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2005 한국영화의 네 가지 경향 [3] - 부자관계
2005-12-13
글 : 안시환 (영화평론가)
죽은 아버지의 부활을 꿈꾸며

<남극일기> <혈의 누> <그때 그 사람들>에서 보여주는 아버지와 아들

지나치기 쉬운 두 장면에서 시작하자. <혈의 누>의 한 장면, 영화의 도입부에 죽창에 찔려 죽은 시체를 검시하는 장면에서 남성의 페니스를 종이로 가리려 하지만, 그 틈새로 남성의 성기를 뚜렷이 볼 수 있다. <그때 그 사람들>의 한 장면. 박정희의 발가벗은 시신을 앞에 두고 각료들이 모여 묵념을 한다. 그런데 그 나신이 민망했던지 묵념이 끝나자마자 각료 중 하나가 그 시신의 성기를 모자로 덮는다. 그렇다면 한국영화에서 성기의 재현이 자유롭다고 가정했을 때, 이 두 장면의 드러남과 가려짐의 재현의 차이를 역전해서 재현할 수 있을까? 현시점에서 이는 불가능하다.

<그때 그사람들>

<그때 그 사람들>의 이 장면은 라캉이 분석한 바 있는 ‘노아의 외투’의 일화와 유사하다. 라캉은 ‘노아의 외투’ 일화와 관련해서 아버지에 대한 분석에서 중요한 것은 아버지 자체가 아니라, 노아의 셋째 아들 야벳이 술 취해 잠든 노아의 나신을 가리던 ‘외투’라고 지적한 바 있다. <그때 그 사람들>의 장면으로 말한다면, 분석의 대상은 박정희의 벗은 몸이 아니라 그것을 가리던 ‘모자’인 셈이다. 실제로 박정희의 나신을 모자로 가리던 그 행위는 <그때 그 사람들>의 상영 과정에서 발생했던 명예훼손 논쟁과 법원의 판결 과정에서 그대로 반복되었다. 이후 부연하겠지만, 박정희라는 한국 근대사의 상징적 아버지는 그렇게 ‘가려짐’으로써만 자신의 권위를 유지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실제로는 벌거벗고 죽어 있던, 그렇기에 자신을 가릴 힘을 상실했던 박정희가 자신의 성기를 가리게 하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노아의 외투, 혹은 그때 그 모자

필리프 쥘리앵은 아버지에 대한 최초의 정의는 지배자, 즉 국가를 이끄는 사람이었음을 지적한다. 처음에는 정치적, 종교적 아버지였으며, 가족적 의미의 아버지는 그로부터 파생된 개념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남극일기>와 <혈의 누>에서 재현되는 아버지, 한때 모방의 대상이었으나 이내 거부해야 하는 아버지, 그럼으로써 하나의 서사로 통합될 수 없는 ‘공백’을 노출한 아버지와 그에 대한 아들의 태도는 지금의 한국사회를 읽어낼 수 있는 문화적 징후일 수 있다.

<남극일기>에서 김민재(유지태)는 최도형(송강호)이 텐트 밖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늘 궁금해한다. 부대원의 지적처럼 최도형은 ‘그냥 밖에 있을’ 뿐이지만, 김민재는 그의 행위 속에 그 이상의 의미가 담겨져 있을 거라고 믿는다. 그것이 다른 대원들이 최도형을 비판할 때에도 김민재만이 그에 대해 믿음을 버리지 않았던 이유이다. 상상화된 아버지. 이처럼 아들은 아버지가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고 ‘상상’하는 한에서, 아버지의 법(혹은 아버지의 상징성)을 자신의 것으로 내면화한다. 마찬가지로 <혈의 누>의 이원규(차승원)의 꿈장면에서 그가 아버지의 우물에 갇히게 되는 이유 역시 그가 자신의 상상 속에서 아버지를 맹목적으로 복종해야 하는 대상으로, 자신의 지배자로 각색해버렸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아들의 환상 속에서 각색된 ‘상상적 아버지’이지만, 그럼으로써 아들은 ‘아버지의 아들’이 된다. 수용한 자가 수용당한 자의 소유물이 되는 아이러니.

