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제56회 베를린영화제 중간결산 [3]
2006-02-24
글 : 김도훈

섹슈얼리티와 정치: 인간의 은밀한 상처를 들여다보다

인간의 은밀한 상처를 들여다보며 논의를 사회적 차원으로 확장시키는 영화들의 공통점은 보는 것이 한없이 불편하다는 사실이다. 감독은 캐릭터의 폐부를 도려내어 관객에게 던지고, 관객은 그것을 받아서 삼켜야만 한다. 올해 베를린은 다만 거대한 정치적 현안을 다루는 작품들 외에 개인적인 고뇌로부터 정치적 발언을 끄집어내는 작품들이 많았다. 특히 덴마크영화 <엔 소프>는 소프 오페라 방식을 차용한 장르적 실험을 바탕으로 윗집 여자와 아래층 트랜스젠더의 기묘한 우정을 그려냈다. 데뷔감독인 페킬레 피셔 크리스텐센은 마치 도그마영화처럼 찍은 이 작품을 통해 섹슈얼리티의 모호함이라는 주제를 잘 버무려내고 있다. 가장 인상적인 두 작품은 완벽하게 상반된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한편은 한 인간으로서 연쇄강간범의 초상을 그리는 작품이고, 다른 한편은 연쇄강간의 씨앗을 키우는 어머니의 가슴저린 고백이다. 하지만 두 영화 모두 인간에 대한 속죄와 구원을 그린다는 점에서 하나의 구심점에 닿아 있다.

<자유의지>(독일)

테오는 젊은 여인들을 참혹하게 강간하고 폭행한 죄로 9년을 복역한 뒤 출소한다. 인쇄소에서 일하며 사회적응을 시작한 그는 끊임없이 자신의 파괴적인 욕망과 싸워야만 한다. 그리고 다른 한편에는 남자들과의 관계를 거부하며 살아가는 인쇄소 사장의 딸 네티가 있다. 둘은 머뭇거리며 조심스레 서로에게 다가가지만 테오는 자신의 자유의지가 폭력적인 본능을 억제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달아난다. 아무런 조명과 음악도 없이 로키로 느릿하게 진행되던 영화는 여기서부터 괴이한 로맨스로 빠져든다. 테오는 또다시 연쇄강간을 시작하고, 네티는 사실을 알고서도 테오를 찾아나선다.

“이번 영화제에서 가장 논쟁적이고 관객을 불편하게 하는 작품”이라는 <타게스 슈피겔>의 평처럼 <자유의지>는 끊임없이 관객을 괴롭힌다. 솔직하고 적나라하게 촬영된 강간 장면은 눈을 고통스럽게 만들고, 그저 관찰자의 시점으로만 지켜보는 냉정한 카메라는 차갑게 서려 있다. 과연 폭력적 본능을 억제하지 못하는 연쇄강간범의 사랑 이야기가 정당화될 수 있을 것인가. 감독은 “<자유의지>는 강간범에 대한 영화가 아니라 어느 특정한 강간범 개인의 이야기를 다루는 영화다. 과학적 치료니 어쩌니 하는 문제를 다루기 위한 영화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2시간 반의 기나긴 여정이 마침내 바닷가에 도달하는 순간 감독의 말은 마침내 빛을 얻는다. 테오는 스스로의 손목을 깊숙하게 그어버리고, 싸늘하게 식어가는 그의 옆에서 네티는 울부짖다가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본다. 삶과 죽음이 모두 속죄와 구원의 또 다른 방식임을 나직하게 말하는 마지막 장면의 먹먹함은 극장을 나선 뒤에도 쉽게 가슴에서 털어내지 못한다.

<그르바비카>(독일, 오스트리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야스밀라 즈바닉의 데뷔작인 <그르바비카>는 내전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사라예보로 관객을 데려간다. 밀랴나는 오래전에 세르비아 군인들에게 강간당해 낳은 딸 사라를 키우며 살아가는 보스니아의 어머니다. 그는 딸의 수학여행비를 벌기 위해 나이트클럽의 웨이트리스로 아르바이트를 한다. 하지만 자신이 흉악한 범죄의 씨앗이 아니라 상이용사의 딸이라고 믿고 있는 사라는 어머니에게 “상이용사 증명서만 있으면 공짜로 여행을 갈 수 있다”고 말하며 속을 썩인다. 밀랴나는 사라를 끝까지 속이려 하지만 사춘기에 접어든 딸은 진실을 알고 싶어한다. 감독인 즈바닉은 1992년에 다큐멘터리 작업을 위해 강간당한 여인들의 이야기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과거의 아픔을 간직한 여인들을 카메라 앞에 차마 세울 수 없었던 그는 같은 주제로 극영화를 만들기로 결심했고, 자신의 고향이자 가장 흉악한 학살이 벌어졌던 장소이기도 한 사라예보의 ‘그르바비카’ 지역에서 첫 장편영화를 찍어냈다. “이 영화가 피해자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안겨주는 동시에 보스니아 정부의 미온적인 대처를 바꿀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감독의 말처럼, <그르바비카>는 형식적으로는 조금 서툴지만 주제의식에 대한 초점을 결코 흐트려뜨리지 않는다.

