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만든 주체의 성별 혹은 영화가 다룬 이슈가 이른바 여성영화의 충분조건이 될 수는 없다. 같은 주제 혹은 이슈를 다루더라도 여성의 화법, 여성의 시선은 다를 것이라는 기대가 존재한다. 실제로 올해 여성영화제 상영작 중 상당수는 성역할, 가족 안에서 여성의 관계, 여성의학, 페미니즘 등 여성학의 고전적인 이슈를 새로운 방식으로 고민하고 있다.
여성은 남성과 달리 태생적으로 육체의 변화에 훨씬 민감하게 반응하는 존재다. 그들은 매달 육체적 변화를 경험하고, 남성에게는 그저 쾌락으로 그칠 수 있는 성관계가 유발할 수 있는 직접적인 결과인 임신을 직접적으로 맞닥뜨려야 하는 쪽이다. 임신과 피임의 권리를 인류 역사 이래 최초로 주장했던 시대에 만들어진 다큐멘터리 <그럼, 그짓 하지마!>(Don’t Screw,Then!/ 카롤 루소풀로/ 프랑스/ 1971∼73년/ 17분)는 육체와 쾌락을 적극적으로 고민하고 자신들의 이론을 실천에 옮기는 여성들의 적나라한 언어를 그대로 옮긴 파격을 자랑한다. 함께 오르가슴에 도달할 때까지 충분히 기다려줄 줄 아는 남자의 인내심을 칭찬하던 이들이 손수 낙태수술을 행하고, 피임과 낙태의 권리를 외치며 길거리에 나서는 모든 과정은 내레이션 하나 없이 보여진다. 아프리카에서 도착한 <흉터>(Whole-a Trinity of Being/ 셸리 베리/ 남아프리카공화국, 미국/ 2004년/ 15분)는 신체 훼손을 대하는 예민한 시선으로 이루어진 실험영화다. 영화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벌어졌던 민족간 유혈전쟁의 결과, 다양한 장애를 얻게 된 이들의 사례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는 목소리를 잃은 여성의 숨소리, 다리를 잃은 여성이 바라보는 길거리에 가득 찬 드럼 소리를 듣고, 온몸이 마비된 여성의 몸을 자극하는 날카로운 핀을 바라본다. 다양한 영화적 감각을 통해 환기되는 이들의 고통과 이를 극복하는 과정은 관객에게 직접 경험으로 다가간다.
가정과 사회가 여성에게 부여하는 노동의 질과 강도에 대한 논쟁은 실로 고전적인 페미니즘 이슈다. 1960, 1970년대 여성들의 목소리를 대신하기 위해 카메라를 들었던 이들의 작품을 모은 ‘페미니스트 다큐멘터리의 선구자들: 천개의 목소리’에는 그러한 소재를 좀더 설득력있게 전달하기 위해 이론뿐 아니라 형식적으로 고민한 흔적이 역력한 작품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가사 노동에 열중한 여성들의 다양한 손에서 시작하는 <여성의 영화>(The Woman’s Film/ 샌프란시스코 뉴스릴/ 미국/ 1971년/ 41분)는 미국 노동계급 여성들이 가정과 직장에서 견뎌야 하는 일상을 바라본다. 일상적인 공간을 조금씩 다른 앵글로 잡은 화면의 중간중간 생각했던 것과 결혼은 전혀 달랐고 결혼생활은 고문보다 괴로웠다는 여성들의 고백이 자리한다. 좀더 심각하게 소외된 노동을 수행해야 하는 흑인 여성의 사례를 살피는 것까지 잊지 않은 영화는 무엇이 문제인지를 알게 된 여성들이 반전시위대와 함께 거리에 서는 것을 보여준다. 그 순간 그저 바라보던 카메라의 시선은 그들을 응원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로 변해 있다. 반면 노동자인 제니가 이혼 뒤 일년간 주체적으로 가정을 꾸려나가게 되는 과정을 그린 다큐멘터리 <제니의 제니>(Janie’s Janie/ 게리 어셔, 피터 바튼/ 미국/ 1971년/ 20분)는 한 인물이 여성으로 산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는 작은 변화에 주목한다.
때로 한편의 영화는 두꺼운 개론서적 속에 담긴 이론을 명료하게 전달한다. <속도 무제한 페미니즘>(Unimited Girls/ 파로미타 보라/ 인도/ 2002년/ 94분)은 여성문제에서 지참금 제도 등 가혹한 현실이 먼저 떠오르는 인도에 대한 편견을 없애주는 재기발랄한 다큐멘터리. 인터넷 대화방에서 시작된 페미니즘 논쟁에 해답을 찾고자 거리로 나선 주인공 시점에서 진행되는 영화는, 여성의 사회 진출과 노동하는 여성들이 마주하는 문제에서 출발해 페미니즘이라는 이름으로 거론될 수 있는 모든 이슈를 차근차근 짚어나간다. 페미니즘, 페미니스트라는 호명에서 비롯되는 숱한 오해, 비약, 구분짓기와 그로 인한 온갖 위험에 대처하는 감독의 태도가 건강하고 명쾌하다. 채팅창을 비롯하여 사적인 공간을 비추는 인서트, 신랄한 풍자가 돋보이는 콩트, 다양한 분야에서 섭외된 인터뷰이 등이 다소 딱딱해질 수 있는 영화를 부드럽고 유머러스하게 만든다.
