻게 빨려들어가는지 절감할 수 있다). 즉 코미디는 뚜렷한 목적의식을 지닌 장르로 어떤 이질적이고 불안정한 코드와도 결합하여 모두 ‘**코미디’로 만들어낼 수 있는 강한 결합력(結合力)와 탐식성(貪食性)을 지닌다. 이러한 특성이 ‘노인’이라는 아직은 불안정한 코드와도 쉽게 결합하여, ‘노인-코미디’라는 매우 안정적인 화합물을 만들어낸 것으로 생각된다.
셋째, 코미디의 소재로서 ‘노인’의 매력을 생각해볼 수 있다. 노인은 영원한 ‘타자’이다. 우리는 늙기 전까진 ‘노인’이 어떤 존재인지 경험할 수 없다. ‘노인’은 경험되는 존재가 아니라 관찰되는 존재이다. 여기서 관찰되는 존재, ‘노인’이 관찰하는 주체의 관념(노인 이데아)에 순순히 부합되면 ‘노인을 대상화해 감동을 자아내는’ (가령 <집으로…> 같은) 영화가 되거나, ‘노인을 희화화해 쓴웃음을 자아내는’ (가령 예전의 <서세원의 좋은 세상 만들기>의 노인 퀴즈 같은) 텍스트가 된다. 그러나 관찰하는 주체의 관념을 깨고 교란하면 ‘노인을 탈영토화해 웃음을 자아내는’ 진정한 코미디가 되며, 이 과정에서 ‘어차피 타자’인 노인이 ‘또 다른 주체’로 보이는 반전의 순간을 체험하게 해준다. 주체와 타자, 다수자와 소수자간의 관계역전을 일으키는 짜릿한 전복성이야말로 위대한 코미디의 정신일 텐데, 이러한 코미디의 이념을 구현할 수 있는 소재로 ‘영원한 타자’인 노인이 제격이다. 즉 ‘노인’ 과 ‘코미디’의 결합은 코미디의 입장에서도 꽤나 매력적인 제안이 된다.
김수미, 그리고 신구
이러한 전복성을 가장 두드러지게 부각한 영화가 <마파도>이다. <마파도>에서 도시청년들은 촌할매들에게 완전히 주도권을 빼앗기고 동화되고 마는데, 노인들은 향락을 탈취당하는 희생자들이 아니라, 건강하게 노동하고 쾌락을 향유하는 생기 넘치는 자들이며, 오히려 삶의 기쁨을 모르는 쪽은 ‘가오’나 잡고 숫자뿐인 미망을 좇는 도시청년들이다. <가문의 위기-가문의 영광2>에서 환갑의 나이에 폭력조직을 이끄는 보스이자, 서슴지 않고 욕설을 해대는, 등판에 온통 문신을 새긴 초로의 여성 캐릭터가 주는 뜨악함은 ‘할머니’라는 음절 속에 담긴 우리의 정서적 기대감을 와장창 깨버린다.
