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2005 한국영화의 네 가지 경향 [4] - 전시성
2005-12-13
글 : 정한석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많이 보여주려는 욕망을 경계하라

<형사> <주먹이 운다> <달콤한 인생> <친절한 금자씨>에서 드러난 전시성의 위험

<형사 Duelist>

<형사 Duelist>를 둘러싼 각종 평문들이 쏟아져나왔다. 그 반응을 종합하면 이렇다. 우선은 관객이 시대를 앞질러온 영화의 신천지를 알아보지 못했거나 영화가 대중의 일반 감성에 너무 앞서 완성됐다고 여기며, 당대의 대중성과 미래에서 온 작품성 사이의 간극에 대해 안타까워하는 운명론이다. 아니면, 스토리의 강박에서 해방된 한국영화의 어떤 성과가 상업적으로 외면받기는 했어도, 그것이 새로운 개척의 길이었음은 분명 상기할 만하다는 희망론이다. 그도 아니면, 여전히 스토리를 버린 것이 문제라거나, 스타일 추구 과정에서 와해된 무엇이 있다거나 하는 비판론이다. 옹호론은 정확히 같은 논거를 그 반대로 이해한다. 무엇이 됐건 중요한 것은 그 논평들의 전제가 <형사 Duelist>의 비주얼 영역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이런 논평들은 어떤 핵심을 외면하고 있다. 스토리와 비주얼의 상관관계는 적어도 <형사 Duelist>에 관한 한 애당초 논점의 핵심이 될 수 없다. 그보다는 이 영화가 어떤 화법으로 비주얼을 보여주었는가를 말하는 것이 핵심이다. 가령 스토리가 있고 나서 비주얼이 있는 것도 아니고, 스토리와 비주얼이 이자 관계에 있는 것도 아니다. 스토리의 텔링이 있고, 비주얼의 텔링이 있는 것이다. 그 평들이 미처 파악하지 않거나 오독하는 것이 바로 이 ‘텔링’이다. <형사 Duelist>의 관건은 스토리 ‘텔링’에서 비주얼 ‘텔링’으로 나아간 것이며, 이때 핵심은 그 비주얼을 어떻게 ‘텔링’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미리 말하자면, <형사 Duelist>에서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전시성이다. 비주얼을 텔링하는 과정에서 <형사 Duelist>는 주요한 장면에 이르러 배열하지 않고 전시한다.

작품의 내적 재현 양식으로서의 전시성

전시성은 비단 <형사 Duelist>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주먹이 운다> <달콤한 인생> <친절한 금자씨>에서도 역시 발견된다. 먼저 이 네 영화는 사회적으로 몇 가지 중요한 지점을 공유하고 있다. 첫 번째, 영화보기를 통해 정련된 시네필 출신 감독들의 작품이라는 점. 두 번째, 현재 한국 대중영화의 어떤 기준점이 되고 있는 감독들의 작품이라는 점. 셋째, 그들이 수준 높은 대중영화의 주류로서 대표명사 역할을 하고 있는 이유는 대중성 안에서 작가성을 조화롭게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즉, 이미 세련된 관객이었고, 연출자로서는 그런 관객의 성향을 간파할 줄 아는 정련된 대중 작가이며, 대중성 안에서 작가성의 자리까지 마련해준 장본인들이라는 사실이다. 예민한 관객의 제일 앞줄에 있었고, 그래서인지 대중 욕망과 창작 욕망이 소통하는 출구를 찾는 데 능숙한 그들이 지금 미적 현안으로 우연히도 다 함께 전시성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그들의 영화는 한국 대중 작가영화의 지표다. 그 안에서 작동하는 비주얼 텔링은 곧 한국적 비주얼 텔링의 지표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 때문에 중요하다. 그 점에서 이건 한편으로 한국 대중영화의 중심부를 들여다보는 일이다. 요약건대, 한국 대중영화 작가들이 2005년에 완성한 작품들의 공통된 징후 또는 비주얼 텔링의 핵심은 ‘작품의 내적 재현 양식으로서의 전시성(展示性)’이다.

