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설연휴 즐길거리 [5] - 영화화된 게임
2006-01-27
글 : 박상우 (게임평론가)

1982년 미국, ‘퐁’으로 세계를 재패했던 게임회사 아타리가 무너졌다. 이른바 ‘아타리 쇼크’의 원인에 대해서는 이런저런 설명이 많지만 역시 외계인의 책임이 결정적이다. 크리스마스를 맞아 대량 출시한 게임 <E.T.>가 기록적으로 저조한 판매고를 보이며 회사가 도산 직전으로 몰린 것이다. 판권을 비싸게 인수한 만큼 제작비를 아끼며 대충 만든 게임으로 영화 팬들의 주머니를 털려는 계획은 처절하게 실패했다. 아타리 쇼크는 혼자만의 몰락으로 끝나지 않았다. 다른 회사들까지 덩달아 어려워지면서 미국 게임산업 전체에 침체기가 닥쳤다.

20년이 흐른 지금 많은 것이 달라졌다. 연출이나 표현에서 영화 못지않은 스펙터클을 보여주는 게임들이 등장했으며 시장도 영화산업보다 커졌다. 또한 영화가 오히려 게임을 벤치마킹하기도 하고, 블록버스터 게임이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한다. 게임과 영화는 이렇게 다시 만났다.

여전히 ‘이건 아니다’

게임의 후광에 편승하려 드는 영화들은 영화의 떡고물을 노린 게임만큼이나 많다. 적지 않은 영화 제작자들이 인기 게임 라이선스를 땄다는 것만 내세워 게임 팬들을 끌어들이려고 했다. 이래서야 제대로 된 영화가 나올 리 없다. 원작의 팬일수록 분노하는 영화들이 얼마든지 있으니, 영광스러운 대표 주자가 <스트릿 파이터>다. ‘캡콤’이 자랑하는 2D 대전 액션 게임 <스트릿 파이터>는 대전 액션 게임의 표준을 만들어내며 오락실에 새로운 장르가 자리잡게 한 선구적 게임이다. 게임뿐 아니라 등장인물의 인기도 대단했는데 특히 차이나 드레스를 펄럭이며 강철의 허벅지를 자랑하던 춘리는 <킹 오브 파이터스>의 마이와 함께 2D 대전 액션 최고의 히로인으로 불멸의 명성을 쌓았다. 다른 캐릭터들도 하나같이 독특한 개성을 보여주었는데 영화화되면서 이를 살려내지 못한 것이 비극의 핵심이다. 불을 뿜는 요가승 달심이나 거구에도 날렵하게 몸을 날리는 레슬러 장기에프 등은 배우들의 과장된 몸짓과 함께 안 웃긴 개그 캐릭터로 전락했다. 주연을 맡은 장 클로드 반담의 팬들은 그저 당혹스러웠을 뿐이며 게임 팬들의 마음에는 깊은 상처가 남았다. 물론 흥행 성적은 처참했다.

<마리오 브라더스>
<스트릿 파이터>

닌텐도를 대표하는 마리오 역시 영화로 만들어졌다. <마리오 브라더스>는 아타리 쇼크로 미국시장이 몰락한 틈을 타 일본 제작사 닌텐도가 미국시장, 나아가 세계 게임시장을 점령하는 첨병 역할을 했던 플랫폼 액션 게임의 고전이다. 역시 닌텐도 게임인 <동키 콩>에서 조역으로 출연했던 마리오 형제가 이번에는 주역으로 발탁되어 청출어람격으로 대성공을 거두고 이후 콘솔 게임으로 이식되면서 닌텐도의 간판 자리를 차지했다. 그래서인지 배우에도 신경 써서 주인공 마리오 역에는 밥 호스킨스, 악당 쿠파로 데니스 호퍼, 데이지 공주에 사만다 마티스까지 제법 이름있는 배우들이 참여했다. 하지만 영화사들이 간과한 것은 게임 <마리오 브라더스>의 재미는 긴박감 있는 줄거리와 멋진 캐릭터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할리우드의 일급 배우들은 조잡한 2D 도트 그래픽에 완패했다. 게임 속 마리오는 배불뚝이 콧수염 아저씨 주제에 사람들을 사로잡았지만, 영화의 중년 형제는 관객을 우울하게 할 뿐이었다. 물론 영화는 대실패를 거두었다.

