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브로크백 마운틴>의 리안 감독 [2]
2006-03-03
글 : 정한석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가족, 비밀과 상실의 집단

에니스와 잭은 산을 내려와 헤어진다. 그건 곧 체계와 편견의 땅으로 들어서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족을 형성하고, 그들도 아버지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다. 에니스는 약혼자 알마와의 결혼 생활을 시작하고, 잭은 생존을 위해 거부 농기구상의 딸 루린과 원치 않는 살림을 차린다. 그들에게 일반 여성과 가정을 꾸리고 산다는 것은 그 자체로 허식과 고통을 수반하는 일이다. 결국 그리움을 참지 못하고 4년 만에 다시 만난 에니스와 잭은 낚시를 핑계로 일년에 한 두 번씩 브로크백으로 둘만의 여행을 간다. 그럼으로써 가족은 점점 더 위태로워진다.

가족은 리안의 영화를 연결하는 또 하나의 고리다. “(이전의 삼부작으로 구성된) 가족 드라마와 <센스, 센서빌리티>는 모두 가족 의무 대 자유 의지의 충돌에 관한 것이다”라고 리안은 말한 적이 있다. 동시에, “가족 드라마에 말싸움이 있는 거라면, <와호장룡>에는 발차기가 있는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 그의 말을 따르면 <와호장룡>도 청명검을 사이에 둔 유사 가족 드라마인 셈이다. 여기서, <센스, 센서빌리티>의 이성과 감성은 곧 리무바이-수련, 용-호의 세대로 대변되는 정과 동의 극단과 다를 바가 없는 셈이다.

처음에 리안 영화에서 가족은 보다 공존하는 쪽으로 나아갔다. 초기 삼부작에서 특히 그랬다. 그 예로, <결혼 피로연>은 가장 이상한 가족의 공존을 허용했다. 아버지는 아들의 서양 남자친구를 가족으로 인정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아들의 아이를 실수로 임신한 여자까지도 대를 잇는다는 차원에서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인다. 보기 드문 가족 한 무리가 형성되는 것이다. 아버지의 형상이 바뀌는 만큼 공존을 찾아가던 가족의 이야기도 곧잘 파국의 가족으로 변모해 갔다. <아이스 스톰>의 가족이 대표적이다. 이 영화 속에서 가족은 엉망진창이다. 부모는 스와핑 게임에 휩쓸려 들어가고,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성장통의 늪 속에서 허우적댄다. 가족은 부서지기 일보 직전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아들을 아버지와 어머니와 동생이 기차역으로 마중 나가는데, 이미 하룻밤의 지옥 같은 일을 경험하여 바닥까지 내려간 뒤라, 이 가족에게 평화가 다시 올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다.

가족이 어정쩡한 공존의 자세를 취하거나, 파국을 향해 갈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이 가족에게는 어떤 ‘비밀과 상실’이 공유되고 있기 때문이다. 공존하거나, 와해되는 것은 그 비밀과 상실을 어떤 태도로 받아들이는가의 문제에 달린 것이다. 리안 영화의 모든 인물들은 이 비밀과 상실을 지닌 자들이다. 그중에는 <센스, 센스빌리티>처럼 영화의 내러티브를 탄탄하게 하기 위해 기능적으로 도입된 것도 있지만,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이유로 생긴 존재론적인 비밀들이 대부분이다. 그럴 때 상실은 어느 틈엔가 그 옆에 있다. 주로 그 이유는 있지 않아야 할 자리에 누군가 있을 때 생긴다. 그걸 공존의 화합으로 기가 막히게 풀어낸 것은 <라이드 위드 데블>이다. 영화는 남북전쟁 시기 남군을 지지하는 민병대를 중심으로 다룬다. 그런데 거기에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사람 둘이 있다. 한 명은 독일계 청년이며 또 한 명은 흑인 청년이다. 전통적으로 북군을 지지하는 독일계와 자신의 인종을 해방시키겠다고 나선 북군을 죽이기 위해 맨 앞에 서는 두 사람이 이 영화의 아이러니한 주인공이다. 두 주인공은 그곳에서 마침내 서로를 감싸 안아준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게 이상적인 화합의 지점으로 풀려가는 것만은 아니다. <브로크백 마운틴>은 그 어울리지 않는 자리에서 생겨날 수 있는 가장 깊은 슬픔을 길어 올린다. 그건 <와호장룡>의 형체없는 슬픔과도 비견할 만한 것이다. <와호장룡>이 개봉되었을 당시, 대나무 위에 균형을 잡고 서서 가르침을 주는 리무바이의 몸은 마치 무와 도의 혼연일체처럼 보였지만, <브로크백 마운틴>을 통해 거슬러 보면 그 중력에서의 해방은 사실 상실의 표현이 아니었나 싶다. 모든 것을 버리고 강호를 떠나고자 했던 리무바이에게는 도저한 상실감이 있었다. 그러니, 그 풍경이 만약 외면화된 리무바이의 혼에 대한 표현이라면, 그가 모든 걸 상실하고 허무에 빠져 있는 자라면, 그 중력과의 무관함은 해탈이 아니라 상실의 풍경이다.