<친절한 금자씨>

영화관람시 일어나는 관객의 수용 양태와 입장을 설명해내기 위해, 즉 영화와 관객 사이의 시선의 권력 작동 관계를 지적하기 위해 관음주의(voyeurism)와 절시증(scopophilia)- 보는 것 자체의 쾌락- 을 그 중심에 놓는 것은 오래된 연구 사례다. 원래 전시주의는 관음주의의 대조쯤으로 놓일 수 있는데, 그것은 몰래 훔쳐보는 것에서 쾌락을 느끼는 시선 주체의 관음주의와 달리, 대상이 드러내놓고 자신을 보이는 데서 쾌락을 느끼거나 주체를 그런 식으로 포섭하는 경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런 이론 등에 바탕하여 전시성을 말하고 싶지 않다. 그 이론 자체가 도식으로서 한계를 드러낸 지 오래됐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정제된 이론적 비평이 아니라 본능적인 체험적 비평을 하고 싶은 열망이 더 크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기에서의 전시란 뭔가를 눈앞에 늘어놓고 보도록 한다는 일반의 의미에 기반한다. 눈을 사로잡을 수 있도록 뭔가를 시각적으로 펼쳐놓는 것에 집착하는 양상, 혹은 의도한 특정 요소를 시각적으로 강하게 반영하여 효과화하려는 영화적 선택을 말한다. 즉, 전시성은 비주얼 텔링 과정에서 나오는 작품의 내적 재현 양식이다.

문제는 전시성이 어떤 방식으로 구현되는가이다. 흥미로운 것은 네편의 영화가 모두 어떤 특정한 위치를 빌려 전시에 몰입하는데, 그곳이 다름 아닌 하나의 신 또는 시퀀스를 통째로 할애하여 장치하는 클라이맥스라는 점이다. <주먹이 운다>는 각기 따로 흘러가던 인물들의 두 드라마가 서로 만나 폭발하는 최종 행위로서, <달콤한 인생>은 영화의 시작과 끝을 결정짓고 있는 메타 내러티브적 장소와 그 장소가 지정하는 캐릭터간의 관계 종결의 장으로서 클라이맥스를 형성하고 있다. <형사 Duelist>는 인물들의 애증이라는 이분된 감정이 안무에 가까운 무언의 몸동작만으로 표현되기를 바라면서, 아예 관객이 동작 만에 주목하여 그 정서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배경까지 밝은 달빛과 컴컴한 암부로(보름 달빛과 벽 담장의 어둠) 이분 설정한다. <친절한 금자씨>는 감독 스스로 설명하듯 갑자기 다른 영화 한편이 이어져 시작하는 것과 같은 도약으로 새로운 무대-시퀀스를 등장시킨다.

물화적인 것일뿐, 영화적인 것과는 거리

영화평론가 허문영은 “<주먹이 운다>는 불운한 가장과 버림받은 청년의 삶을 전통적 드라마로 전시한 뒤에 육체적 충돌의 전시장으로 이끈다”고 말하면서, 이미 이 영화의 전시성을 예민하게 짚어냈다. 이 문장 중에 귀기울여 들을 만한 것은 육체적 충돌이라는 부분이다. 두 주인공의 공통점은 돈 때문에 어떤 본성과 생활의 궁지에 몰렸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주먹이 운다>는 매너를 찾아가는 이야기이며, 자존심을 회복해가는 이야기다. 이들의 매너 찾기는 원초적 행위인 육체의 격돌로만 가능하고, 거기에서야 만족을 얻을 수 있다. 그 과정에 피와 땀으로 얼룩진 육체의 전시가 있고, 그것은 차마 보기에 안타까워도 어디까지나 자기 만족감의 완성이다. 자기만족이 목적이고, 피학은 수순이다. 때문에 인물들은 피학의 상태에 놓여 있어도 매너를 찾고 자존심을 회복한다. 그러나 전시 과정을 통해 만족을 얻는 건 인물들이지 관객은 아니다. 이유는 지금까지 끌고 온 드라마를 시각적으로 다시 한번 고집스럽게 늘리기 때문이다. 이 장면이 길다는 것은 단지 장면의 물리적 길이가 길다는 의미가 아니라, 비주얼 텔링으로서 전시 자체를 중요하게 다루었기 때문에 문제가 생겼다는 의미다. <주먹이 운다>에 대해 드라마의 전시와 육체의 전시가 양립됨으로써 서로 영향력을 상승시키지 못하고 갉아먹는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 그런 갉아먹음은 드라마를 총괄하려고 시도된 비주얼 텔링의 방식이 전시로 빠져들었기 때문에 봉착한 문제가 아닌가 생각된다.

