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제56회 베를린국제영화제 결산 [1]
2006-03-02
글 : 김도훈

베를린의 선택은 예상 밖이었다. 하지만 모든 영화제의 선택은 언제나 예상을 벗어나게 마련이다. 올해 베를린영화제는 “심사위원들은 세상을 개선할 수 있다고 믿는 작품들 중에서도 간접적으로 돌아 말하지 않고, 가장 심플하고 직접적으로 이런 의지를 보여주는 작품들을 고른 모양”이라는 <디 벨트>의 말처럼, 세상에 대해 명쾌하게 발언하는 영화들에 상을 안기며 열흘간의 축제를 마무리했다. 제56회 베를린영화제의 수상 결과를 점검하고, 후반기 화제작들을 한데 모았다.

영화제가 딱 8일째 되는 날, <버라이어티>가 발간하는 데일리 매거진은 “베스트는 아직 오지 않았다”고 단언했다. 사실 <관타나모로 가는 길>을 제외하고는 화끈하게 영화제를 달아오르게 만든 영화가 드물기는 했다. <사이트 앤드 사운드>의 닉 제임스는 “베를린영화제가 잘해왔던 막판 뒤집기 전술의 일부일지도 모른다. 2년 전에도 모두가 실망스러운 경쟁부문이라고 불평이 대단했는데 막판에 <비포 선셋>과 <미치고 싶을 때>가 나타났다”며 아직은 기대를 거둘 때가 아니라고 조심스레 전망했다. 모두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폐막을 사흘 앞둔 경쟁부문에는 속속 흥미로운 작품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두편의 독일영화인 한스 크리스찬 슈미트의 <레퀴엠>과 발레스카 그리세바흐의 <갈망>은 정치적으로 치열하고 영화적으로 서툰 영화들로 채워진 경쟁부문에 미학적 빛을 밝혔고, 자파르 파나히의 <오프사이드>와 라피 피츠의 <겨울>은 정치영화의 다양한 지정학을 꿈꾸는 베를린의 의도에 적절하게 부합하는 작품들이었다.

베를린, <그르바비차>의 작은 진정성을 품다

<그르바비차>

그러나 베를린의 선택은 예상을 벗어났다. 심사위원단은 큰 주목을 받지 못했던 보스니아영화 <그르바비차>에 황금곰을 안기며 기자석을 일순간 침묵 속으로 빠뜨렸다. “<그르바비차>가 금곰상을 수상하리라 예상한 사람이 있었다면 일단 의심의 눈으로 볼 일이다. 이 작품의 수상을 예측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라고 말한 <디 벨트>의 사설은 전혀 틀린 말이 아니다. 세르비아 군인들에게 강간당해 낳은 딸을 키우는 보스니아 어머니의 고통을 그린 <그르바비차>는 신인감독의 거친 연출력이 못내 아쉬운 작품이었다. 하지만 기자석 어디에서도 무례한 야유는 터져나오지 않았다. 그것은 이 작은 영화의 진정성에 황금곰을 안긴 심사위원들의 의도를 이해한다는 무언의 지지였을 것이다. 시상대에 선 감독 야스밀라 즈바니치는 “심원할 정도로 감동적인 순간이다. 정말로 감사한다. 그리고 간절히 소망한다. 보스니아는 이제 서구 미디어에 등장하지도 않는다. 보스니아 내에서도 마찬가지다. 강간 피해자들은 보스니아에서 더이상 주목받지 못한다. 사회생활의 최저단계에 놓여 있으며, 겨우 한달에 정부로부터 15유로를 받으며 살아간다. 내 영화가 많은 시선을 끌어 이런 상황을 바꿀 수 있기만 빈다”며 눈물을 흘렸다.

황금곰상의 가장 유력한 후보였던 <관타나모로 가는 길>의 마이클 윈터보텀은 감독상을 수상했고, 그랑프리는 자파르 파나히의 <오프사이드>와 페르닐레 피셔 크리스텐센의 데뷔작인 <엔 소프>에 공동으로 돌아갔다. 이란영화인 <오프사이드>와 덴마크영화인 <엔 소프>가 공동으로 그랑프리를 수상한 것은 카툰 논쟁으로 첨예해진 덴마크와 아랍권을 하나로 묶어 위로하려는 심사위원들의 정치적 구애로 해석하는 것이 적절할 듯하다. <디 벨트> 역시 “은곰상을 덴마크와 이란이 공동 수상한 것은 아무래도 카툰 분쟁에서 균형을 유지하려는 나름의 고육지책처럼 느껴진다”고 해석했다. 나머지 세 부문이 모두 독일배우에게 돌아간 것은 공감할 만한 결과다. 올해 독일영화들은 경쟁부문에서 가장 원숙한 경지에 오른 작품들이었고, 특히 논쟁적인 역할들을 거침없이 소화해낸 독일 배우들의 도전은 평단의 만장일치에 가까운 지지를 얻어냈다. 어쨌거나 베를린은 올해의 우승자들을 선언했다. 많은 뒷말이 구천을 떠돌겠지만 베를린은 영화예술의 미학을 과시하는 작품 대신 세상의 기운을 내비치는 작은 영화들에 상을 안기며 스스로의 철학을 견지했다. 그래서 “우리는 영혼의 자유를 담은 많은 영화들을 보았고, 수상에도 그것을 반영하려고 애썼다”는 심사위원장 샬롯 램플링의 심사평은 충분히 존중받을 만하다.

