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를 안고 싶지만, 안지 못하는 딜레마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결말을 알고 싶지 않은 분들은 꼭 영화를 보고나서 읽으십시오.
<태풍>을 보다가 제임스 모나코의 중얼거림이 떠올랐다. “우리는 점차 열편의 똑같은 영화를 보게 될 것이다.” 한국형 블록버스터에서 보았던 장면들과 액션들과 인물들이 조각조각 분해된 다음 다시 합쳐져서 눈앞에 펼쳐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흥행 요소들을 이리저리 짜깁기하고 있는 <태풍>은 무엇보다 <쉬리>의 변주이다. <쉬리>는 우리의 일상생활 안에서 펼쳐지는 ‘길거리 액션’을 설득력 있게 만들기 위해 ‘보이지 않는’ 위협인 북한을 끌어들였다. <태풍>의 주인공 씬은 <쉬리>를 답습하면서, 냉전 ‘이후’의 역사성이 부가된 인물이다. 그는 남북한 모두로부터 버림받은 탈북자로서, 핵무기를 동원하여 한반도 전체를 날려버리려고 한다. 아무것도 새롭지 않은 <태풍>에서, 씬의 설정은 흥행을 목표로 한 결과라고 해도 다소 의외의 면모가 있다. 블록버스터에서 주요인물로 등장한 탈북자가 ‘불쌍한’ 홈리스가 아니라 위협적인 ‘괴물’로서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태풍>에 따르면, 이제 한반도는 북한의 전쟁 위협과 일본의 식민지 향수와 미국의 제국주의적 간섭뿐만 아니라 탈북자도 잘 ‘관리’해야만 안전하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괴물’이 되어 가공할 위협으로 다가오게 될 것이다.
씬과 강세종에 투영된 북한과 남한의 애증관계
그러나 씬은 <쉬리>의 북한 특수부대 소좌 박무영보다는 북한 특수공작원 이방희에 가까운 인물이다. 악한 이방희가 착한 이명현으로 변해가는 것처럼, 씬은 투박한 북한 사투리로 복수를 다짐하는 악당에서 20년 만에 만난 누나를 향해 비통하게 눈물 짓는 착한 동생으로 이동한다. 북한 사람을 타자로 자리매김하면서도 완전한 악의 화신으로 끝까지 밀어붙이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언젠가는 복원되어야 할 민족이기 때문이다. 북한은 우리에게 가장 낯선 타자이자 같은 언어를 공유하는 민족으로서, 적대감과 친밀감이 공존하는 자리에 위치해 있다. 현재의 남북관계를 적절하게 표현한, ‘적도 친구도 될 수 없는 두 남자의 대결’이라는 <태풍>의 카피처럼, 북한 사람은 <쉬리> <실미도> <태극기 휘날리며>에서는 적이었다가 <공동경비구역 JSA> <웰 컴 투 동막골>에서는 친구로 등장한다. <태풍>은 북한에 대한 모순된 감정에 편승한다. 씬에게는 북한 사람에 대한 이중적인 이미지가 투영되어 있고, 그는 피해자이자 가해자인, <쉬리>식으로 말하면 일종의 히드라가 된다. <쉬리>의 남한 요원 유중원의 변형으로서, 씬을 뒤 쫓는 강세종은 아버지가 대간첩 작전 도중 전사했음에도 불구하고 씬과의 대결 과정에서 연민의 감정을 갖게 된다. 강세종은 씬에게 이번에는 적으로 만났지만 ‘다음 생’에서 다시 만나면 친구가 되자고 기약한다(그러나 <친구>의 친구들은 결국 원수가 되었다!). 이것은 이상한 친밀감의 표시이다. 지금 화해를 하기 위한 그 어떤 현실적인 노력도 시도하지 않은 채, 왜 다음 생을 말하며 불가능한 약속을 하는 것일까?
<태풍>은 씬을 비극적인 인물로 만들고 연민의 감정을 자아내기 위해 한반도 주변 지역을 위험한 장소로 재현한다. 탈북한 씬의 가족은 남북한 모두에게 버림받고 중국 국경에서 무자비하게 총살당하고, 씬과 함께 살아남은 누나 최명주는 중국인에게 몸을 팔아 동생의 허기진 배를 채운다. 최명주가 매춘으로 연명하는 동안, 씬은 타이에 노예로 팔려갔다가 해적이 되고 복수를 위해 러시아에서 불법으로 핵을 구입한다. 위험이 득실거리는 공간에서 살아남은 남매는 만나자마자 죽음을 맞이한다. 씬은 그토록 오랫동안 만나기를 열망했던 누나를 결국 자신의 손으로 죽여야 할 운명이다. 계속 되는 씬의 비극에서 넘쳐나는 것은 감상주의와 신파이다(엔드 타이틀에서, 탈북에 성공하여 독일(?)대사관에서 남한으로 이송될 희망에 부풀어 있는 씬의 가족들을 크리스마스 캐럴과 함께 보여줄 때, 영화의 감상주의는 그야말로 철철 넘쳐흐른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한국형 블록버스터에서 반복해온 비극적인 결말이 준비되어 있다. 씬은 <쉬리> <공동경비구역 JSA> <친구> <실미도> <태극기 휘날리며> <웰컴 투 동막골>의 그들처럼 그렇게 죽음을 맞이한다. 죽음은 갑자기 모든 것을 용서하는 효과적인 장치로 작동한다.
