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영옥이의 부재중 통화> 제작 이야기 [1]
2006-04-12
글·사진 : 이영진

5월11일 개봉을 앞둔 <국경의 남쪽> 제작진은 지난해 말 이색 마케팅을 계획했다. 북에서 남쪽으로 내려온 새터민(탈북자) 중 영화 속 선호(차승원)처럼 북쪽에 연인을 두고 남으로 내려온 이들의 애달픈 사연을 영상에 담아 알리자는 것이었다. 북에 아내와 자식을 남겨두고 남에서 새로운 가정을 꾸리며 살아가고 있는 <국경의 남쪽> 연출부 김철용씨의 이야기 <김선호가 태어나기까지>를 비롯, ‘국경의 남쪽, 사랑의 북쪽’이라는 이름을 단 프로젝트는 그렇게 시작됐다. 네편의 단편다큐멘터리는 현재 제작이 모두 완료되어 인터넷에 공개(movie.daum.net/event/popup/tab/kookyung)된 상태. 이중 3월27일 마지막으로 선보인 <영옥이의 부재중 통화>는 실제 탈북 청소년들이 직접 제작에 참여했다는 점뿐만 아니라 완성도 면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작품이다. 주인공인 신영옥, 전광혁씨의 셋넷학교 ‘샘’이기도 한 김건(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씨가 연출하고 셋넷학교 학생인 주철씨가 촬영을 맡은 <영옥이의 부재중 통화>는 남쪽 생활이 여전히 낯설기만 한 청춘들의 사랑 이야기를 솔직하게 그려냈다. <영옥이의 부재중 통화>를 이미 본 이들이라면, 짧은 영상만으로는 갈증을 느낄지도 모를 일이다. 3월30일, 신영옥씨와 전광혁씨의 터전인 셋넷학교를 찾아 궁금증을 풀었다.

영옥이, 셋넷학교에서 광혁이를 만나다

“별명이오? 히히. 진드기에요. 학교가 연애하는 곳이냐고 욕 많이 먹어요.
난 나대로 눈치 봐가면서 하는 건데. (웃음)
그래도 꿋꿋하게 잘 버티고 있어요. 어떻게 하냐고요?
교장 선생님이 보면 손 떼고, 안 보면 손 잡고.”

영옥이는 샘 많은 열일곱 소녀다. 부푼 풍선마냥 통통한 볼살에 질투가 가득하다. “졸려 죽는 줄 알았어요.” 오후 수업을 끝내고 나오는 영옥이의 눈은 아직 개봉 전이다. 떴는지 감았는지 도통 구분이 안 된다. 그래도 영옥이는 한번 잡은 광혁(22)이의 손만은 좀처럼 놓지 않는다. 커플 티셔츠를 맞춰 입은 두 사람을 뒤따라 나온 철이(23)가 이때다 싶어 한마디한다. “학교에서 닭살로 유명해요. 욕먹어도 좀처럼 안 떨어진다니까요.” 입심 좋은 영옥이가 핀잔먹고 가만있을 리 없다. “오빠는 외로우니까 별소리 다 하는구먼.” 한방 먹은 철이, 갑자기 하늘 쳐다보고 딴청이다.

<국경의 남쪽>
<국경의 남쪽>

서울시 영등포구 당산동에 자리한 셋넷학교. 탈북 청소년을 위한 대안학교다. 복도까지 꽉 찬 신발들로 입구부터 어지럽다. 가정집처럼 꾸민 이 공간에서 20여명의 학생과 자원교사 샘들이 머리를 맞대고 씨름하고 있다. 교실이라고는 방 서너개가 전부다. 거실까지 아이들로 바글대는데, 대가족이 지내기에는 영 비좁은 공간이다. “인터뷰는 아무래도 바깥에서 해야겠네요.” 박상영 교장 샘이 인사 대신 미안해한다. 그래도 열일곱 영옥이에겐 셋넷학교만큼 따뜻한 보금자리가 없다. “전에 혜화동에 학교가 있을 때 처음 갔는데 이런 곳을 계속 다녀야 하나 싶었어요. 근데 지내보니까 여기만한 곳이 없어요. 평생 여기 있고 싶다니까요.”

