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묵공> 촬영현장 [1]
2005-12-13
글 : 김수경
사진 : 서지형 (스틸기사)

흙바람이 코와 귀를 간질이는 허베이성 이시엔의 광야에서 새로운 아시아영화 <묵공>은 묵묵히 촬영되고 있었다. 1600만달러의 예산을 한국 보람영화사, 홍콩 콤스탁, 일본 NDF, 중국 화이 브러더스가 정확히 4등분하여 <묵공> 프로젝트를 위해 특수목적회사를 설립하고 진행한 투자 단계도 이채롭지만, 눈으로 목격한 대륙의 현장은 더욱 흥미롭다. 3중국에 한국과 일본이 더해진 출연진과 한·중·일 3개국의 프로듀서 진용은 그렇다쳐도 연출과 무술은 홍콩, 촬영과 조명은 일본, 미술과 대부분 현장스탭은 중국이 맡은 분업화된 촬영현장은 흔한 풍경은 아닐 것이다. 아시아를 겨냥한 새로운 방식의 합작영화 <묵공>의 촬영현장을 소개한다.

바람과 먼지를 막기 위해 심은 수천 그루의 미루나무 숲 사이로 버스가 움직인다. 이곳은 <묵공>의 촬영현장인 중국 허베이성 바오팅시 이시엔의 잉스청이다. 베이징에서 남서쪽으로 200km 떨어진 이시엔은 진시황 암살을 기도했고 <영웅>의 모티브가 된 중국 협객의 비조이며 민중영웅인 형가(荊軻)를 기리는 고장으로 유명하다. <묵공>의 주인공 혁리(유덕화)는 형가를, 항엄중(안성기)은 진시황을 연상시킨다. 숲을 지나 200m 정도 들어서면 <묵공>의 주무대 양성이 그 위용을 드러낸다. 황토빛 성벽을 지나면 정면에는 거대한 종이 달린 성루, 오른편에는 해자가 깔려 있고 두개의 망루가 있는 성의 정문이 있다. 왼쪽에는 서민들의 농가, 마구간, 지하감옥이 차례로 눈앞에 펼쳐진다. 세트 초입에는 미술팀들이 만들어놓은 병장기들이 쌓여 있고 성벽 근처에는 공성전을 위한 기중기들이 눈에 띈다. 실제 규모 100%로 제작된 <묵공>의 이시엔 세트는 상암월드컵경기장보다 더 넓은 66000제곱미터(약 2만평)의 규모를 자랑한다.

전쟁을 반대하는 전쟁영화 <묵공>

모리 히데키의 일본 만화 <묵공>(보코우)을 원작으로 한 영화 <묵공>은 양성을 둘러싸고 조나라 장수 항엄중과 묵가의 제자 혁리가 벌이는 지략 싸움을 다룬 시대극이다. 때는 춘추전국시대로 10만 대군을 이끌고 양성을 짓밟고 연나라로 향하려는 항엄중을 4천명에 남짓한 성민을 설득하여 ‘묵적지수’하려는 혁리가 막아선다. 유가의 형식주의와 계급주의에 반발해 탄생했던 묵가가 시황제의 천하통일에 의해 자취를 감췄던 중국 역사처럼 <묵공>에서도 묵협 혁리는 우유부단한 양왕과 양성의 병권를 책임지는 우자장(첸샤하오)의 반대와 모략으로 내우외환에 시달린다. 항엄중으로 분한 안성기의 설명처럼 “남들은 항엄중이 악역이라고 오해한다. 두 사람은 그저 세상에 대한 가치관으로 충돌하는 것”이다. 항엄중과 혁리는 끝까지 서로를 인정하고 각자의 방식으로 최선을 다해 부딪친다. 제이콥 쳉(장즈량) 감독은 이를 “평화를 지키기 위해 싸운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며 현실이 만든 아이러니다. <묵공>은 이러한 폭력과 전쟁 자체의 덧없음을 보여주는 ‘반전’의 전쟁영화”라고 설명했다.

4개 국어가 오고 가는 현장은 전쟁터

성의 정문 뒤편에는 12kW 조명이 실린 크레인과 좁은 성곽에 몰려 선 스탭들이 촬영 중인 내부를 창밖에서 살피고 있다. 발전차는 베이징 제편창에서 동원됐고 조명기를 떠받치는 크레인은 시안 제편창에서 조달됐다. 원래 이날 야외에서 공개될 예정이었던 항엄중과 혁리의 바둑 두는 장면은 촬영 스케줄과 바깥 공간의 상황 때문에 다른 실내 촬영으로 변경됐다. 제이콥 쳉 감독과 사카모토 젠조 촬영감독 외에는 연출부도 들어설 수 없는 협소한 공간 탓에 취재진은 현장진행을 실제로 지켜볼 수는 없었다. 실내에 있던 현장 스탭의 전언에 따르면 제이콥 쳉 감독은 “카메라의 이동이 많고 다양한 앵글을 원하는 편이라” 보통 카메라 3∼4대를 사용해 빠르게 찍는다고 한다. 이날도 항엄중과 혁리의 첫 대면을 풀숏에서는 4대의 카메라, 이후에는 2대로 실내에서 촬영했다. 제이콥 쳉 감독이 보는 현장 모니터에는 항상 네대의 카메라가 잡아내는 앵글이 넷으로 분할되어 동시에 보여진다.

