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화사해진 베를린의 날씨는 봄이 슬금슬금 기어오고 있다는 예감을 하게 만든다. 강 위를 동동 떠다니던 얼음은 녹은 지 오래이며, 관객은 우중충한 겨울이 영원히 지속될 것 같던 베를린에서 마침내 태양빛을 가진 축제를 즐기기 시작했다. 제56회 베를린국제영화제가 어느덧 중반 레이스에 접어들었다. 영화제 역사상 가장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올해 베를린은 개막전의 예상처럼 정치영화들의 독보적인 행보가 계속되고 있으며, 화제작도 이어지고 있다. 베를린영화제의 중간 결과를 점검해보고, 화제작들을 세개의 경향(정치, 섹슈얼리티의 정치, 상상력과 실험)으로 나누어 집중적으로 소개했다.
베를린의 한기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 “정치는 삶이다. 내가 베를린에 있는 이유는 이것이 정치적인 영화제이기 때문”이라는 심사위원장 샬롯 램플링의 선언과 함께 시작한 베를린국제영화제의 기운이 슬슬 끓어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세상도 함께 끓어오르고 있다. 덴마크의 마호메트 풍자만화가 가져온 정치적 소용돌이가 채 가시기도 전에 두명의 독일 엔지니어가 이라크에서 납치되었고, 덴마크 작품들은 인기작으로 급부상했다. 기자회견장도 날카로움의 연속이다. 한 아프리카 출신 기자가 경쟁작인 덴마크영화 <엔 소프>의 감독에게 풍자만화에 대한 입장을 묻자 진행자는 “그냥 앉아달라. 나중에 개인적으로 물어보든지 하라. 이 영화는 마호메트와는 상관이 없는 영화다”라고 냉정하게 말을 잘랐고, 무슬림 이민자들의 고뇌를 그린 덴마크영화 <1:1>의 감독은 질문이 빗발치는 관객과의 대화에서 “이상하고 비극적인 방식으로, 내 영화가 지금 덴마크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의 일부를 반영하는 것처럼 되어버렸다”며 비극적으로 토로했다. 그런 가운데 집행위원장 디어터 코슬릭이 “430여명의 관타나모 수감자들이 모두함께 레드 카펫을 밟는 것을 보고 싶다”는 야심을 내보이며 초청한 마이클 윈터보텀의 <관타나모로 가는 길>은 베를린의 정치적 화염에 기름을 끼얹었다. <타게스 슈피겔>은 “영화제가 중반에 접어들더니 이제는 공공연하게 정치적인 색채를 드러내고 있다”고 말한다. 베를린의 날씨는 이제야 온기를 품기 시작했으나 영화제는 불타고 있는 중이다.
“전 부문에 걸친 존경받을 만한 프로그래밍”
그러나 황금곰의 행방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보수적인 독일 일간지 <디 벨트>마저 “<관타나모로 가는 길>은 황금곰상으로 가는 길”이라고 격찬한 <관타나모로 가는 길>을 제외하고는 수상을 점칠 만한 작품이 나오지 않고 있다. 9개국 평론가의 손을 빌려 모든 경쟁부문 상영작에 별점을 매기는 <스크린 인터내셔널 데일리>의 집계에서도 작품들이 고만고만한 평가를 받은 가운데, 로버트 알트먼의 <프래리 홈 컴패니언>과 마이클 윈터보텀의 <관타나모로 가는 길>만이 선두를 지키고 있다. 그 뒤를 따르는 것은 보스니아 내전의 가슴아픈 유산을 다룬 <그르바비카>와 출소한 강간범의 비극적 로맨스를 다룬 독일영화 <자유의지>. 그래서 <버라이어티>의 “디어터 코슬릭은 전 부문에 걸쳐서 존경받을 만한 프로그래밍을 해냈다”는 칭찬에서는 ‘전 부문에 걸쳐서’라는 말을 꼭 짚고 넘어가야 한다. 경쟁부문뿐만 아니라 파노라마와 포럼, 킨더필름 섹션에서 화제작들이 속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피터팬의 공식>과 <방문자들> <인 비트윈 데이즈> 등 한국영화들이 모두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 포럼 섹션은 정치적인 목소리를 명확하게 발언하는 영화들과 새로운 실험정신을 과시하는 질좋은 소품들도 가득하다. 크리스토프 델헤흐테 포럼 위원장은 “세계에서 날아온 포럼부문의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신문을 읽는 것보다 더 깊이 세상을 알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라고 자찬을 보내고 있다.
