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제8회 서울여성영화제 가이드 [4] - 거장의 손길
2006-04-05
글 : 이다혜
침묵하지 말 것, 의문을 제기할 것

샹탈 애커만, 바버라 해머, 도리스 되리의 신작과 마를린 호리스 특별전

방 안은 어둡고, 시선은 창밖을 향해 있다. 샹탈 애커만의 다큐멘터리 <저 아래>(Down There/ 프랑스, 벨기에/ 2006년/ 79분)에서 카메라는 창밖을 여기저기 살펴보지만 마치 집안일을 하다 시선을 돌린 것처럼, 혹은 바깥 사람들에게 그 존재를 드러내고 싶지 않은 것처럼 창문에 드리운 발조차 걷지 않은 상태다. 오래된 활동사진을 보는 듯한 속도로 시간은 흘러간다. 이곳은 텔아비브. 샹탈 애커만 감독의 내레이션이 없다면, 이 영화에는 어떠한 극적인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거의 모든 것으로부터 단절되어 있다”며 최소한의 삶을 살고 있다는 애커만 감독의 말과 적요한 화면은 바닷가에 가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저편에서>등의 영화에서 경계의 문제를 탐구했던 애커만 감독의 시선과 내적 성찰이 만나는 작품이다.

<연인, 타인>
<내 남자의 유통기한>

초현실주의 예술가, 배우, 작가, 시인, 문학평론가, 번역가, 정치활동가, 나치정권에 반대하는 레지스탕스…. 경계를 짓지 않고 30∼40년대에 가능했던 모든 예술형태에 뛰어들었던 클로드 커훈과 그녀의 연인이자 이복자매였던 마르셀 무어에 대한 다큐멘터리 <연인, 타인>(Lover Other: The Story of Claude Cahun and Marcel Moore/ 미국/ 2006년/ 55분)은 성역할과 레즈비언으로서의 정체성을 탐구해온 바버라 해머의 신작이다. <연인, 타인>은 커훈의 사진과 각종 기록을 토대로 한 재연극이기도 하다. 커훈과 무어는 평생을 같이 살며 창작활동을 했으며, 전쟁 중의 독일 병사들에게 상관을 사살하라는 내용의 전단지를 나누어주다가 체포되어 옥살이를 했다. 해머 감독은 담뱃갑, 신문, 감옥의 벽에까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 치열한 여성 예술가의 삶을 탐구, 잊혀져서는 안 될, 곧은 시선을 지닌 한 여성의 존재를 되살린다.

제목부터가 입가에 미소를 끌어올리는 <내 남자의 유통기한>(The Fisherman and His Wife/ 독일/ 2005년/102분)은 로맨틱코미디로 시작해서 사랑의 무덤으로, 마침내는 판타지에 가까운 해피엔딩으로 끝맺는 즐거운 영화다. 감독으로서, 소설가로서 대단한 상업적 성공을 거둔 도리스 되리는 국내 출간된 <나 예뻐?>에서 보여준 바와 같이 삶이라는 비극을 희극적으로 그리는 데 능한 인물이다. 금붕어 부부의 대화에서 시작하는 영화는 남녀가 사랑에 빠져 무모하게 결혼이라는 제도에 편입하는 과정, 그리고 그 이후의 조각난 삶을 유머러스하게 그린다. 일본을 여행하던 디자이너 이다는 우연히 잉어를 사고 파는 오토와 레오를 만난다. 두 사람 모두 그녀에게 호감을 보이는데, 그녀는 잉어와 대화를 할 수 있다는, 잉어에 미친 남자 오토와 사랑에 빠진다. 금전적 안정과 편안한 삶이 천국인 여자와 정처없는 자유로운 삶이 천국인 남자가 티격태격하면서 한때 애칭이었던 ‘해마’라는 말은 경멸의 단어로 바뀐다. 미운 정 끝에야 고운 정을 발견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평생 사랑하며 사는 인간의 숙명이다.

마를린 호리스 특별전에서는 <침묵에 대한 의문>(1982), <부서진 거울>(1984), <안토니아스 라인>(1995) <댈러웨이 부인>(1997)이 상영된다. 호리스는 반남성적이라고까지 할 수 있는 직접적인 화법으로 여성들이 겪는 불평등과 억압, 차별을 그린다. 여성들의 유대만이 낳을 수 있는 유토피아를 그린 <안토니라스 라인>을 감동적으로 그려낸 바 있는 호리스 감독의 공격적이고 직접적인 시선과 표현방식을 잘 경험할 수 있는 작품은 <부서진 거울>(Broken Mirrors/ 네덜란드/ 1984년/ 105분)이다. 여인들이 몸을 파는 유곽 ‘해피 하우스’의 여인들의 아침은 토사물, 다 쓴 콘돔, 술, 담배의 흔적뿐이다. 아내가 몸을 팔아 번 돈으로 마약을 하고 뻗은 남편이 돈으로 몸을 사는 남자들보다 나은지조차 의문이다. 정신없이 손님을 받고 난 여자들은 텅 빈 시선으로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응시한다. “공중화장실이 된 기분이야.” 여인들에게는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의 미래뿐이다. 자살하거나 살해당하거나, 간신히 살림을 차려 유곽을 떠난다 해도 결국 멍든 눈과 찢어진 마음을 해서 돌아올 수밖에 없으니까. 하지만 갈 곳이 없다 해도 떠날 수 있다. 침묵하지 말 것, 의문을 제기할 것. <부서진 거울>의 광포한 결말은 유곽에 국한된 문제가 아닌,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문제 자체에 대한 회의적 통찰의 결과인 동시에, 서로 연대하고 의지해 길을 떠나는 여성들을 위한 흔들리지 않는 응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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