하지만 <스트릿 파이터>와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 그리고 그 밖의 모든 게임 출신 영화의 악명을 바래게 할 눈부신 영화가 2003년 등장했다. <하우스 오브 더 데드>는 슈팅 게임의 고전이자 장르의 개척자격이다. 게이머가 다루어야 하는 것은 버튼이나 레버가 아니라 총이다. 커다란 화면 앞에 단단히 버티고 서 끝도 없이 달려드는 좀비를 쏘고 또 쏜다. 총 모양 컨트롤러를 사용하는 손맛, 좀비에 대한 상식을 뛰어넘는 날렵한 액션 좀비 군단, 다양한 분기에 따른 이야기 전개 등 이 게임은 오랫동안 최고의 작품으로 평가받았다. 하지만 영화로 만들어지니 전혀 다른 물건이 나왔다. 게임의 재미를 영화로 제대로 표현 못한 게 문제가 아니다. 종잡을 수 없는 주인공들, 엉성하다 못해 제멋대로 흘러가는 이야기, 남발되는 엉성한 특수효과, 아무 맥락없이 툭하면 삽입되는 게임 화면 등 영화의 완성도에 비교적 너그러운 B급 호러영화 팬들조차도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능성이 보이는 걸’

영화화된 <툼레이더>
라라 크로프트

다행히 게임 출신 영화들이 모두 팬을 배신한 것은 아니다. 가능성을 보여준 영화들 중 <툼 레이더>가 있다. 에이도스가 발매한 PC 어드벤처 게임 <툼 레이더>는 게임판을 지배했던 마초 영웅 대신 자아가 강한 여성을 주인공으로 삼았다는 것만으로도 새로웠다. 게다가 무조건 총을 쏘아 갈기며 둘러엎는 대신 곡예에 가까운 액션과 지적 능력, 특히 역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보여주는 문제 해결 방식은 당시 어드벤처 장르 분위기를 일신하는 계기가 되었다. 게임은 대성공을 거두었고 주인공 라라 크로프트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게임 쇼 등에서 라라 역을 맡은 캠페인 걸 역시 덩달아 인기를 끌 정도였다. 영화 <툼 레이더>가 게임 내용을 재현하기보다는 라라 크로프트라는 캐릭터의 매력을 살리는 데에만 초점을 맞춘 것은 올바른 선택이었다. 물론 주연을 안젤리나 졸리로 낙점한 것은 더욱 올바른 결정이다.

안젤리나 졸리가 나온 영화의 평은 내용과 상관없이 ‘졸리 언니 멋져요’로 요약된다. 전개가 조금 엉성해도, 줄거리가 약간 진부해도, 캐릭터의 매력이 관객을 홀리는 것이다. 특히 <툼 레이더>의 라라는 게임 제작 때부터 졸리를 염두에 두고 만들었나 의심될 정도로 개성이 맞아떨어져서 더욱 돋보였다. 완성도가 떨어지느니 액션이 진부하니 하는 구설수에 시달리면서도 흥행에 성공한 것은 이 때문이다.