셋넷학교에 대한 영옥이의 남다른 애정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남자친구 광혁이를 이곳에서 만났기 때문이다. “처음에 떡 하고 봤는데 남자들 중에 머리스타일이 제일 맘에 들었어요. 바가지 머리라고 해야 하나. 아니 류시원이 많이 하던 거 있잖아요. 눈을 가릴 듯 말 듯하는. 제 이상형도 그런 스타일이었거든요.” 이후 광혁이를 쭉 지켜봤다는 영옥이는 “우리 아빠를 닮았어요. 무뚝뚝하고 속이 좀 꽁하긴 한데 그래도 이 여자, 저 여자 흐지부지 안 하거든요.” 여자들 앞에서 농담 잘하는 남자들은 일단 블랙리스트에 올리는 영옥이. 숫기없는 광혁은 그런 영옥이 눈에 ‘심지 굳은’ 남자로 보였다.

영옥이와 광혁이의 사랑 이야기가 영화로?

“지난해 연말인가. 샘이랑 친구들이랑 포천에 놀러갔는데
그때 교장 선생님이 영화 찍으라고 하대요. 처음엔 농담하는 줄 알았어요.
장난인가 했거든요. 기대를 안 했어요. 그런가보다 했지.
근데 해가 바뀌니까 진짜로 영화사 언니가 온 거예요.”

두 사람의 러브스토리를 단편 형식의 다큐멘터리로 만들겠다는 전갈에 영옥이뿐 아니라 광혁이도 놀랐다. 학교에서 영상제작 샘들의 도움을 받아 뮤직비디오를 몇번 만들어봤다는 광혁이는 “진짜 사랑 이야기를 찍는 줄은 정말 몰랐다”고 한다. “교장 샘이 웃으면서 말씀하시니까 우리도 그냥 웃으면서 받아들였어요. 간단한 뮤직비디오 찍는가보다 하고.” 다른 커플들도 있을 텐데 왜 두 사람을 교장 샘이 추천했을까라고 물었더니 넉살 좋은 영옥이가 깔깔거린다. “아마 제가 제일 예뻐서 그랬겠죠.” 광혁이가 입을 삐죽거리는 걸 봤는지 영옥이는 혼잣말로 “맞아 죽을 소리 한다”고 너스레를 덧붙인다.

영옥이와 광혁이가 원래 찍고 싶어했던 건 남과 북의 서로 다른 ‘작업의 정석’이었다. “데이트하는 거나 고백하는 게 여기랑 달라요. 여기서야 문자로도 보내고, 컴퓨터로도 하지만. 북에선 남자가 편지 전해주고 막 도망가고 그래요. 좀 적극적이면 여자 집 앞에서 휘파람을 불거나 뻐꾸기 소리를 내고.” 영옥이는 북쪽에서는 남쪽처럼 거리에서 “사랑을 냉큼 나누는 건 상상도 못한다”고 말한다. “처음에 한국 와서 보니 전철에서도 뽀뽀를 하더라고요. 남자하고 여자하고 서로 붙들고선 몇번씩 입술을 뗐다 붙였다 하는데. 허리까지 감고. 충격적이었죠. 그거 보고는 가슴이 뛰어서 막 도망가고 그랬어요.”

탈북 전 중국에서 오래 생활했던 광혁이는 그래도 조금 다르지 않을까 했는데 아니다. “전철 탈 때면 일부러 맨 앞칸이나 뒤칸을 골라 탔어요. 거긴 별로 사람이 없으니까요.” 영옥이처럼 쇼크를 먹은 건 아니었어도 광혁이 또한 남쪽의 거침없는 애정 교환 앞에서 민망했단다. 그런 영옥이와 광혁이가 어쩌다 눈뜨고 못 볼 천하의 닭살 커플이 됐을까. “처음에는 욕 많이 했는데 지금은 우리도 그래요. 자유연애하다 보니까 그 심정 알 것 같아요. 다 보여주는 거잖아요. 남들한테 우리 사랑하고 있다는 거. 그게 좋은 점도 있던데요. 물론 쉽게 만나고 쉽게 끝나는 사랑은 이해 못하겠지만.”(영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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