역설적이기는 하지만, <태풍>은 북한을 끌어안지 않는 남한에 대해 비판하고 있는 영화일 수도 있다. 씬은 희생자이며, 그의 복수는 죽음을 예고하는 자살의 몸짓이기 때문에 동정을 자아낸다. 그러므로 씬의 복수는 궤멸시켜야 할 악이라기보다 막아야 할 악의 모습으로 후퇴한다. 그렇다면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훨씬 섬세하고 좀더 신중하게 다루어져야 했을 것이다. 강세종은 동기들을 차출하여 목숨을 걸고 씬의 복수를 막으러 나선다. 그러나 목표지점으로 향하는 도중 미군 잠수함이 씬이 타고 있는 선박 태풍호를 공격할 예정이므로 회항하라는 상부의 명령을 받는다. 강세종은 지시를 거부한 채 태풍호로 향한다. 그들이 타고 있는 헬기에는 태풍호까지 가는 연료밖에 없기 때문에 그들이 살아 돌아올 확률은 거의 없다. 말하자면 이건 일종의 동반자살의 선택이다. 그런데 정작 도착한 강세종은 씬에게 살아서 함께 가자고 설득한다. 그들에게 미군의 어뢰가 발사되자 강세종과 혈투를 벌이던 씬은 갑자기 자살해버린다. 영화에서 유일하게 씬의 슬픔을 이해하는 장세종은 씬의 기도를 막아내고 희생자의 복수를 화해로 전화시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찾아온 셈이지만, 장세종과 씬이 만나는 과정은 이상할 정도로 설득력이 없다. 여기서 더욱 정말 이상한 설정은 태풍호에 미군 잠수함이 두발의 어뢰를 날리는 장면이다. 물론 이 상황은 <유령>과 매우 가깝고, 그것을 구현하는 시각적 효과는 <퍼펙트 스톰>을 떠올리게 하며 드라마는 <첩혈쌍웅>과 멀지 않다. 미군 잠수함이 씬과 강세종이 함께 있는 태풍호로 어뢰를 발사할 때, 남북한 군인이 함께 연합군과 대결했던 <웰컴 투 동막골>의 판타지가 이상한 변형으로 반복된다. 분단의 현실은 한반도 내부에서 타자를 설정하고, 민족주의는 외부에서 타자를 설정하게 만든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전자의 타자는 드러낼 수 있지만, 후자의 타자는 드러내면 안 된다(일본 열도를 핵무기로 초토화화려 했던 <유령>의 실패를 상기해보라). 그래서 미군의 공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아주 애매한 상태로 남겨진다.
장동건 마케팅 때문에 안과 밖이 따로 놀다
이전의 한국형 블록버스터와 비교해볼 때, <태풍>이 차별화되는 지점은 등장인물에 있다. 씬은 탈북자이자 동남아를 무대로 활동하는 ‘해적’이다. 블록버스터의 규모에 어울리는 대재앙으로서 핵무기에 의한 공격을 설정했지만, 북핵문제의 현실적인 위협을 스크린에 옮길 때의 난처함을 피해간 결과, 씬은 원래의 이름을 버린, 다국적이고 무국적인 인물이 되어야 했을 것이다. 이 순간 이 인물은 한반도를 벗어나 아시아적인 인물로 거듭날 수 있었지만 유감스럽게도 갑자기 한류 마케팅이 끼어든다. 장동건의 스타 이미지가 전면으로 부각되면서, 이야기 안과 영화 바깥은 타협으로 이리저리 뒤엉키기 시작한다. 제작비 150억원에 마케팅비 40억원에 이르는 괴물 같은 상품은 해외마케팅을 감안한 상태에서 국내 관객 500만명을 동원해야 손익분기점에 도달한다. 그러므로 국내와 국외 관객 모두를 잡아야 한다. 그리하여 씬은 아시아를 무대로 활약하는 성공한(?) 해적이면서도 모든 것을 포기하고 복수에만 몰두한다. 그의 전 생애는 비극적인 가족의 운명에, 가족을 위한 복수에 고착되어 있다. 한국사회의 가족주의는 씬에게 죽음에 이르는 병으로서 여전히 위력을 발한다. 그러나 한류 마케팅을 위해 씬은 아시아의 해적 친구들과 절친한 우정을 나누어야 한다. 초대형 블록버스터는 아시아를 안아야 한다. 그럼에도 씬은 아시아 친구들은 버려도 자기의 이미 죽은 가족들을 버리지는 못한다.
아시아의 안녕보다 두 남자의 우정이 우선인가?
여기서 <태풍>은 중요한 질문을 간과하고 있다. 결국 태풍호는 미군의 어뢰에 의해 폭파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태풍호에는 한반도 전체를 오염시킬 수 있는 핵이 탑재되어 있다, 이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태풍호가 파괴되면 그 핵은 어떻게 될까? 그곳은 어디이기에 핵폭탄이 터져도 되는 것일까? 풍선 속에서 안전하게 바다에 떠 있으면 비밀리에 미군들이 다가와 전부 수거해가기 때문에 괜찮은 것일까? 씬은 아시아 친구들을 걱정하지만, 영화는 태풍호의 핵이 아시아의 그 어떤 나라를 쑥밭으로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조금도 염려하지 않는다. 씬과 강세종의 기묘한 우정처럼, 블록버스터의 욕망을 투영한 이보다 이기적인 우정이 또 어디 있겠는가?
P.S. <쉬리> 앞에는 거대한 초대형 선박 <타이타닉>이 있었다. 이제 (영화 속 선박이름이기도 한) <태풍> 옆에는 무시무시한 괴물 고릴라 <킹콩>이 있다. 동시에 도착한 두편의 초대형 블록버스터에서의 타자들, 씬과 킹콩을 비교해보면 정말 아이러니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