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영옥이의 부재중 통화> 제작 이야기 [2]
2006-04-12
글·사진 : 이영진

북의 소꿉친구 남철이에게 보내는 영옥이의 편지

“그걸 카메라 시선이라고 해야 하나. 그거 생각하다 보니까
애정표현도 잘 못하고. 우리 뽀뽀 잘하거든요. 그러니까 재미없었어요.
게다가 혹시나 이 영상 찍은 거 보고 사람들이 어린 것들이
공부나 할 것이지 하면 어떡하나. 뭐 그런 걱정도 있었어요.”

연출맡은 김건(왼쪽)씨와 촬영맡은 주철씨.

그랬으니 남북 연애 비교체험이라는 애초의 의도가 달라질 수밖에. 영옥이는 “나중에 편집했더니 저런 영상이 나왔지 뭐예요”라며 연출을 맡은 김건씨를 탓하지만 말이다. “수업 끝나고 찍고 그러니까 아무래도 피곤하죠.” 그래도 영옥이는 촬영하면서 꽤 즐긴 눈치다. 두 사람 모두 검정고시가 코앞이라 학교에서밖에 못 만나는데, 촬영 핑계 대고 맘 놓고 데이트를 할 수 있었기 때문. “카메라도, 샘도 나중 되니까 신경 안 쓰게 되더라고요.” 일산 호수공원에서 자전거도 타고, 솜사탕 먹으며 재잘거릴 수 있어서 좋았다는 영옥이는 목석같던 광혁이가 촬영하다 돌아가는 길에 춥냐며 제 옷을 벗어주기도 했다고 자랑이다.

<영옥이의 부재중 통화>는 북에 있는 소꿉친구 남철이에게 보내는 영옥이의 편지가 내레이션으로 흘러나오면서 동시에 영옥이와 광혁이의 남쪽 일상을 따라간다. 다큐를 본 이들이라면 무덤덤하면서도 살가운 영옥이의 목소리를 잊지 못할 것이다. 그 애틋한 목소리가 좋았다고 하자, “너무 목소리가 울리고 째지는 것 같지 않아요? 내가 찍어서 어색한 건가” 한다. 곁에서 잠자코 있던 철이가 만회라도 할 모양으로 “영옥이 야 연기 잘해요”라고 칭찬하는데 영옥이 표정이 갑자기 심각해진다. “저 연기 한 거 아니라요. 그리운 북쪽 친구들에게 얘기하고 싶었던 거 한 거예요. 원고야 샘이 다듬어주셨지만, 감정은 제 거예요.”

“너도 기억나니. 봄에 눈이 채 녹지 않았는데 진달래꽃 망울진 거 뜯어와서 집에다 걸어놨던 거.” 영화 속 들뜬 목소리 뒤에는 영옥의 털어놓지 못한 서글픔도 자리하고 있다. 함경북도 회령이 고향인 영옥이는 촬영하는 동안 고향 생각에 몇 차례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한국 와서 얼마 있다가 중국에 공부하러 갔어요. 그때 국경 강가에서 멀찍이 고향을 본 적이 있는데 가을걷이하더라고요. 마스카라가 번지는 것도 모르고 펑펑 울었어요. 중국에서 탈북자들 다시 잡아들인다고 해서 겁이 나 한국으로 왔지만. 촬영하면서 그때 생각이 많이 났어요.”

‘남철아, 통일되면 만날 수 있겠지’

“저 원래 싸우는 거 되게 싫어해요. 근데 딱 한번 주먹질한 적 있어요.
5학년 땐가. 그때는 철이 없어서 그런지 몰라도. 나이 어린 초딩들하고 같이
학교 다니는 것도 그런데 부모없는 탈북자라고 놀리더라고요.
그래서 실컷 패줬어요. 그 뒤로 친구들이 나한테 함부로 말 못하게 됐어요.
근데 나중에 저 때문에 그런 상황이 벌어졌다는 게 참을 수 없도록 싫더라고요.
다들 내 눈치 보고 지내야 하니까.”

영옥이는 고아다. 부모님은 여섯살 때 모두 돌아가셨다. 북에서도 할머니와 단둘이 살았고, 남으로 올 때도 중국에서 만난 언니와 단둘이었다. 그래서 남들 앞에선 또래 남자 애들보다 씩씩해 보이지만, 뒤돌면 아무도 모르게 우는 울보다. “운동회가 싫었어요. 비오는 날도 싫었고. 부모가 뭐 해줬다고 자랑하는 애들 보면 어찌나 꼴 보기 싫던지. 게다가 누가 놀리면 엄마나 아빠한테 이르곤 하잖아요. 근데 난 없으니까. 지금도 혼자 다니는 거 싫어해요. 외로움 벗어나려고 일부러 깔깔대곤 하지만.” 광혁이가 옆에 있어도 그 갈증은 쉬이 달래지지 않는가보다.

영옥이의 외로움은 새로 발디딘 남쪽이, 또 남쪽 사람들이 마음을 열고 어깨를 내주지 않아서일지도 모른다. “통일되면 만날 수 있겠지. 너, 그때까지 조선 잘 지켜라. 앞산이랑, 강가랑.” 영화 속 마지막 내레이션에서 ‘조선 잘 지켜라’라고 말한 것이 못내 마음에 걸린다는 영옥이를 보면 그렇다. “이곳 사람들이 그 말 듣고 이상하게 생각하면 어쩌나 걱정이 돼요. 한국까지 왔는데 아직도 조선 잘 지키라고 한다면서. 나야 그냥 고향 모습이 내 기억대로 그대로였으면 하는 바람에서 한 말인데.” 탈북자에 대한 배타의 시선은 영옥에게 또 “빨갱이라고 볼까봐 무섭다”는 광혁에게도 좀처럼 넘기 어려운 장벽이다.

꿈이 없었다면 아마 지난 몇년 동안 영옥과 광혁, 두 청춘 모두 버거운 남쪽 생활을 버텨내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생계까지 제 힘으로 해결해야 했으니까. “손으로 하는 거는 좋아해요. 그림만 빼고. 머리 만지고, 꾸미는 거나 음식 예쁘게 만드는 거나 남 못지않아요. 남의 얼굴 만져주는 것도 좋아하고.” 헤어 디자이너나 푸드 스타일리스트가 되고 싶다는 영옥이. 그리고 “시를 쓰길 좋아하지만” 정작 희망은 기술자가 되고 싶다는 광혁이. 앳된 얼굴이지만, 미래를 조심스럽게 꺼내놓을 때 보면 완전 애어른이다. 10년 뒤, 두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인터뷰 끝에, 그들이 일굴 미래가 갑자기 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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