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제56회 베를린국제영화제 결산 [2] - 독일영화
2006-03-02
글 : 김도훈
화제작 드물었던 베를린에 활기 불어넣은 독일영화들

독일영화에 봄이 오는가

“독일영화에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새로운 물결이라도 일어나고 있는 듯하다.” <프리 윌>로 예술공헌상을 받은 율겐 보겔은 한 유럽 기자가 흥분한 어조로 던진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새로운 물결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3편의 독일영화가 은곰상을 받았고, 현재 독일영화가 정말 좋은 시간을 맞고 있는 것은 사실인 듯하다.” <관타나모로 가는 길>을 제외하면 화제작이 드물었던 올해 경쟁 부문에서 가장 주목을 받았던 것은 4편의 독일영화였다. 특히 영화제 후반을 장식한 <갈망>(Longing/Senchct)과 <레퀴엠>은 황금곰상의 유력한 후보로 점쳐지며 평단의 호평을 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레퀴엠>(Requiem) 감독 한스 크리스챤 슈미트/ 출연 산드라 휼러, 부르가트 클라우스너

지난 2002년 <불빛>(In Lichter)으로 베를린의 레드카펫을 밟았던 한스-크리스챤 슈미트가 엑소시즘(Exorcism) 드라마로 또다시 베를린을 찾았다. <레퀴엠>은 1976년 독일의 한 시골마을에서 벌어졌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 오랜 간질 병력을 가진 21살의 미카엘라 클링거가 대학입학 허가를 받는다. 아버지의 축복과 어머니의 염려 속에서 대학에 입학한 그녀는 자유로운 공기가 맴돌던 70년대 대학가에서 새로운 미래를 꿈꾼다. 그러나 끊임없이 가톨릭적 금욕을 설교하는 어머니에게 억압되어 살아왔던 클링거의 자아는 자유로운 대학생활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지나칠 정도로 학업에 열중하던 그녀의 육체와 정신은 망가지기 시작한다. 결국 환청과 환각을 동반한 간질 발작에 시달리던 그녀는 집으로 돌아가고, 그녀가 악마에 들려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신부와 부모의 엑소시즘에 스스로를 내맡긴다. 영화는 클링거의 죽음을 보여주는 대신 엑소시즘이 자신을 구원할 것이라는 희망으로 가득 찬 그녀의 모습을 비추며 막을 내린다. 그리고 무심하게 올라가는 자막. “이후 그녀는 여러 차례의 엑소시즘으로 인한 극도의 피로에 의해 사망했다.” 한스-크리스챤 슈미트는 원숙한 솜씨로 영화의 미학적 요소들을 통제하고, 주연인 산드라 휼러는 <버라이어티>의 극찬처럼 “비범하고 마음을 잡아 찢는 연기”를 보여준다. <레퀴엠>은 인간의 어리석음이 종교적 광신을 만났을 때 태동하는 지옥을 그려낸 비범한 소묘다.

<갈망>(Longing/Senhsucht) 감독 발레스카 그리세바흐/ 주연 안드레아스 뮬러, 일카 벨츠

다큐멘타리 감독 출신인 발레스카 그리세바흐의 두 번째 장편영화는 기이한 사랑 이야기다. 마르쿠스는 베를린 근교의 작은 마을에서 사랑하는 아내 엘라와 살고 있는 소방수. 소방훈련을 나간 어느 날, 그는 술에 취해 하룻밤을 보낸 웨이트리스 로즈와 사랑에 빠지고 만다. 삼각관계에 빠진 세 사람의 일상을 건조한 다큐멘타리 스타일로 묘사하던 카메라는 (<스크린 인터내셔널>이 ‘미하엘 하네케식’이라고 설명한) 충격적인 장면을 갑자기 관객에게 던지며 돌연한 감정의 파고를 만들어낸다. <갈망>을 다르덴 형제의 미학적 유산 아래 놓여 있는 영화라고 일컬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세바흐는 아마추어 배우들의 연기를 묵묵히 따라가는 관찰자적 시선을 유지하면서도 캐릭터의 내면에 숨어 있는 미묘한 감정을 보여주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현지의 비평은 극단적으로 갈린 편이다. <스크린 인터내셔널>은 “그리세바흐는 인물의 뒷모습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내면을 소리내어 설명할 줄 아는 소수의 감독 중 하나”라고 호평했지만 <디 벨트>는 “홈비디오적 매력을 지닌 영화다. 착각으로 경쟁부문에 올린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라고 가차없이 평가절하했다.

“실제 사건과 확실한 금을 긋고 싶었다”

<레퀴엠>의 한스-크리스챤 슈미트 기자회견

-실화에 얼마나 근거를 둔 것인가.
=실제 사건을 그대로 다시 말하고 싶지는 않았고, 각본을 완성시켜 나가면서도 우리가 실화로부터 조금씩 멀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우리 캐릭터들은 그들 자신만의 세계와 언어를 지니고 있다.

-실화의 관련 인물들과 접촉을 해봤나.
=촬영을 완전히 마치고 난 뒤 접촉을 했다. 첫 번째 이유로 우리는 영화 <레퀴엠>과 실제 일어난 사건 사이에 확실한 금을 긋고 싶었고, 두 번째 이유로 우리는 관련된 사람들이 정신적 외상으로 남아 있는 당시의 일을 다시 떠올리도록 만들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실화의 어떤 부분이 당신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나.
=클링겐버그로 가는 순례여행에 대한 기사를 읽고 나서 영화로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다. 클링겐버그는 바로 1976년 수십번의 연속적인 엑소시즘으로 탈진해 사망한 가톨릭 여학생 아넬리에세 미켈이 죽은 장소다. 그녀는 잘못된 종교적 신념 때문에 죽은 지 20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순례객에 의해 종교적 순교자로 떠받들여지고 있다.

-같은 사건을 토대로 만든 할리우드영화 <엑소시즘 오브 에밀리 로즈>는 보았나.
=그 영화는 좋아하지 않는다. 실제로 악마가 존재한다는 접근법에는 동의할 수 없다.

취재지원 진화영·사진제공 RE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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