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규정을 거부하는 치밀한 아름다움, 나카하라 슌 [2]
2005-12-14
글 : 김봉석 (영화평론가)
사진 : 서지형 (스틸기사)

상업적이고 다양한 스타일로의 변주

<벚꽃동산>

깔끔한 상업영화를 만들며 이력을 쌓은 나카하라 슌은, 자신이 만들고 싶었던 영화에 도전한다. “당시에는 유명한 배우와 뭔가 극적인 사건을 이용하여 적당한 규모의 영화를 만들어내는 것이 주류였다. 그런 것과는 다른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배우나 사건 등을 배제하고, 기존 조류에도 구애받지 않는. 관객에게 재미없게 받아들여지는 것에 도전하고 싶었다고나 할까.” 요시다 아키미의 문학적인 만화를 원작으로 한 <벚꽃 동산>은, 나카하라 슌이 좋아하는 연극의 풍미를 탁월하게 살린 영화다. 제한된 공간, 리얼 타임으로 전개되는 <벚꽃 동산>은 연극 공연을 앞둔 소녀들의 마음과 행동을 통해, 그들의 모든 것을 보여준다. 나카하라 슌은 신인 오디션을 통해 배우들을 모집하고, 리허설부터 영화와 똑같이 제로에서부터 만들어가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 결과 <벚꽃 동산>에 보이는 소녀들의 모습은, 너무나도 리얼했고, 누구나의 공감을 살 수 있었다. 벚꽃처럼, 너무나 아름답게 피었다가 순식간에 사그라지는 청춘의 빛을 그려낸 <벚꽃 동산>은 90년대를 여는 걸작으로 평가받았다. 다음 작품인 <12명의 상냥한 일본인>(1991)은, 시드니 루멧의 데뷔작인 법정극 <12명의 성난 사람들>을 리메이크한 작품이다. 일본에 배심원 제도가 들어왔다고 가정하여, 살인 사건을 판단하는 배심원들의 대화와 토론을 담은 영화다. ‘<벚꽃 동산>이 성공하니, 다음 영화는 12명의 연극 톱 배우가 캐스팅됐다’는 말처럼 배우들의 탁월한 연기가 돋보이고, 지극히 평범한 사람인 배심원들이 비범한 영역인 ‘판결’로 흘러가는 광경을 예리하게 그려냈다. 원작의 치열함이 살아 있으면서도, 코믹하게 변주해낸 점도 나카하라 슌의 취향이라 할 것이다.

<벚꽃 동산>과 <12명의 상냥한 일본인>이 절찬을 받으며 각종 영화제의 상을 받았지만, 나카하라 슌은 다소 평이한 길로 접어든다. 자신만의 영화를 만들기보다는, 상업적이고 다양한 스타일의 영화를 만든 것이다. 시즌이 끝난 펜션에 모인 남녀의 사랑을 그린, 가벼운 청춘극 <시즌 오프>(1992>, 유령이 쓴 책을 팔겠다며 사기를 치는 남자들의 코미디 <Lie Lie Lie>(1997), 수십년 만에 동창회에서 만난 중년 남녀의 순애를 그린 멜로영화 <코큐>(1999), 자살한 14살 소년의 몸에 대신 들어간 영혼이 겪는 일을 그린 청춘드라마 <컬러풀>(2000), 다구치 란디의 베스트셀러를 각색한 드라마 <콘센트>(2001)를 만들었다.

<토미에 최종장-금단의 과실>
<라이 라이 라이>

2002년에 만든 <토미에 최종장-금단의 과실>은 이토 준지의 만화를 각색한 시리즈물이다. ‘이번에는 여자들의 이야기라면서 프로듀서가 (자신에게) 가져왔다’는 말처럼, <토미에 최종장>은 여성들의 세계를 잘 그려내는 나카하라 슌에게 어울리는 공포영화다. ‘일본적인 에로틱 판타지’ <토미에 최종장>은 남자의 질투, 혹은 남자와 여자의 복수보다는 토미에라는 이름을 공유하는 두 소녀의 사랑과 질투에 관한 이야기다. 그들의 관계에는 에로티시즘이 짜릿하게 얽혀 있다. 어쩔 수 없어서라기보다 좋아해서 로망 포르노를 만들었다는 말처럼 나카하라 슌의 영화에는 언제나 ‘에로틱’한 무엇이 숨어 있다. “에로티시즘은 영화에서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한다. <벚꽃 동산>에도 그런 것이 드러난다.” 나카하라 슌의 영화는, 대부분 여성들의 이야기다. 그것도 대부분 여성의 시점으로 구성돼 있다. “단지 남자의 입장에서 보는 것이라면 재미가 없지 않나. 여자의 기분, 시점을 상상하며 만들어가는 것이 재미있다.” 남자가 그려내는 여성의 시선이란 것은, 한계가 있는 동시에, 그 절묘한 불균형 때문에 오히려 매혹적인 경우가 있다. 이와이 슌지의 많은 영화가 그렇듯이.