<남극일기>와 <혈의 누>는 장르의 관습을 충실히 따라가기보다는 ‘찢겨진 아버지’를 강조함으로써 감독의 주제적 자의식을 드러낸다. <남극일기>가 남극이라는 공간이 주는 공포처럼 보였던 미지의 시점숏을 아버지의 맹목적 욕망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대치한다면, <혈의 누>는 일반적인 스릴러의 공식보다는 아버지들의 죄가 폭로되는 순간에 강한 방점을 찍음으로써, 장르적 쾌감보다는 진짜 아버지의 모습과 조우한 뒤 발생하는 아들의 상실감을 강화한다. 이들 영화에서 진짜 아버지는 표면적으로야 죄지은 아버지라 말할 수 있지만,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김민재가 발견한 ‘도달 불능점’과 같은 존재이다. 기껏 당도한 도달 불능점이 그 넓은 땅에 찍힌 한점에 불과한 것처럼, 이원규를 심허로에 시달리게 하던 상상화된 아버지 역시 같은 병에 시달리는 환자에 불과한 것이다. 진짜 아버지는 비천한 존재에 불과하지만, 그가 무언가를 지니고 있을 거라고 상상하고 이상화한 것은 아들이다. 물론 진짜 아버지는 아들의 상상적 믿음에 관해서 언제나 빈털터리일 뿐이다.

<혈의 누>

<혈의 누>에서 이원규는 아버지인 토포사가 강 객주(천호진)의 처형을 명하는 장면에서 사건을 전해 듣는 제3자가 아니라, 그 사건이 발생하는 시공간으로 도약해 들어가 사건 자체를 경험하는 인물로 재현된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면서 ‘흐트러진 시간’을 보여주는 이 장면에서 이원규는 과거의 사건에 개입하여 그른 것을 바로잡을 수도 없지만, 삶의 이정표가 사라졌기에 미래로 나아갈 수도 없는 무능한 인물로 전락한다. 이는 사지 절단된 강 객주와 이를 바라보는 이원규의 얼굴을 숏/리버트 숏으로 처리함으로써 더욱 강화되는데, 이때 이원규가 할 수 있는 행동이란 강 객주의 시선에 등을 돌리는 것밖에 없다. 이처럼 <남극일기>와 <혈의 누>가 보여주는 서사 과정은 통합되고 자명한 것으로 보였던 아버지, 때문에 자신의 삶을 규정하는 원리로서 수용했던 아버지가 찢겨지면서 발생하는 ‘공백’에 아들을 직면하도록 한다. 공백과의 조우, 이 순간 아들은 자명하게 보였던 현실이 무너짐으로써 삶의 방향성을 잃어버린 채로 상실감에 휩싸인다.

찢겨진 아버지, 그 공백에 얼어붙은 아들

방향 감각의 상실. 이러한 면에서 <혈의 누>의 엔딩에서 흔들리는 배 위에서 위태롭게 서 있는 이원규의 이미지는 <남극일기>의 엔딩에서 떠나가는 최도형에게 김민재가 던지는 시선과 상응한다. 상실감에 빠진 아들, 달리 말해 아버지에 이미지를 하나로 통합하는 데 실패한 아들은 영웅이 될 자격을 박탈당한다. 일반적인 영웅 서사는 ‘SAS’의 서사를 따른다. 영화의 시작과 함께 제시된 상황(Situation)이 무너지고, 이것이 동기가 되어 무너진 질서를 재구축하도록 주인공의 행동(Action)을 유발하고, 주인공이 이 행동을 충실하게 수행하여 상황(Situation)을 다시 복구할 때 영웅 서사는 완성된다. 하지만 이들 영화에서 제아무리 도달 불능점에 도달하고, 범인을 밝혀낸다 하더라도 무너진 상황은 봉합되지 않고 아들은 영웅이 되지 못한다.

