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파적이고, 단순하고, 표면적이지만 그게 맞다”
지난 6월 블라디보스토크를 찾았을 때 곽경택 감독은 “이 정도 스탭이면 기술력도 마인드도 최고다”라며 A급 태풍 같은 자신감을 내보였다. 그로부터 6개월이 지났다. <태풍>의 첫 시사가 열린 지 하루가 지난 12월7일, 쏟아져나온 반응을 탐색 중인 곽경택 감독을 진인사필름 사무실에서 만났다. 거대한 영화의 결과를 기다리는 담력을 캐봤더니 “크게 생각하려고 한다. 좋은 연기자, 좋은 투자·배급사를 만났고, 공들일 만큼 들였고, 고민도 할 만큼 했고, 진인사했으니,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다한 셈”이라며, 대천명에 대한 믿음을 내비친다.
-<태풍> 역시 감독의 사적인 이야기로부터 시작된 작품이지만, 전작들과는 다른 영화로 느껴진다.
=내 작품들 중에서도 감독의 작가적인 간섭이 가장 덜한 영화다. 감독의 영화가 아니라 스탭의 영화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다른 작품들에 비해 감독의 공이 절대적으로 많이 든 영화지만, 상대적으로 따져보자면 감독 개인의 기여도는 낮은 편이다. 나와 동료들이 함께 토해낸 영화라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더욱 체계적인 할리우드 시스템에 가까워졌다는 말인가.
=그래서 유닛도 여러 개로 나누어 촬영했다. 특히 홍경표는 <태풍> 기술의 핵이다. 모든 것이 프레임 안으로 집중되기 때문에 그는 <태풍>이라는 프로젝트의 기술 책임자 같은 역할을 해냈다. 그 외에도 많은 스탭들이 각각의 감독 몫을 해냈다.
-홍경표는 카메라를 들고 열심히 움직이는 감독이다. 그러나 감독님의 이전 영화들은 인물의 감정, 특히 배우들의 얼굴에서 드라마를 만들어내는 편이 아닌가.
=나는 인물을 중심으로 찍으려고 했던 반면에, 홍 감독은 인물에 집중하는 것도 좋지만 스케일이 큰 영화에는 다른 것도 필요하다고 했다. <태극기 휘날리며>를 찍으면서 익힌 노하우였을 것이다. 나 역시 많은 부분에서 동의했고, 결과를 놓고 보더라도 그런 접근이 주효했다고 본다. 예가 될지는 모르겠으나. 블라디보스토크 안전가옥에서의 장면들은 굉장히 드라마 중심이다. 카메라 움직임도 정적이고, 주인공들의 표정 연기에 의존한 부분도 많다. 반면 피터 저택 장면의 주안점은 ‘감정’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정보’를 주는 것이기 때문에 지루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카메라가 끊임없이 움직인다.
-영화 도입부, 타이와 부산을 거쳐 블라디보스토크에 도달하기 직전까지, 영화는 태풍처럼 휘몰아친다. 편집이 굉장히 빠르고, 주어지는 정보도 많다. 여기에는 장단점이 고루 있을 거라고 여겨진다. 장점이라면 관객을 잡아채서 한 호흡에 스토리 중심으로 몰아갈 수 있다는 것이고, 단점은 캐릭터가 완벽하게 건설되기 전이라 같이 호흡하기가 힘에 부친다는 거다.
=일부러 그렇게 했다. <태풍> 같은 영화의 리듬은 조용히 인물을 하나씩 짚어주며 가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얼른 중심 이야기를 물 위로 끌어올려야 한다. 빨리 세종과 씬이 만나도록 만들어야 한다. 시나리오 집필 때부터 그런 리듬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물론 초반에 정보가 많고 로케이션 변화도 급박해서, 조금 연세가 드신 관객에게는 생소하게 느껴질 거다. 하지만 작은 정보들을 놓치는 것은 큰 상관이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은 결국 주인공 세 사람의 이야기다. 그 이야기를 따르는 데 문제가 없다면 자잘한 정보를 놓치더라도 무리는 없을 거다.
-그러나 타이 장면은 조금 길었어도 좋았겠다. 특히 쏨차이의 여동생이 등장하는 장면처럼, 쏨차이나 토토 같은 씬의 해적 동료들, 그리고 씬의 인간적인 면모를 좀더 보여주는 장면들. 그랬다면 후반부에 드러나는 씬에 대한 해적 동료들의 믿음이 더 크게 울렸을 텐데.
=그런 장면들을 많이 쳐낸 게 아깝다는 생각도 들지만, 영화 전체를 위해서는 그렇게 가는 게 맞다. 사람들은 주인공의 이야기를 보고 싶어한다. 정서적으로 동화가 안 되는 외국 캐릭터들에 대한 감정선은 우리 일반 관객이 따라가기에는 다소 부담스럽다. 그래서 토토와 쏨차이의 캐릭터를 구축할 수 있는 분량이 다소 빠졌다. 과감하게 선택해야 할 부분이었다.
-강세종이라는 캐릭터로부터 애국주의, 강직한 군인정신에 대한 개인적 소신이 강렬하게 묻어난다.