양극의 필모그래피, 이제부터 시작이다

나카하라 슌은 대단히 여성적이지만, 단지 순애로 만족하는 것은 아니다. 2000년작인 <치과의>는 자신의 임포텐츠를 친구에게 발설한 아내에게 화를 내다가, 폭력적인 SM에 빠져드는 남자의 이야기다. 그런데 그 관계가 묘하다. 남편이 게임으로 제안한 SM 플레이에 부인이 동의하고, 남편의 몽상이 다른 여성의 살인으로 치닫자 부인은 질투를 느낀다. 수동적이었던 부인은, 어느 순간 그들의 기괴한 사랑에 동의한다. 그리고 영화의 시선이, 부인의 것으로 바뀌어간다. <치과의>는 영윤의 심의를 통과하지 못해, 결국 극장 개봉을 하지 못하고 DVD로만 출시됐다. 또 나카하라 슌은 일본의 메이저 AV회사인 SOD에서 ‘AV의 작가주의’라는 기획으로 만든 소프트 AV에도 참여했다. AV 출신인 도지로 감독과 나카하라 슌에게 각각 전통적인 핑크 영화의 스타일로 영화를 만들게 한 것이다. 당시 나카하라 슌은 남매간의 금지된 사랑을 그린 영화를 만들었다. 나카하라 슌은 ‘에로틱한 이야기’에 여전한 흥미를 가지고 있고, 그런 영화를 만들고 있다.

최근에도 나카하라 슌은, 다양한 소재를 다루면서도 그의 스타일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영화를 만들고 있다. 홈리스인 남자가 여자를 납치해 알몸으로 숲에 방치하고, 그것을 그림으로 그리는 이야기인 <데라시네>. <벚꽃 동산>의 미야자와 미호와 가제와라 아키가 공동으로 시나리오를 쓰고 출연도 한 <딸기의 파편>은 슬럼프에 빠진 30대 여성 만화가와 그의 매니저의 일상을 다룬 영화다. “‘벚꽃 동산’에서 나와라, 란 메시지라고나 할까.” <도메스틱 바이올런스>는 제목 그대로, 가정 내의 폭력을 그린 영화다. 결국 매 맞던 아내가 복수하는 것으로 끝나는. 여성, 에로틱, 코미디라는 나카하라 슌의 테마는 지금도 여전하다. 그리고 다른 감독들과는 다른, 나카하라 슌만의 스타일이 보인다. “다르다는 것이, 인위적으로 지향해서가 아니다. 타인의 시점으로 다양하게 보여지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내가 만들면, 그게 나카하라 슌의 작품이 되는 거 아닌가.”

나카하라 슌이 평단이나 국제영화제의 관심을 크게 끌지 못하는 이유도 그것일 게다. 나카하라 슌은 얼핏 보기에 ‘적당한’ 영화를 만든다. 깔끔하고 세밀하지만, 대중적인 내용과 형식에 약간의 독특한 스타일을 담은 상업영화를 만드는 것이다. 다행히도 ‘5년 전부터 컴퓨터의 보급과 방송사의 다양한 영화 제작으로 자기만의 영화를 만들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됐다’는 말처럼, 21세기 들어 나카하라 슌의 영화는 이전보다 도드라진 느낌이다. 단지 이야기만 들어도, 그런 느낌이 든다. 나카하라 슌의 장점은 <벚꽃 동산>과 <치과의> 같은 양극의 영화가 필모그래피에 공존한다는 것이다. 산보와 목욕을 좋아하는 전형적인 중년 아저씨 나카하라 슌이 여성의 이야기를 지극히 섬세하게 잡아낸다는 것부터가 신기한 일 아닌가. 나카하라 슌의 영화에는 기묘한 모순이, 치밀하게 선택된 아름다움으로 그려진다. 그게 나카하라 슌의 영화를 보고 싶은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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