남성이 자신의 권력과 권위를 앞세울수록, 이를 인정하지 않는 여성에 대한 공포 혹은 자신이 그 권력을 지킬 만한 능력을 가지지 못할 것에 대한 두려움은 클 수밖에 없다. 숱한 신화와 역사가 남자들을 위협하고 직접적으로 그들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여성, 이른바 요부의 이야기를 전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실화를 다루되 판타지적인 시선을 견지한 다큐멘터리 <독살하는 주부들>(The Angelmakers/ 아스트리드 부싱크/ 스코틀랜드, 헝가리, 네덜란드/ 2005년/ 34분)은 1929년 헝가리의 한 작은 마을에서 일어났던 사건의 관계자들을 카메라에 담았다. 수많은 여자들이 염산으로 남편들을 독살했던 이 사건을 기억하는 마을 사람들은 “어떤 여자는 특히 독살에 재능이 있었다”거나 “두달에 걸쳐 조금씩 독을 먹여 남편을 죽였다”는 말을 천연덕스럽게 늘어놓는다. 염산에 대해 설명하는 수업시간을 영화 중간에 끼워넣는 등 누구에게도 비난받지 않았던 이들의 과거를 바라보는 감독의 미묘한 시선이 매력적이다. 짐바브웨의 오랜 전설을 옮긴 <카레카레즈와코: 옛날 옛적에>(Kare Kare Zvako Mother’s Day/ 치치 단가렘바/ 짐바브웨/ 2004년/ 30분)는 먹을 것을 구하지 못하는 남편을 향한 아내의 타박으로 시작한다. 아내는 아이들에게 손수 식사를 장만하지만, 무능한 남편은 이마저 탐낸 끝에 아내를 살해한다. 그러나 아이들은 죽은 엄마를 노래를 통해 살려낸다. 전설에 깃든 집단의 현실과 욕망, 유머를 영화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카레카레즈와코…>는 판타지와 뮤지컬을 스타일로 받아들였다.
강력 추천 2편
여성의 내밀한 고통에 대한 보고서들
<여성건강보고서>(Healthcaring: From Our End of the Speculum/ 데니스 보스트롬, 제인 워런브랜드/ 미국/ 1976년/ 32분)
우리는 흔히 남성이 정신으로 평가받는 데 반해 여성이 육체로만 그 의미를 부여받음을 문제삼는다. 근대의학의 위상이 정립되는 과정에서 정작 여성의 육체가 얼마나 왜곡되고 천대받아왔는지를 살피는 이 다큐멘터리는, 미묘하고 교육적인 소재를 개인적이고 친숙하게 처리하는 능숙함을 겸비했다. 성폭력과 임신과 분만 등을 일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여성들은 남성들에 비해 약물중독이나 오진의 위험에 늘 노출되어 있다. 남자 의사를 맞닥뜨려야 하는 산부인과 진료는 지옥이고, 일상적인 통과의례에서 수술의 대상으로 변형된 출산은 더없이 고통스러운 경험이 되어버렸다. 강간을 당한 뒤 병원에 찾아가서까지 강간 사실을 스스로 증명해야 했던 여성, 어머니가 임신 중 복용했던 잘못된 약으로 평생 고통받는 여성 등의 진술이, 20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크게 시차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다. 결국 중요한 것은 더이상 고통받지 않겠다는 건강한 의지라는 것이, <여성건강보고서>의 결론이다.
<딸이 되는 절차>(Daughter Rite/ 미셸 시트론/ 미국/ 1979년/ 53분)
“이 영화를 만들기로 결심한 것은 28살이 되던 날 아침이었다”는 내레이션으로 시작하는 <딸이 되는 절차>는 다큐멘터리 형식을 흉내낸 실험영화다. 두 자매와 그녀들의 어머니를 통해 여성들이 가족 안에서 어떤 관계를 맺고, 어떻게 갈등하는지를 조명하기 위해 두 가지 다른 형식의 화면을 교차편집하여 진행한다. 감독의 것으로 들리는 내레이션과 함께 등장하는 홈비디오 화면 그리고 어머니에 대해 조금씩 다른 진술을 하는 두 자매의 인터뷰로 보이는 화면이 그것이다. 마지막 순간 우리는 내레이터도 인터뷰이도 픽션임을 알게 된다. 그러나 “내 어머니가 이것을 보면서 고통스러워할 것을 상상한다. 그리고 그녀는 묻겠지. ‘왜 이런 얘기를 해야만 했니?’”라는 마지막 내레이션은 그 어떤 고백보다도 큰 울림을 갖는다. 페미니스트 다큐멘터리의 사적인 언어를 유연하게 이용하면서도 여성들의 내밀한 공통의 경험을 영화언어로 표현한 균형감각이 놀랍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