그림 콘티는 사용되지 않으며 문자 콘티로만 현재까지 45% 정도의 촬영을 진행했다. 또한 <묵공>의 현장에는 200∼300명의 스탭들이 상존한다. 60%가 넘는 스탭이 현지 중국인이며 대만, 홍콩, 중국, 한국이 어우러진 출연진과 백발이 성성한 사카모토 젠조 촬영감독이 이끄는 촬영진이 영어, 중국어, 일본어, 한국어를 섞어 의사소통하는 진풍경이 연일 계속됐다. 배우 안성기와 왕자 양적을 연기하는 최시원을 제외하면 유일한 한국인 스탭인 김풍기 프로덕션 코디네이터는 “심지어 허베이성과 내몽골 근처 빠샹에서 촬영된 항엄중이 처음 양성을 공격하는 장면에서는 말 400필, 엑스트라 1천명에 마부를 포함해 1400여명의 인원이 참여하는 장관이 연출됐다”고 부연했다. 조군이 성을 공격하는 평원의 대결투 장면은 이미 빠샹에서 대부분 촬영을 마쳤다. 성문의 돌출된 망루에서는 내부 촬영과는 별도로 자단(우치롱)이 활을 쏘는 장면을 촬영 중이다. 망루로 다가서며 이야기하는 취재진에게 무전기를 든 연출부의 불호령이 떨어진다. 해는 저물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스탭들의 얼굴에는 초조함이 묻어난다. 이런 긴장감은 아랑곳하지 않고 병사복을 입은 해맑은 소년 엑스트라들은 성곽에 서서 취재진을 향해 반갑게 손을 흔든다.

8년 동안 공들인 세트는 아직도 공사 중

광활한 <묵공>의 이시엔 세트는 사실 8년 전부터 터를 닦았다. 이곳은 1997년 첸카이거 감독의 <시황제 암살>을 위해 건설됐지만 적절치 않다는 판단이 뒤늦게 내려져 <시황제 암살>은 향단으로 이동해 다른 세트를 지어 촬영을 마무리했다. <시황제 암살>을 제작했던 이세키 사토루 PD는 이를 폐기하지 않고 드라마 촬영 등으로 활용하다가 <묵공>을 위해 재정비하여 부활시켰다. 이시엔 TV필름 스튜디오라는 현판이 걸린 세트는 해당 제편창에 귀속되어 향후에도 촬영장으로 이용될 전망이다.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세트는 전체적으로 붉은색이 감도는 황토빛과 검은색 장식을 주조로 이루어진다. 족히 5m는 넘는 내벽은 벽돌을 미장하여 두껍게 제작됐고, 내벽보다 더 높게 건설된 외벽은 합판으로 좀더 얇게 만들어져 넓은 공간의 울타리를 이룬다. 좁은 계단을 통해 종이 있는 망루에 오르면 광대한 세트가 한눈에 들어온다.

100% 실제 크기로 제작된 세트 내부 모습

종루에서 현지 진행을 맡은 조선족 조홍씨는 뒤편을 가리키며 “원래 이곳은 왕궁 자리로 설정된 곳이다. 아직 세트를 계속 짓고 있는 중”이라고 설명했다. 성내 장면에서만 50필의 말들이 항상 등장하는 탓에 심혈을 기울인 마구간과 성민들이 사는 민가, 도자기를 굽는 가마 등은 <영웅>의 프로덕션디자인과 <시황제 암살>의 소품디자인을 담당했던 이쩐조(易振洲)의 손길로 만들어졌다. 종루와 마구간 사이에 위치한 감옥으로 취재진들이 향한다. 불을 뿜는 화로들을 향해 통로가 만들어졌고 양옆에는 기와가 가지런히 쌓인 지하감옥이 자리한다. 통로를 걷다보면 발치에 조그만 창문들이 이어져 있다. 창문 아래로 몸을 기울이면 지하감옥의 내부가 보인다. 마스크를 쓰지 않으면 숨을 내쉬기 힘들 정도로 강하게 흙먼지가 날리는 이곳에서 혁리는 흠모하던 여인 일렬(판빙빙)의 최후를 목격해야 한다. 촬영을 끝내고 성문의 계단으로 내려오는 배우들의 얼굴이 성벽처럼 검고 발갛게 그을렸다. 두건부터 신발까지 양피로 뒤집어쓴 유덕화와 검은색을 바탕으로 빨간색이 가미된 장군복을 입은 안성기는 방금 전까지 노려보던 숙적의 운명을 잊은 채 환한 얼굴로 어깨동무를 하며 사진기자들의 요구에 화답했다. 민가의 허물어진 담 너머로 해는 사위고 전쟁 같던 촬영도 막을 내렸다.

관련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