<센스, 센서빌리티>
<라이드 위드 데블>

<브로크백 마운틴>이 중반부에 이르렀을 때 비밀과 상실은 봇물 터지듯이 터져 나온다. 에니스는 알마와 억지로 산다. 잭은 돈 때문에 루린과 산다. 에니스와 잭은 알마와 루린에게 자신이 게이임을 말하지 못하는 비밀을 갖고 있다. 에니스와 알마, 잭과 루린은 점점 더 싸늘한 관계가 되어간다. 그건 상실의 연속이다. 뒤집어 봐도 마찬가지다. 알마와 루린 역시 마음이 없는 남편과 사는 처지여서 상실자이기는 마찬가지다.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못함으로써, 자기의 자리가 아닌 곳에서 살아야 함으로써 생기는 비밀과 상실은 모두를 불쌍하게 만든다. 끝내 이혼하고야 만 알마는 어느 추수감사절날 에니스에게 그동안의 비밀을 모두 알고 있다고 격한 감정을 쏟아낸다. 그러나, 에니스는 자기의 입으로는 결코 그걸 인정하지 않는다. 에니스는 모든 것을 상실하고도 끝까지 무언가를 말하지 않고 침묵한다.

리안의 영화 친구, 프로듀서 제임스 샤무스

샤무스가 있기에 <브로크백 마운틴>이 태어났다

리안에게는 평생의 영화 친구가 한명 있다. <브로크백 마운틴>의 프로듀서 제임스 샤무스다. “그는 처음부터 영화를 함께한 나의 동반자일 뿐 아니라 내가 아는 최고의 시나리오 작가이며 프로듀서다.” 리안은 그를 그렇게 설명한다. 그들의 인연은 십수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리안은 학위를 마치고도 근 6년간이나 미국에 머물며 시나리오 작업만을 했다. 그러나 미국의 주류 영화계는 그에게 장편 데뷔작을 만들 기회를 쉽게 내주지 않았다. 리안은 고국 대만으로 돌아와 정부에서 지원하는 시나리오 공모전에 응모해 당선된 뒤, 장편 데뷔작 <쿵후 선생>을 준비했다. 그때쯤 제임스 샤무스는 뉴욕에 근거지를 둔 인디영화 제작사 ‘굿 머신’을 테드 호프와 함께 설립하고는 아직 장편을 만들지 않은 신인감독 중 유능한 단편영화 감독을 찾아다니다 리안을 만나게 됐다. “지금 당장 영화를 만들지 않으면 죽을 것 같다”는 리안의 의지와 함께 둘의 동업은 시작됐고, 그 뒤로 리안의 모든 영화에는 제임스 샤무스의 이름이 빠지지 않는다.

둘은 단순히 동업자가 아니라, 창작의 협업자 관계다. 제임스 샤무스는 에마 톰슨이 각본을 쓴 <센스, 센서빌리티>를 제외한 <브로크백 마운틴> 이전의 모든 리안의 영화에 각본가로 참여했으며, <아이스 스톰>으로는 칸영화제 각본상도 받았다. 프로듀서로서는 지금까지 단 한편도 빠지지 않았다. 애초에 리안에게 <브로크백 마운틴>의 원작과 각본을 건네주고 의향을 물은 사람도 바로 제임스 샤무스다. 구스 반산트와 조엘 슈마허를 거쳐 떠돌던 각본이 드디어 자신의 짝 리안의 손으로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사람들은 <타이타닉>의 러브스토리를 말할 때, 아니 이런 이성애적 러브스토리가 있다니, 하는 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실은, 우리 포스터도 <타이타닉>의 포스터에 영감을 얻은 것이다. 그런 점에서, 게이라는 말은 우리 영화의 캐릭터를 설명하는 말이 아니다.” 그렇게 제임스 샤무스는 리안과 비슷한 말을 한다. <브로크백 마운틴>은 리안과 더불어, 그의 오래된 친구 제임스 샤무스에 의해 탄생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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