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6일 개막하는 제8회 서울여성영화제의 남인영 프로그래머(동서대 영상매스컴학부 교수)가 올해 추천작 일곱편을 꼽았다. 전체 7개 부문 33개국 97편의 영화 가운데, 관객들이 영화를 통해 현실을 즐겁게 비춰볼 수 있는 영화들을 부문별로 추천했다.
‘안토니아스 라인’ 의 숨은 시작
<침묵에 대한 의문>(감독 특별전/마를린 호리스 감독/네덜란드/1982)
1995년 마릴린 호리스가 감독한 <안토니아스 라인>은 이 세상에 내리는 여성의 축복이다. 이 영화에는 숨은 시작이 있었다. 바로 20년 전에 제작된 <침묵에 대한 의문>이다. 세 여성이 경찰에 체포된다. 백주에 손님들이 보는 앞에서 옷 가게의 남자 주인이 이들에게 잔인하게 맞아 죽었다. 피의자들은 혐의를 순순히 인정하지만 이유를 밝히지 않는다. 이들의 침묵은 도발적이다. 법정은 이들로부터 대답을 듣는 게 아니라 이미 정해진 대답을 확인하고 싶을 뿐이다. 이 여성들이 미쳤거나 혹은 나쁘다는 것. 이들의 침묵은 직장과 가정, 법정에 작동하는 가부장제의 규칙을 심판대에 올리는 효과적인 반격이자 신랄한 비평이 된다. 1970년대,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걸작.
터키 산악마을 아홉 여성이 펼치는 축제
<연극>(새로운 물결/펠린 에스메르 감독/터키/2005)
터키 남부의 산악 지대에 위치한 어느 마을. 온 동네가 술렁인다. 아내이자 어머니, 자매이자 딸이며, 훌륭한 농부이자 능수능란한 벽돌공이기도 한 아홉 명의 여성이 동네사람들 앞에서 연극을 하는 날이다.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바탕으로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오랫동안 연습했던 연극이다. 에스메르 감독은 놀라운 솜씨로 여러 겹의 이야기들을 역동적으로 포개어 놓는다. 이 여성들의 삶과 그 삶을 재연하는 연극 창작의 과정, 이 연극을 통해 여성들이 진심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 이 모든 것들은 다시 다큐멘터리 카메라에 담긴다. 이 모든 과정을 묘사하는 화면에는 흥이 넘친다. 들썩이는 축제의 현장으로 관객을 초대하는 흐뭇한 영화.
공들여 수집한 ‘여성의 이미지’ 다큐
<여성의 영화>(페미니스트 다큐멘터리의 선구자들/샌프란시스코 뉴스릴/미국/1971)
1960년대 말 미국 사회는 거대한 저항의 물결에 휩싸였다. 이 물결 속에서 영화제작자와 액티비스트, 학자가 모여 ‘뉴스릴 영화’ 운동을 태동시켰다. 전설적인 미국 뉴스릴 운동의 대표작이자, <제니의 제니>, <여성건강보고서> 등과 함께 미국 페미니스트 다큐멘터리의 계보에서 가장 먼저 언급되는 영화다. 줄리아 로버츠를 닮은 젊은 비서나, 노동으로 뼈마디가 휜 손을 무릎 위에 포개는 흑인 여성이나, 일하는 여성들이 겪는 현실은 한결같다. 마치 세상의 모든 여성들에게 말 걸겠다는 듯이 공들여 수집한 여성의 이미지들만으로도 이 작품은 이미 ‘여성의 영화’라고 불릴만하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화면을 보는 순간 뜨거운 열정이 몸속으로 전이되는 마법 같은 영화.