반면에, <달콤한 인생>의 전시성은 자기 내적 논리를 따르기보다 장르의 메타적 논리를 영화의 논리로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돌출된 특징이다. 예컨대, 유사 아버지와 그 아들격의 주인공이 벌이는 사투, 남자주인공을 사면초가에 빠뜨리는 여자주인공, 주인공의 회상 내러티브 등 많은 누아르 요소들이 등장하고, 더불어 그들의 성격을 규정짓는 무대와 시각적 장치들도 빠지지 않는다. 그중에서도 주 무대가 되는 스카이라운지는 시작이자 끝인 카오스적 장소이며, 죽어가는 자가 누워 있는 삶의 마지막 찰나다. 연출자 특유의 지문이 수차례 묻어나는 것에도 불구하고 <달콤한 인생>은 장르가 영화의 알리바이를 수집함으로써 오히려 장르적 외관만이 돋보이는 진열의 역할을 하게 된다.

<형사 Duelist>와 <친절한 금자씨>에서의 전시성은 좀더 복잡한 겹층이다. <형사 Duelist>에 관해 가장 많이 동원된 격찬의 말은 ‘활동’이다. 그러나 활동이라는 의미를 이 영화의 전반에 적용하는 것은 오해의 소지가 많다(이 점에 대해서는 <형사 Duelist> 기사를 썼던 필자 본인도 책임을 통감한다). 활동적이라는 말을 영화적이라는 말로 이해하게 되리라는 걸 감안한다면 더더욱 그렇다. 물론 영화의 탄생기에 활동은 그 자체로 놀라운 영화의 매력이었다. 그건 종종 전시를 필요로 했다. 왜냐하면, 당시의 전시성은 활동이라는 영화의 매력을 입증하기 위한 하나의 방책이었기 때문이다. 인물들은 종종 중앙에 위치했고, 거기에서 동작을 펼쳤다. 그 당시의 전시성은 영화적이라는 의미에 이미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전시를 통해 영화적이란 걸 입증받을 필요가 없다. 활동과 전시가 동석할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형사 Duelist>는 재현의 과정을 입증할 의무가 없음에도, 주인공들을 화면의 중앙으로 불러세워 카메라쪽을 향해 화면을 양분하여 동작들을 전시한다. 남순과 슬픈눈의 클라이맥스가 그렇다. 그 순간 그들의 동작이 지칭하는 것은 분명 서로의 애증에 가까운 감정인데, 실상 그 말하기의 방식은 이미 맺어진 내적 관계를 보여주기보다 관객에게 직접 이 장면을 보라고 호소하는 경향이 더 짙다. <형사 Duelist>는 다른 비교가 필요치 않다. 활동의 추구였던 초반 장터 장면과 동작의 전시인 클라이맥스를 비교하면 된다. 전시가 내적 결함을 가져왔다는 점이 <형사 Duelist>에 관해 논의되지 않은 것들 중 하나다. <형사 Duelist>의 전시성은 물화적인 것과 연관이 있을지언정, 영화적인 것과는 거리가 있다.

<달콤한 인생>

<친절한 금자씨>의 연극적 장면전환에 관해 감독은 “관객이 구경하는 것이라는 점을 자꾸 환기시키려 했다”고 말한다. 동시에 “그곳에서 이뤄지는 처형이란 것이 이 사람들에게 어떤 교육효과가 있을 것인가가 중요했다”고도 말한다. 이건 모두 폐학교에서 부모들이 백 선생을 처형하기 위해 모인 장면을 설명하는 말이다. 연출자의 설명이 아니더라도 이 장면은 일종의 퍼포먼스이고, 윤리적 광경의 전시다. 일차적으로 주인공 금자를 관객으로 둔 무대 상연이고, 둘째로 그들을 보고 있는 금자, 그녀를 보고 있는 실제 관객을 상대로 효과를 불러일으키기 위한 아이러니한 윤리극이다. 그 순간 관객은 처형에 대한 구경꾼이다.

장식주의로 끌려 갈 수도

감독이 말한 ‘구경과 처형과 교육효과’는 전시성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먼저 전통적인 어떤 처형 장면을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목매다는 것을 보여주고, 목을 자르는 것을 보여주고, 사지를 찢는 것을 보여주고, 불태워 죽이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이것은 처형의 전시다. 그 광경을 보게 하는 것은 효과를 노린 것이다. 심판인데, 구경꾼을 위한 심판이고, 구경으로 효과를 보려는 전시적 심판이다. 그것은 일종의 개종과 개심을 명령하거나 의심하게 하는 퍼포먼스다. 한편으로 그것들이 종교적 체험과 연관될 때, 대부분 뭔가 증거하기 위한 장면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 증거는 눈에 보여야 한다. 이것 역시 전시주의다. 신의 힘을 이중의 역으로 증명하는 유명한 처형과 구경의 예가 예수의 십자가형이라는 사실은 두말할 여지가 없다.

