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능이란 기생충에 관한 반문
이인의 감독의 <Gift>
2002년, 이인의(30) 감독은 생계형 아르바이트를 접었다. 장편 시나리오 작업에 들어가기 위해서였다. 한양대학교 연극영화과를 졸업한 뒤에 인터넷, 케이블 방송 일을 했던 그는 이후 입산수행을 맘먹은 승려처럼 고향인 경기도 오산으로 내려가 ‘나 홀로 창작’에만 몰두했다. 건축업을 하는 친척이 내준,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컨테이너를 작업실 삼아 그가 밤낮으로 써낸 장편 시나리오만 벌써 10편. 그러다 지난해 “혼자서 끙끙거리다가는 외로움에 골병든다”는 지인들의 충고를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알음알음 동병상련 동료들을 알게 됐고, 그들과의 공동작업이 없었다면, 독특한 여고생 성장기를 다룬 <Gift>는 대학 시절 그의 작품들(<불발된> <물은 물에 젖지 않는다>)처럼 무겁고 난해한 실험영화가 됐을지도 모를 일이다.
-1995년에 만든 <회태> <양수>를 보지 못했다. 그 영화들도 <불발된>처럼 이미지 위주의 실험영화인가.
=그건 더 심하다. <양수>는 게다가 20분이나 된다. (웃음) 학교에서 시사회하면 대개 영화 도중 키득키득하거나 박수치고 그러는데 <양수>는 상영 때 찬물이라도 끼얹은 것처럼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 당시는 영화라는 매체를 처음 접했던 ‘내’가 많이 반영된 작품들이었다.
-이미지에서 내러티브로 관심이 옮아간 계기가 있을 것 같다.
=작은 영화사에서 상업영화 시나리오를 1년간 쓴 적이 있다. 비록 영화화는 안 됐지만 이야기를 구조화하는 과정의 재미에 푹 빠졌다. 깔린 복선을 타고 이야기가 전진하는 과정이 흥미로웠다. 지금까지 쓴 시나리오 중에 절반 가까이가 스릴러인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스릴러야말로 그런 재미를 만끽할 수 있는 장르니까.
-누군가 갖고 있던 재능이 몸에서 빠져나간다는 설정이 재밌다. <Gift>는 어떻게 구상하게 됐나.
=악몽에 시달리는 고3 남자 수험생을 주인공으로 한 다른 버전의 시나리오가 있었다. 주인공은 어렸을 때 상어 꿈을 꾸고 나서 그 뒤로 계속 악몽에 시달린다. 그런 주인공이 자기를 치유하는 과정을 그린 시나리오였는데 제작에 한계가 있더라. 상어를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 주인공이 자주 들어가는 골방에 물이 스멀스멀 차오르는 장면도 만들어내기 어려울 것 같고. 그래서 수험생을 주인공으로 하고 악몽이 현실이 되는 상황을 유지하되 설정만 바꾸었다.
-<Gift>를 통해 궁극적으로 말하고 싶었던 것이 있다면.
=재능은 우리가 갖고 있는 존재나 자아의 일부분이지만, 우리 사회의 시스템은 그게 전부인 양 여긴다. 고등학교에서도 성적 위주로 개별 학생들의 재능이 재단되고, 또 그런 재능이야말로 그 사람을 판단하는 유일한 척도처럼 받아들여진다. (인정된) 재능이 실은 자아를 잡아먹는 기생충이 아닐까 싶었고, 순기능 대신 역기능이 많은 재능에 대해 자문해보고 싶었다.
-형식은 제각각이지만, 전작(全作) 모두 성장영화라고 부를 수 있다.
=죽기 전까지 누구나 끊임없이 성장을 하지 않나. 무언가를 통해서 배우고 싸우고 하는 그런 과정들에 관심이 많다.
-극중 현주와 소영의 코에서 나오는 기생충 혹은 재능은 어떻게 비주얼화할 것인가.
=조기축구회 형들이 도와주기로 했다. 회원들이 다들 영화쪽 일을 한다. 코에서 나오는 이상한 물체는 곱창이 말라붙은 느낌이 나야 하는데 특수효과하는 분이 재료비만 내라고 하더라. 벽에 붙어 꼼지락거리는 장면도 CG하는 형이 거의 공짜로 해주기로 했다.
-촬영계획서를 보니 시나리오 수정 기간이 한달이 다 된다.
=인터뷰가 좀 필요하다. 여고라는 공간에 피상적으로 접근한 것 같다. 극중 현주는 작은 가슴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는데 너무 남성적인 시각인 것 같다. 여자 동료들에게 모니터해봤더니 신체검사할 때 선생들이 실제보다 가슴 크기를 더 크게 적겠다는 말로 놀리는 경우도 있고, 여고생들이 그렇게 가슴 크기에 연연해하지도 않는다고 하더라. 단편 시나리오 작업 동료이자 <Gift>의 프로듀서 일을 맡고 있는 이지현씨의 도움이 절실하다. 동시에 현주와 소영이라는 두 캐릭터 중심으로 이야기를 손질할 계획이다.
-장편 작업은 계속할 건가.
=김우현 작가와 계속 공동작업을 할 생각이다. 나와는 정반대 스타일이라 도움이 된다. 하루에 1만7천원짜리 종로의 여관방에서 1천원짜리 김밥 먹어가며 한달씩 합숙하는 통에 “게이 아니냐?”는 오해를 받기도 하지만.
시놉시스
현주는 전교 1등을 놓쳐본 적이 없는 고3 수험생이다. 축농증이 있는 그녀는 어느날 새벽 킁킁거리다 자신의 콧속에서 기다란 검은색 물체가 빠져나오는 것을 목도하고 기겁한다. 새벽의 충격 때문일까. 이튿날 학교에서 현주는 간단한 영어문장을 해석하지 못해 당황한다. 잠깐의 해프닝이었으면 좋으련만. 현주의 성적은 날로 떨어지고, 얼마 후 심지어 근의 공식조차 몰라 망신까지 당하는 신세가 된다. 그녀의 지식은 도대체 어디로 사라져버린 것일까. 성적표를 위조하고 컨닝까지 시도하는 현주는 이 모든 악몽이 자신의 콧속에서 기생충 같은 물체가 빠져나간 뒤로 벌어진 일이라고 여긴다. 우연히 같은 반 친구 소영의 코에서 노란색 물체가 삐져나온 것을 발견한 현주. 결국 소영을 위협해 노란색 물체를 자신의 콧속으로 밀어넣지만, 현주는 자신의 재능을 되찾는 대신 예상치 못한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