=예술 분야도 마찬가지겠지만, 신념과 소신을 가진 개인이 당대에는 평가받지 못한 채 매도당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면 재평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때로는 묻혀버리고 만다. 예를 들면 군부 권력에 의한 쿠데타 등을 겪으면서 상관의 권력 야욕을 모른 채 모든 것이 국가를 위하는 일인 줄 알고 명령에 따랐던 인물들, 그래서 죽어간 인물들. 그들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인지 강세종은 감독의 바람을 투영한 화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제시대를 생각해보자. 당시에 정말로 똑똑했던 사람들 중에서 친일파가 아닌 사람이 있나. 항일은 곧 죽는 길이었다. 하지만 독립운동을 위해 열심히 목숨을 내건 사람들, 똑똑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엄연히 존재한다. 국가가 그들을 제대로 평가해주지 않았지만, 똑똑하지 않아서 항일전선에 뛰어든 사람들을 우리가 욕할 수 있나. 강세종도 그처럼 단순하고 덜 영리하지만 신념대로 살아가는 캐릭터로 그리고 싶었다.
-전작에서는 부산과 소도시의 경치, 폐차장이나 시장터 같은 소소한 장소들에서 진한 페이소스를 만들어냈다. 일종의 제3의 주인공 노릇을 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태풍>의 로케이션은 대부분 낯선 땅이라 감독의 입장에서도 익숙지 않았을 듯하다. 부산 역시 예전 영화에서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다.
=부산이라는 도시를 예전 같은 방식으로 그리는 것에서 탈피하고 싶었다. 부산이라는 장소를 비비드하고 인터내셔널한 느낌의 도시로 보여주고 싶었다. 디테일은 인물들의 감정선에 치중하고. 로케이션은 예전의 방식과 조금 다르게 가자는 생각이었다.
-블라디보스토크가 오히려 부산처럼 보인다.
=맞다. 부산과 많이 비슷해서 깜짝 놀랐다. 항구도시가 대부분 비슷하다는 생각도 들었고, 정서적으로도 맞고 편안하고. 다행인 것은 억지로 풍광을 담으려고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인물들이 필연적으로 거기에 있어야 한다는 느낌의 장소로 만들려고 했고, 그렇게 만들어진 것 같다.
-대규모 CG를 이용한 한국형 블록버스터들은, 몇몇 예외를 제외한다면 하나같이 흥행에 실패를 거두었다. 감독 스스로가 CG의 전반과정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결과를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태풍>의 경우는 어떤가. 시작부터 구체적인 비전이 있었나.
=우리나라 관객은 자국민이 등장하는 SF와 판타지는 설득력이 없다고 생각한다. 한국 사람이 우주선으로 달나라에 가서 외계인과 싸운다면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런 정서는 결국 CG 자체에 힘이 실리는 그래픽 영상에 대한 거부감으로까지 이어진다. 단, 한국 관객을 잡으려면 보이지 않는, 티가 안 나는 CG를 써야 한다. 들키지 말아야 한다. 나 역시 그런 차원에서 CG에 접근했다. 태풍호가 가라앉는 장면 등 몇몇 장면만 제외한다면 CG가 주가 되는 장면은 없다. 실재를 우선으로, CG는 그것을 보강해줄 뿐이다. 만족스럽다. 하지만 한번 더 하면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다.
-가장 속상한 장면도 있을 테고, 생각만큼 근사하다고 느끼는 장면도 있을 텐데.
=많다. 가장 속상하고 안타까운 것은 카체이싱 장면이다. 자본과 일정과 기술력의 한계를 많이 실감했다. 할리우드 액션영화의 카체이싱 장면을 따라할 만한 노하우가 우리에게는 없다. 고도로 훈련된 인력도 부족하고. 이것만을 위해서 태스크 포스팀이 구축되어야 하지만, 알다시피 아직은 힘든 일이다. 가장 ‘해냈다!’라고 느끼는 것은 마지막 화물칸에서의 결투 장면이다. 미국영화와 맞장을 떠도 손색이 없다고 자신한다.
-선상 결투 장면에서 장동건은 “우리 다음 세상에서 만난다면…”이라고 말한다. 어떤 말이 생략되어 있는 건가.
=(웃음) 굉장히 쑥스럽고 상투적인 대사일 것이다. 그래서 뒷부분은 말을 안 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표면적으로 배치한 이정재의 내레이션과 함께 병렬적으로 배치하기에는 작가로서도 쑥스러운 부분이 있다. 하지만 남북한 문제에서는 그게 맞다고 생각한다. 신파적이고, 단순하고, 표면적이지만, 그렇게 가도 된다. 남북한 문제는 우리에게 이심전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신파의 기능은 무엇일까. 한국형 블록버스터를 위해서는 필연적인 요소라고 믿나.
=그것은 내가 어떤 관객을 선택하느냐의 문제다. 아침 드라마를 보는 아줌마도 포함할 것인가, 고급스럽게 영화를 보고 싶어하는 특정 관객도 만족시킬 것이냐. 주요 소구 관객에 따라서 신파를 어느 정도 넣어야 하는지가 결정된다. 그런 면에서 내 신파는 다른 감독님들보단 약하다고 생각하지만(웃음), 스탭이나 PD의 의견을 충분히 수렴해가며 수위를 조절했다. 물론 어떤 장면들은 조금 닭살 돋는 신파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폭넓은 관객을 목표로 하는 <태풍> 같은 작품에, 한국적 신파는 유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