그런데 이러한 상실감의 정서가 그리 낯선 것은 아니다. 이는 IMF라는 사건이 발생하던 무렵, 달리 말해 남성들의 정체성이 위기에 봉착하던 시절에 등장한 여러 영화들, <접속>과 <8월의 크리스마스> <남자의 향기> 등에서부터 시작된 남성 인물의 정서였다. 이러한 정서의 주체가 남성으로 국한되었던 것은 IMF를 전후해 한국 근대화가 약속했던 장밋빛 미래의 허구성이 폭로되고, 한국 근대화의 주역으로 자부하던 남성들이 두눈 시퍼렇게 뜬 채로 그 자리에서 밀려나야 했던 시대의 공기를 호흡한 결과였다(한국의 근대화 자체가 남성성을 지닌 것이었다). 물론 이러한 시대의 정서 구조가 영화에 투영되면서 남긴 가장 긍정적인 결과물은, 그것이 궁극적으로는 남성 나르시시즘의 한계를 지니고 있다고 하더라도, 근대화 과정에서 우리가 억압당하고 잃어버렸던 것들을 되돌아보면서 한국 근대사에 대해 비판적 자각을 일깨우던 일련의 영화들이다(<박하사탕>과 <파이란> <와이키키 브라더스> 등). 특히 이들 영화의 상실감의 정서는 근대화 과정에서 억압되거나 추방되었던 것들을 되살리고 싶지만(영호의 “나 돌아갈래”를 상기하라), 그러기에는 ‘너무 늦어버린’(too late) 현실에 대한 자각에서 유래한 것이었다.

장르가 다르고, 시간적 간극이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혈의 누>와 <남극일기>의 아들이 느끼는 상실감의 정서 역시 이러한 감수성의 궤적 속에 존재한다(90년대 후반부터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남성 인물의 상실감이 어떠한 궤적을 그렸는지는 또 다른 글로 보충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남극일기>와 <혈의 누>는 이러한 상실감을 ‘직접적으로’ 아버지에 대한 상실로 풀어간다는 점에서 차이를 지닌다. 물론 이들 영화의 서사 방식은 이미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거미의 계략>에서 효과적으로 보여준 바 있고, 진짜 아버지의 폭로라는 점에서는 로만 폴란스키의 <차이나타운>의 엔딩이 훨씬 강렬하다. <거미의 계략>이나 <차이나타운>이 그랬던 것처럼, 문제는 이들 작품들에서 묻어나는 아들의 허무주의적 태도이다. 즉 <남극일기>와 <혈의 누>는 아버지로 상징되는 한국 근대사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드러내면서도, 아들은 상실감과 허무주의에 발목이 잡혀 딱 거기에 멈추어 선다. <차이나타운>의 엔딩에서 “잊어버려 제이크. 여기는 차이나타운이잖아”라고 속삭였던 현실에 대한 극단적 체념은 이들 영화의 아들이 겉으로 말하지 못했던 내면의 독백이 아니었을까. 달리 말해, 영화의 서사 구조를 회귀 혹은 반복으로 구성한 <남극일기>의 김민재에게, 그 질겼던 운명의 고리를 끊을 수 있으리라는 신뢰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아버지가 찢긴 공백과 마주한 충격으로 그 자리에 얼어붙어버린 아들일 뿐이다. 결국 이들 영화는 한국사회의 상징적 질서의 ‘공백’을 관객과 조우하게 하면서도, 아들의 태도를 통해 볼 때 영화 자신은 그 ‘공백’의 공포에 대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애매모호한 자세를 취하고 만다.