짐바브웨 전래설화 각색한 뮤지컬
<카레 카레 즈와코: 옛날 옛적에>(아프리카 특별전/치치 단가렘바 감독/짐바브웨/2004)
짐바브웨의 전래 설화를 바탕으로 한 독창적인 뮤지컬 영화. 마을에는 오랜 가뭄이 계속된다. 식량을 구해 오지 않는 아버지를 대신해 어머니는 개미들을 잡아서 저녁 식사를 차린다. 어머니의 질책에 화가 난 아버지는 숲 속에 구덩이를 파고 어머니 사냥에 나선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육신을 잘라 만든 수프로 배를 채우고자 하지만, 개미 정령들의 도움으로 살아난 어머니에게 애원하지 않고서는 뜻을 이룰 수 없다. 탐욕스럽고 어리석은 가장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와 여성이 지닌 무한한 생명력에 대한 찬사가 동시에 반짝이는 작품이다. 현대적인 뮤지컬이지만 섬뜩한 이야기를 흥겨운 가락에 담는 모양새가 어쩐지 우리네 마당극을 생각나게 한다.
팔레스타인 여성납치범의 35년 뒤
<비행기 납치범, 레일라 카흐레드>(여성영상 공동체/리나 마크볼 감독/스웨덴/2005)
1969년 카흐레드는 팔레스타인 여성 최초로 두 번에 걸쳐 민간 비행기를 납치했다. 이 사건은 팔레스타인 문제를 전지구적으로 인지시키는데 성공했고, 카흐레드는 팔레스타인인들의 영웅이 됐다. 팔레스타인계 스웨덴 감독은 35년이 지난 지금 이 여성을 찾아 나선다. 한편에서는 영웅으로 추앙받고, 다른 한편에서는 여섯 번의 성형 수술을 거치고도 테러리스트라는 낙인을 지울 수 없었던 여성에게 감독은 매우 초보적인 질문들을 던진다. 이 때문에 코믹한 상황이 연출되지만 감독의 질문은 외부적 권위에 위압 당하지 않고 테러리즘과 민족주의, 세계화의 문제를 여성의 맨눈으로 다시 보려는 시도다. 몸은 웃게 만들고 마음은 울게 만들며 정신은 맑아지게 하는 총명한 영화.
70년대 ‘똥물 사건’ 이 전부가 아니었다
<우리는 정의파다>(옥랑상 수상작/이혜란 감독/한국/2006)
다큐멘터리 제작기금을 지원하는 옥랑상의 2005년도 수상작인 이 작품은 여러 가지 점에서 경축할 만하다. 1970년대 대표적인 여성민주노조운동을 지금 여기에 펼친다.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들의 이야기는 이른바 똥물 사건이 전부가 아니다. 하루 열다섯 시간의 노동. 남자들의 임금의 반도 안 되는 일당 70원. 그리고 열여섯 살 청춘들이 꾸었던 다른 꿈에 대한 이야기이다. 인터뷰는 특히 압권이다. 30년 전을 회고하는 이들의 목소리는 차분하지만, 당시 노동현장을 마치 눈앞에서 펼치지는 것처럼 선명하게 떠올리게 만든다. 이 작품이 전하는 진실은 분명하다. 여성이 여성으로서 존중받는 것은 인권의 끝이 아니라 인권의 시작이라는 점이다.
임신 18개월, 외계인의 아이를 가진거야?
<임신 36개월> (새로운 물결/타다노 미아코 감독/일본/2005)
임신한 후유코는 만삭이 되었지만 완벽한 엄마가 될 자신이 없다. 임신 18개월이 되자 그녀의 배는 그야말로 거대한 피라미드를 얹은 것처럼 부풀어 오른다. 무기력에 빠진 남편은 외계인의 아이가 아닌가하는 의심을 하기 시작한다. 이 영화는 발랄한 로맨틱 코미디의 외양을 띄고 있지만, 출산과 양육의 현실을 건드리는 칼날이 예리하다. 언제는 가족계획이라는 거창한 구호 아래 덜 낳으라고 야단하더니 이제는 무작정 더 낳으라고 채근하는 우리의 그 ‘계획’ 담론을 생각할 때, 이 영화에서 예비 부모가 느끼는 불안감과 부담감은 남의 일이 아니다. 그래도 이 젊은 부부는 아기가 그랬던 것처럼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세상 밖으로 나아간다. 오직 자기 자신만을 믿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