베를린의 영화들,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물론 세상이 베를린의 선택을 향해 즉각적인 화답을 보일 리는 만무하다. 그러나 몇 가지 재미있는 일이 영화제 폐막 이후 벌어지고 있다. <관타나모로 가는 길>이 상을 타자마자 만 하루 만에 영국의 한 저널리스트가 관타나모 기지에 대한 상세한 기사와 더불어 논쟁을 일으켰고, 블레어 총리 역시 관타나모 기지의 폐쇄를 촉구하고 나섰다는 소식이 들려왔으며, 코피 아난 유엔 총리는 관타나모에서 벌어지는 인권 유린을 조사해야 한다고 발표했다. <그르바비차>가 황금곰상을 수상한 직후 세르비아 언론들은 보스니아 회교도 인종청소의 주범인 라트코 믈라디치가 체포되었거나 투항 협상이 진행 중이라고 보도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그저 우연일 따름이고, 덴마크 국기는 여전히 불타고 있으며, 이란의 여성들은 아직도 축구경기장에 출입할 수 없다. 게다가 “칸영화제처럼 감독과의 개인적인 관계를 유지해 유명 작가들의 작품을 초청해야만 영원한 2인자를 면할 수 있을 것”이라는 <디 벨트>의 지적도 영화제쪽이 새겨들어야 할 말이다. 마켓은 성공적으로 덩치를 불렸으나 베를린은 여전히 출중한 작가들을 경쟁부문에 모셔오는 데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하지만 올해의 베를린은 영화라는 매체가 세상과 함께 숨을 쉬고 있다는 사실을 소박하게 증명해냈다. 그 정도라면 영화제 과객들은 악명 높은 2월 한기를 감수하며 내년에도 또다시 베를린으로 모여들 것이다.

박수와 야유로 들썩이던 날들

영화제 후반의 다른 화제작과 실망작들

<힘의 코미디>

클로드 샤브롤과 이자벨 위페르는 <힘의 코미디>에서 언제나처럼 능숙하게 프랑스사회의 파시즘을 가지고 놀며 베를린의 환대를 받았다. 하지만 클로드 샤브롤의 가장 약한 영화제용 영화였다는 게 평단의 대체적 반응. 노장 시드니 루멧의 <유죄를 입증해 봐>(Find Me Guilty)는 빈 디젤의 기분 좋은 호연과 더불어 무거운 경쟁부문 영화들에 마음이 황폐해져 가던 기자들의 박수를 한껏 받아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아무리 따져보아도 경쟁부문에 있어야 할 영화는 아니었다. 시드니 루멧 역시 “초청을 받고 매우 놀랐다. 이 영화는 영화제용 영화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왜냐고? 이 영화는 지루하지가 않잖아!”라며 기자들에게 연신 농담을 건넸다. 알프레드 바우어상을 수상한 로드리고 모레노의 <엘 쿠스토디오>(El Custodio)는 최근의 아르헨티나 감독들이 가장 잘하는 것, 극도로 미니멀한 시선으로 인물의 미세한 감정을 잡아챌 줄 아는 역량을 과시한다. 하지만 많은 기자들이 지루함을 견디지 못한 채 극장을 떠났고, <타게스 슈피겔>은 “베를린 역사상 관객을 지겹게 만든 영화에 주어지는 상이 있다면 황금곰을 탔을 것”이라고 비꼬았다. 영화제의 가장 커다란 실수는 오스트레일리아영화 <캔디>를 경쟁부문에 초청한 일이다. 히스 레저를 초청하기 위한 집행위의 노력만이 가상한 이 영화는 <바스켓볼 다이어리>와 더불어 ‘십대 청소년을 위한 마약복용 방지 캠페인’의 성의없는 영화화라 불릴 만하다.

정치적으로 복원된 서부극

폐막작인 샘 페킨파의 <관계의 종말 특별판>

올해 베를린은 샘 페킨파의 고전을 폐막작으로 선정했다. 디지털로 복원되어 첫 상영된 <관계의 종말>(PAT GARRETT & BILLY THE KID; Special Edition, 1973)은 악명 높은 무법자 ‘빌리 더 키드’와 보안관 팻 가렛 사이의 결투를 다루는 작품. <관계의 종말>은 1년 뒤에 만들어진 페킨파의 걸작 <알프레도 가르시아의 목을 가져와라>(1974)와 마찬가지로 사라져버린 남성적 세계에 대한 향수와 수정주의 서부영화의 기운을 동시에 품고 있다. <관계의 종말>을 폐막작으로 선정한 영화제쪽의 저의에는 다분히 정치적인 의도가 숨어 있는 듯하다. 텍사스 카우보이가 세상을 주름잡는 시대에 다시 보는 <관계의 종말>은 수정주의 서부영화의 자기 반성적 분위기를 더욱 도드라지게 내뿜고 있다. 특히 빌리의 부하로 등장하는 밥 딜런의 앳되고 날카로운 모습과 영화 내내 흘러나오는 딜런의 명곡 <Knockin’ On Heaven’s Door>가 겹치는 순간에는 더더욱 정치적 ‘복원’의 함의를 숙고하게 만든다.

취재지원 진화영·사진제공 RE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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