부인의 시대: 죽은 아버지 되살리기

상실감의 정서, 이는 <남극일기>와 <혈의 누>가 현시대의 아들 세대가 지닌 딜레마와 소통하는 접점이다. <남극일기>와 <혈의 누>에서 드러난 이러한 정서가 근 10년 동안 한국영화의 남성 인물의 주된 정서였음을 감안한다면, 이는 단지 허구가 아닌 한국사회에 만연한 대중의 ‘정서 구조’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즉 이들 영화가 멈추어 선 지점, 달리 말해 삶의 좌표로 수용하는 아버지의 법에 존재하는 공백에 직면함으로써 상실감과 허무주의에 빠져버린 주체는 영화 속 아들이 아니라 바로 이 시대의 아들 세대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지젝은 아버지의 법으로 상징화되는 사회적 질서는 근본적으로 분열과 적대(나는 이를 ‘공백’이라 칭했다)를 둘러싸고 구조화될 수밖에 없는데, 이때 이러한 공백을 은폐하려는 상상의 시나리오가 작동하면서 이를 가리려 한다고 지적한다. <그때 그 사람들>의 모자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검토되어야 한다.

<남극일기>

우리는 그러한 시도 중 하나를 <그때 그 사람들>에 대한 독특한 판결문에서 먼저 읽을 수 있다. 극영화 부분은 사실과 관련없는 허구이니 상관없지만, 다큐멘터리는 진실이니 다큐멘터리 부분을 삭제하는 판결, ‘과소 진술’(understatement)의 기예를 보여준 이 판결의 핵심은 이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판결과 다르게 극영화 부분이 사실인 것을 안다. 다만 그것을 인정할 수가 없었을 뿐이다. 이때 그 내용이 심각한 것처럼 행동한다면, 달리 말해 상영 불가 방침을 내린다면 오히려 그 내용이 사실임을 인정하는 결과를 낳게 되는데, 때문에 그들은 (그것이 사실임을 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이 심각하지 않은 척(혹은 사실이 아닌 것처럼) 행동함으로써 박정희의 나신에 모자를 덮는다. 이 장면이 불편하게 느껴진다면, 바로 그 행위에서 박정희를 대하는 자신의 모습을 봤기 때문이지 않겠는가.

물론 이러한 판결의 주체는 아들 세대가 아니지만, 새로운 삶의 좌표를 발견하지 못한 아들이 그 상실감을 치유하기 위해 택하는 해결책과 유사한 것이기도 하다. 프로이트가 ‘원초적 아버지’에 대해 기술한 것처럼, 아들이 현실을 구성하는 현실의 질서에 커다란 공백을 느끼고 방향을 상실할 때, 아들은 죽은 아버지를 자신의 내면에서 부활시켜 그를 살아 있을 때보다 더 강력한 아버지로 호명한다. 이는 단지 박정희라는 한국 근대화의 상징적 아버지에 대해서만 말하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90년대 후반 한국사회의 모순이 공개적으로 도출되면서 비판과 성찰의 대상이 되었던 한국 근대화의 이데올로기(남성/폭력/국가 중심의 담론)이고, 그것이 되살아나 더 강력한 법으로 아들의 내면에 자리잡는 그 순간은 이 두 영화의 아들들이 얼어붙었던 바로 그 지점에서 발생한다는 점이다. 물론 그것을 이상화하여 호명하는 주체는 아버지가 아닌 아들이며, 이러한 과정은 <남극일기>와 <혈의 누>의 서사 구조와 역행하면서 발생한다. 이들 영화는 이상적 아버지로부터 실재적 아버지를 폭로하는 구조를 취했지만, 부인(disavowal, 나는 잘 알고 있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시대의 아들은 실재 아버지가 어떠했는지, 한국사회의 근대화 이데올로기가 어떠한 모순에 봉착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앎을 부정하고 다시 이상화된 아버지의 품 속으로 들어가려 하는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상실감을 남성 인물의 정서적 기조로 깔면서 강한 육체(hard body)의 남성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폭력에 기반을 둔 그들의 유대 관계를 강조했던 일련의 영화들(<친구> <실미도> <늑대의 유혹> 등)이 대중과의 소통에 성공했다는 점은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어쩌면 아도르노가 사라졌다고 한탄했던 대중의 ‘위대한 거절’의 기능이야말로 죽었던 아버지가 부활을 꿈꾸는 지금의 한국사회에서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리라. 수용한 자가 수용당한 자의 소유물이 되는 아이러니를 거부하는 위대한 거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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