캡콤이 내놓은 액션 어드벤처에 기반한 <레지던트 이블> 역시 게임을 영화화하는 데 중요한 것은 스토리를 따라가는 게 아니라 게임의 느낌과 스타일을 형상화하는 데 있다는 것을 알고 만든 영화다. 캡콤의 최근 어드벤처들은 이미지를 극도로 중요시하는 경향을 보인다. <레지던트 이블>은 게임에서나 나올 현란한 이미지와 빠른 전개, 멋진 주인공으로 일정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이런 비슷한 장치를 채택하고도 평가가 애매한 건 <둠>이다. 이드 소프트의 <둠>은 일인칭 슈팅 장르의 고전으로, 최고로 재미있고 완성도 높은 게임일 뿐 아니라 시리즈가 새로 나올 때마다 기술적 한계를 극한까지 끌어올리며 장르를 선도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둠>은 좁고 어두운 공간에서 느끼는 공포에 초점을 맞춘다. 전통적으로 빈약한 스토리 라인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둠 속에서 혼자 움직이며 적과 싸우고 공포를 극복해가는 과정이야말로 <둠>의 재미인 것이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이를 잡아내기 힘들다. 일인칭 시점이 주는 고독이 영화에는 불가능한 것이다. 해병대의 힘겨운 싸움이 아무리 아슬아슬하게 펼쳐지더라도 게임에서 느끼는 절박함은 없다. 오락영화로서의 재미나 연출이 수준급임에도 어딘가 아쉬워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기대할 수 있을까?

영화화가 진행중인 엑스박스의 <둠>

아직 제작되지 않은 게임 출신 영화들 중 주목할 만한 것은 <헤일로>. <헤일로>는 번지 소프트에서 제작한 근미래 배경의 일인칭 슈팅 게임이다. 전 우주를 놓고 외계인과의 전쟁이 벌어진다. 일단 스케일이 크고,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상호 기만과 배신, 또는 이념과 현실 사이의 괴리까지 이 게임은 영화적 이미지 장치와 이야깃거리를 많이 사용한다. <둠>과 같은 장르지만 상당히 느낌이 다르다. 마치 영화에서처럼 다음 편을 기대할 수 있는 장치를 게임 속에 넣기까지 했다.

<헤일로> 시리즈는 마이크로소프트를, 그리고 엑스박스를 대표하는 게임이다. 영화까지 만들어서 대대적으로 홍보하면 좋기야 하겠지만 어설프게 만들어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 꼴이 나면 이만저만 큰일이 아니다. 가장 좋은 것은 흥행 신기원을 세우는 것이겠지만 돈은 못 벌더라도 최소한 제2의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 소리는 듣지 말아야 한다. 마이크로소프트는 <헤일로> 영화화를 위해 최고의 제작진을 모아들였다.

우선 총 제작을 맡은 것은 피터 잭슨이다. 게임 <헤일로>를 영화에 맞는 이야기로 뜯어고쳐줄 작가로는 <28일후…>의 시나리오를 쓴 알렉스 갈란드가 선정되었다(그는 마이크로소프트에서 100만달러를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감독은 <미믹>과 <헬보이> 등을 만든 ‘기예르모 델 토로’가 맡았다. 최고의 제작진이 모였다고 반드시 좋은 영화가 만들어지란 법은 없다. 하지만 게임 출신 영화의 신기원을 이룰 수 있을지 기대되는 것은 사실이다.

누가 이 감독 좀 말려줘

영화로 만들어 게임을 망치는 감독, 우베 볼

본문에서 언급은 안 했지만 <하우스 오브 더 데드> 못지않게 게임 팬의 혈압을 올리는 영화들이 또 있다. 여자 뱀파이어가 되어 적을 물리치는 흡혈 액션 게임 <블러드레인>, 호러 게임의 대명사 <얼론 인더 다크>는 <터미네이터3>의 T-X 크리스타나 로켄을 비롯, 여러 유명 배우를 기용하고도 좌절만이 남는 영화가 되었다. 이 영화들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사실은 감독이 같은 사람이다.

우베 볼. 독일 출신 40대 감독으로, 어째서인지 게임을 영화화하는 데 열성적이다. <하우스 오브 더 데드>를 시작으로 계속되는 부진 속에서도 그 열의는 수그러들 기세를 보이지 않는다. 앞으로도 대량 몬스터 살상 게임 <헌터 더 리커닝>, 미지의 섬에서 외롭게 전투를 벌여나가야 하는 FPS의 신예 <파 크라이>, 게임 사상 최악의 폭력성으로 악명 높은 <포스탈> 등을 줄줄이 영화로 만들겠다며 전의를 불태우고 있다. 게임 팬의 악몽은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말려줄 사람이 필요하다.

일러스트레이션 김제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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