영화가 감정적인 동요를 가장 크게 일으키는 것은 과거가 폭로되는 순간이다. 밀랴나는 반항하는 딸에게 출생의 비밀을 폭로하고, 결국 말없이 소풍을 떠나는 딸과 떠나보내는 어머니는 버스 창문을 사이에 두고서야 비로소 다시 눈을 맞춘다. 그 순간 <사라예보 내 사랑>이라는 촌스러운 동유럽풍 음악과 희망을 품은 사라의 미소가 겹친다. <그르바비카>는 보스니아가 참혹한 과거의 혼령에서 벗어나 새로운 희망을 찾아가기 시작했다는 증거다.

실험적 영화들: 베를린을 달군 젊은 피

베를린영화제는 오랜 역사를 지녔으면서도 젊은 피의 수혈에 앞장서왔다는 자부심을 가진 장소다. 올해도 모든 부문에 걸쳐 다양한 실험적 사고를 요하는 작품들이 관객을 찾았다. 물론 어떤 종류의 실험은 관객과 비평가들에게 끊임없는 두통을 안겨주기도 한다. 파노라마 부문에서 상영된 루카스 무디손(<퍼킹 아말>(Fucking Amal))의 <컨테이너>가 바로 그런 작품이다. “도대체 무디손의 머릿속에서 뭐가 진행되고 있는지 알 길이 없다”는 <스크린 인터내셔널>의 낙담처럼, 지나 말론(<도니 다코>)의 내레이션과 함께 뚱뚱한 트랜스젠더 남자의 이미지가 끊임없이 흘러가는 이 작품은 관객의 적극적인 참여조차 무력화시키는 실험영화다. 첫 상영 뒤 열린 관객과의 대화는 ‘도대체 당신 왜 이러냐’는 투의 질문과 ‘당신들이 뭐라든 상관없다’는 무디손의 불손한 대답이 부싯돌처럼 부딪치며 불꽃을 일으켰다.

<수면의 과학>(프랑스)

미셸 공드리의 세 번째 장편영화는 무거운 정치영화에 지친 관객의 무의식을 사랑스럽게 토닥거리며 영화제 초반 최고의 인기작 중 하나로 떠올랐다. 멕시코인 스테판은 엄마의 부탁으로 프랑스로 건너온다. 달력 디자이너인 그는 옆방으로 이사온 프랑스 여인 스테파니와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꿈과 현실을 혼동하며 살아가는 스테판의 기묘한 세계는 둘의 사랑을 위기로 몰아넣는다. 사실 이 영화에 내러티브 따위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찰리 카우프먼과 할리우드를 떠나 고향인 프랑스로 돌아온 미셸 공드리는 <수면의 과학>을 아주 개인적인 상념처럼 만들어냈다. ‘무의식과 의식의 경계’라는 주제를 표현하기 위해 쓰여진 수공예 특수효과는 마술적인 상상력이 무엇인지를 뚜렷이 보여준다. 하지만 <수면의 과학>은 장점만큼 결함도 또렷한 영화다. 여기에는 <이터널 선샤인>이 보여주었던 정서적 울림은 별로 남아 있지 않으며(<타게스 슈피겔>이 “공드리의 엄청난 상상력은 그칠 줄 모른다”고 경외를 보내긴 했지만) 공드리의 오랜 팬이라면 영화 속 장면들이 거의 하나도 빠짐없이 지난 10여년에 걸친 그의 뮤직비디오들에서 도용한 것이라는 사실을 금세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의 천진한 매력이 여성관객의 목덜미를 끊임없이 간지일 <수면의 과학>은 분명히 사랑스러운 소품이다. 하나 공드리에게는 여전히 찰리 카우프먼 같은 이야기꾼 친구가 필요할 듯하다. 그리고 전문 영어교사도 필요하겠다. 그의 프랑스식 영어는 귀엽긴 하지만 도저히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기자회견장을 곤경으로 몰고 갔다.

<브라더스 오브 헤드>(영국)

<로스트 인 라만차>의 키스 풀톤, 루이스 페페 감독이 이번에는 가짜 다큐멘터리의 세계로 돌아왔다. SF작가 브라이언 올디스의 원작을 토대로 한 이 작품은 가상의 샴쌍둥이 록스타의 삶을 마치 새롭게 찾아낸 기록영화인 양 시침 뚝 떼고 관객에게 들이민다. 배리와 토마스 하위 형제는 가슴이 붙어 있는 샴쌍둥이. 그들은 흥행사에게 팔려가 ‘뱅뱅’이라는 록그룹을 결성하고, 독특한 외모와 반항적인 성격으로 인기를 얻어 글램록 스타가 된다. <브라더스 오브 헤드>는 꽤 맛깔나는 가짜 다큐멘터리다. 원작자 브라이언 올디스와 켄 러셀 감독이 능청스레 출연해 증언을 늘어놓고, 켄 러셀이 만들었다는 가짜 극영화의 장면들마저 삽입한다. <이것이 스파이널 탭이다>와 조너선 코예트의 <타네이션>을 사랑했던 관객들이라면 즐길만한 영화다. 문제는 이 작품이 스스로를 지나치게 진지하게 받아들이면서 우스꽝스러워질 때가 종종 있다는 사실인데, 오리지널 사운드트랙이 금쪽같으니 용서가 된다.

취재지원 진화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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