김수미는 29살부터 일용엄니였다. 22년 동안 일용엄니로 살았지만, 이제 겨우 실제 일용엄니 나이가 되었다. 그런데 도로 젊어진다. <위대한 유산>의 중년 여성은 ‘튀고’ 웃겼다. 진지한 장면에서 “이 미모를 가만히 두었겠니?”라고 반문하는 대사와 <가문의 위기-가문의 영광2>의 문신 설정이 그녀로부터 나온 것이었다니, 그녀는 정말 탁월한 유머감각을 지녔나보다. 물론 그녀의 코믹 연기의 기초는 연기력이다. <마파도>에서 표정없는 얼굴을 낫으로 슥슥 긁으며, 이따금 섬뜩한 눈빛을 쏘아대는 연기는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신기(神氣)의 표정이었고, <간큰가족>에서의 역할은 좀 평면적이었지만, 그녀가 중심으로 나오는 장면(가령 골목 추격신, “탕수육 추가!”)에서 허둥대는 몸짓은 어김없이 웃음을 촉발했으며, <가문의 위기-가문의 영광2>>에서 액션도, 노출(?)도 마다않는 힘있는 연기는 중년 여배우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김수미 유머의 결정판은 일용엄니의 이미지와 그와는 상충되는 대단히 ‘비싸’ 보이는 이미지를 한몸에 지닌다는 지독한 아이러니에 있다. <귀엽거나 미치거나>에서 그러한 이미지는 폭발한다. 본래 <발리에서 생긴 일>에서 보여주었던 럭셔리한 사모님의 이미지로 우아한 자태를 뽐내지만, 중졸 학력으로 교양 콤플렉스에 시달리고 급하면 “염병∼!”을 절로 내뱉는 그녀는 (단순히 토속적으로만 보이는 전원주와는 전혀 다른) 중층-복합적인 코믹 이미지를 창출한다. ‘위선의 여왕’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코미디의 개가인데, 여기에 그 이질성을 외화(外化)해 인심 후한 오뎅장수와 속물적인(snobbish) 미술관장이라는 극단적인 2인1역까지 시도한다. 이러한 그녀의 ‘이질적인 것들이 상충하는’ 코미디는 <안녕, 프란체스카>에도 이어진다. 도무지 몇살인지 알 수 없던 그녀야말로 ‘몸 나이 따로 정신 나이가 따로’의 <안녕, 프란체스카>에 제격이다. 이것을 좀더 비틀면 “장라면 CF”가 된다.
‘노인-코미디’의 아이콘 김수미와 더불어 <간큰가족>의 신구에 대해서 부가설명이 필요하다. <네 멋대로 해라> <부부클리닉> 등 드라마에 30년 이상 출연하고, <8월의 크리스마스> <박수칠 때 떠나라> 등의 영화에 조연으로 나왔지만, 가장 강렬한 신구의 인상은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와 CF 속 ‘허를 찌르는 카피들’이다. <간큰가족>은 코미디영화였지만, 주연인 신구는 코미디를 구사하지 않고, 오히려 코미디를 다잡으며 드라마를 안정시키는 역할이었는데, 관객은 그의 얼굴에서 한편으로는 코미디에 대한 기대를 하면서, 멍한 듯한 표정에 감정이 이입됨을 느끼는 묘한 체험을 하게 된다.
“우리는 아직 죽지 않았다”
<까불지마>는 노인 코미디영화를 말할 때 특별히 언급해야 할 영화이다. 원로 액션배우이자, 원조 시트콤 스타 오지명의 감독 데뷔작인 이 영화는 오지명, 최불암, 노주현이 15년 만에 출소한 ‘원로주먹’으로 출연하여 좌충우돌하는 코믹 액션물이다. 오락성이나 볼거리도 상당해서 전국관객 45만명이라는 나쁘지 않은 성적을 거두었다. 이 영화가 흥미로운 것은 오지명과 그의 친구들이 자신들 세대의 외침을 영화를 통해 대변한다는 것이다. 영화 속 퇴출된 ‘올드보이’들은 ‘우리는 아직 죽지 않았으며, 인정해주지 않더라도 아버지의 역할을 다하고 싶다’고 이야기한다. 이것은 젊은이 일변도의 영화제작 환경과 관람문화, 나아가 구세대를 사장(死藏)시키는 사회 전반의 분위기 속에서 배우 생활 40년 만에 스스로 메가폰을 잡은 오지명의 말이자, 그들 세대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대변하는 것으로 들린다. <마이제너레이션>이나 <용서받지 못한 자>처럼 새로운 세대가 자신들의 이야기를 영화로 풀어내는 것을 보는 것도 흥분되지만, <까불지마>처럼 어르신들이 자신들 세대의 외침을 영화라는 매체에 담아내는 것을 보는 것은 더욱 감동적이다. 물론 그분들은 말씀하신다. “나보다 니가 더 걱정이다.” 씨∼베리아 벌판에서 귤이나 까야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