물론 <친절한 금자씨>의 전시성은 처형자들의 행위가 정말 온당한가, 하고 거꾸로 질문을 던지기 위해서다. 사실은 처형 장면 자체에 대해서는 몰두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질문을 던지는 과정에서 전제하고 있는 것이 전시성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말하자면, 이 영화가 말하고 싶어하는 윤리적 효과와 질문 역시 전시를 통해서 재현되었다는 것이다. 감독은 “김선일 비디오 같은 그런 것들의 이미지”도 이 장면을 구성한 중요한 요소였다고 말한다. 그 말을 뒷받침하듯 부모들을 잔인한 처형자로 둔갑시키는 동기 역시 백 선생이 찍은 죽음 직전의 아이들이 담긴 비디오다. 이를테면, 테러리스트들이 김선일씨를 그냥 죽인 뒤 죽였다고 선포하지 않고, 죽이는 장면을 재현으로 남겨 보여주는 것의 이유는 무엇이겠는가. 그건 바로 처형의 전시이며, 구경으로 효과를 보려는 심판이며, 심판을 통한 힘의 증거이며, 증거를 통한 개심의 요구다. 하지만 그건 언제나 윤리의 당위를 지연시키는 효과만 낳을 뿐이다. 그래서 아이들의 비디오를 본 부모들도 돌변하여 잔인한 처형자를 자처하고, 또다시 윤리의 모호한 뫼비우스를 만들어낼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할 수만 있다면 그 비디오는 보지 않는 것이 최선이다. 그걸 보고 나서 어떤 의도였는가를 생각하게 하는 건 그 다음 문제고, 또 실제로 보고 나면 생각보다 심정이 먼저 변한다. <친절한 금자씨>가 아슬아슬해 보이는 이유가 그것이다. 이 처형이 정당한지 아닌지 잘 모르겠다고 묻기 위해 전시성을 도입하는 것, 그게 본의 아니게 <친절한 금자씨>를 위험스럽게 만드는 요소다.

<주먹이 운다>

<주먹이 운다> <달콤한 인생> <형사 Duelist> <친절한 금자씨>의 전시성은 각기 다른 방향에서 왔다. 하지만 다시 말해도 이 작품들은 올해 나온 중요한 한국 대중영화들이고, 그들이 전시성을 동시에 선택했다는 점이 그래서 중요해 보인다. 그 무의지적 합의가 도출된 사회적 이유에 대해서는 또 다른 비평의 장이 요구될 것이다. 다만 여기서, 말할 수 있는 건 담론적으로나 실제적으로 그건 모두 경계할 만한 방향이라는 점이다.

전시성은 영화를 장식주의로 끌고 갈 우려가 있다. 그 장식주의에 들러붙는 것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때깔에 대한 강박증이 있을 테고, 쇼크와 그로 인한 효과의 유혹이 있을 것이다. 더군다나 영화는 그런 유혹에 약한 존재다. “시각적인 것은 본질적으로 포르노그라피의 성질을 지닌다. 시각적인 것은 결국 넋을 잃고 정신없이 매료되게 만든다”는 프레드릭 제임슨의 말은 곧이곧대로가 아니라, 시각적인 매체인 영화가 얼마나 지조없는 위험한 물건인가를 생각할 때 더 유용한 말이다. 지금 영화는 어지럼증 자체다. 그것들은 이미지의 소비로 전염된다. 그리고 이미지의 홍수 속에서 관객은 길을 잃는다. 눈은 붙잡혀 있지만, 의식은 이미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헤매는 경우가 다반사다. 이것이 바로 스펙터클이며, 시각의 물화과정이다. 동시에 영화들은 어떤 기술과 자본을 만나 영화적인 것에 대한 오해에 빨려들어가기도 하고, 사악한 쇼크주의와 만나 암암리에 의식을 잃기도 하고, 문제를 제기함에 있어서 질문법에 혼란이 오기도 한다. 영화가 상품의 물화 과정으로 포섭되지 않기 위해서 전시성은 경계해야 할 중요한 무엇이다. 왜냐하면 영화야말로 그 꾐에 가장 손쉽게 넘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전시성이 아닌 다른 무언가로 무의지적 합의에 이르거나 아예 다른 창조의 방향으로 각자 뻗어나가는 한국 대중영화 작가들의 작품이 보고 싶다는 희망을 품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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