올해 베를린의 또 다른 특징인 ‘다국적 영화의 부상’은 기자회견장에서도 감지할 수 있었다. 회견장은 프랑스어와 스페인어와 영어가 뒤죽박죽이 되거나(<수면의 과학>), 영어와 한국어와 일본어와 만다린어가 왔다갔다하거나(<무극>), 독일어와 보스니아어와 영국어가 뒤섞이는(<그르바비카>), 언어의 용광로로 화했다. 영화의 세계화는 자본이 아니라 국적에 개의치 않는 배우들의 행보에서 시작되는 모양이다. 이러니 고향 배우들의 입에서 고향 자랑을 들으려는 기자들의 촌스러운 노력은 더이상 소용이 없다.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은 멕시코 배우라는 자부심을 어느 정도 생각하냐는 자국 기자의 질문에 냉담한 어조로 “나는 멕시코인이라는 개념이 별로 않다. 그저 내가 가진 여권이 멕시코 국적일 뿐이다. 물론 내 안에는 멕시칸이라는 무의식이 있겠으나 그걸 내세우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다”라고 답했고, 휴고 위빙은 호주 출신 스타들이 호주 영화산업에 좀더 기여해야 하지 않겠냐는 자국 기자의 질문에 “호주 영화산업은 산업이 아니라 감독들의 작은 공동체에 불과하다. 나는 세상을 여행하는 것이 좋으며, 한 국가에 나를 묶어둘 생각은 추호도 없다”고 답하기도 했다. <게이샤의 추억>이 베를린에 왔다면 꽤 재미있는 일이 벌어졌겠다는 생각이 슬금슬금 들기 시작했다.
빛나는 영화, 빛나는 스타들
기대보다 많은 스타들의 행보가 이어지는 것은 집행위와 관객에게 더할 나위 없는 미소를 안겨주고 있다. 조지 클루니, 메릴 스트립, 린제이 로한, 내털리 포트먼을 비롯한 할리우드 스타들의 방문은 예년과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다. 베를린의 타블로이드들은 신이 났고, 레드 카펫은 발자국이 사라지는 날이 없다. 날씨마저 화창해진 베를린영화제는 정치라는 이슈에 스타라는 양념을 치며 점점 축제에 어울리는 장소로 변해가는 중이다. 게다가 시드니 루멧의 <유죄를 입증해봐>(Find Me Guilty)와 클로드 샤브롤의 <힘의 코미디>(Comedy of Power), 두편의 이란영화와 독일 자국 언론의 기대를 한몸에 받고 있는 한스 크리스찬 슈미트의 <레퀴엠> 등 황금곰의 행보를 예측하게 만들 기대작들이 후반부에 몰려 있는 것도 축제의 분위기를 지속시키는 데 큰 힘을 안겨주고 있다. 베를린영화제는 일정의 절반이 흐른 지금에 와서야 본격적인 축제의 막을 올렸다.
쿼터없이, <올드보이>도 없다
박찬욱 감독, 베를린에서도 스크린쿼터 축소 항의 시위
현지시각으로 지난 2월14일 오후 3시, 메인 상영관인 팔라스트 앞 광장에서 박찬욱 감독이 스크린쿼터 축소에 반대하는 1인 항의 시위를 가졌다. 박찬욱 감독은 영상 1, 2도를 오가는 쌀쌀한 날씨 속에도 앞뒤로 ‘한국영화는 위기에 처해 있다’(Korean Films Are In Danger), ‘스크린쿼터 없이는 <올드보이>도 없다’(No Screen Quota=No Old Boy)라고 쓴 피켓을 들고 1시간 반가량 시위를 펼쳤다. 이날 팔라스트 광장에는 주로 아시아계로 구성된 30여명의 다국적 영화기자들이 박 감독의 1인 시위를 보기 위해 몰려들었다. 박 감독은 시위 하루 전에 베를린 탤런트 캠퍼스(Berlin Talent Campus)가 주최한 행사에서도 스크린쿼터와 관련된 발언에 30여분을 할애했다. <무극>의 기자회견에 참석한 장동건 역시 “영화는 문화이며 한 국가의 정서를 대변하는 것”이라고 발언하며 쿼터제 축소에 대한 의견을 피력하기도 했다.
외국 언론인들의 반응은 대체로 호의적이다. 대만 <애플 데일리 퍼블리케이션> 기자 제시카는 “같은 아시아인으로서 한국 감독과 배우들이 해외영화제에서 이런 발언을 하는 것이 용감한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고, 베를린 지역신문 기자 안드레아스 유틀너는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프랑스는 모든 라디오 방송이 50%를 자국음악으로 채워야만 한다. 할리우드에 대항하는 일정한 방어벽 역시 어느 국가에나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일부 유럽 언론인들은 조금 다른 의견을 나타내고 있다. 독일 독립영화 감독 패트릭 메츠거는 “한국영화의 점유율이 70%에 달한 달도 있다고 들었다. 그래서 이곳에서 스크린쿼터를 부르짖는 것은 매우 국수적인 행위로 느껴진다”며 우려를 나타냈다. 사실 이날 박찬욱 감독의 1인 시위는 (영화제 최고 화제작 <관타나모로 가는 길>의 기자회견과 겹친 탓도 있지만) 비아시아계 기자들의 무관심 속에 진행되어 상당한 아쉬움을 남겼다. 상당수의 아시아계 기자들은 시위가 베를린에서 이슈를 불러일으키기 위해서는 쿼터제와 한국 영화산업을 설명해줄 수 있는 간략한 보도자료라도 미리 기자들에게 제공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